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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21 14:52

대성동이여기

조회 수 867 추천 수 134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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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사는 곳, 대성동           김영란
  
자유로의 끝, 통일대교를 건너 1번 국도를 따라 8킬로미터 정도를 더 가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태극기가 보인다. 민통선 내 남방한계선 안, 판문점 바로 옆, 남과 북을 갈라놓은 휴전선으로 부터 500미터 되는 지점에 내가 살고 있는 마을이 있다. 50여 가구, 200여 명이 살고 있는 자유의 마을 대성동이다. 유엔사 관할로 외부인의 출입이 제한되어 인구 변화가 거의 없는 육지 속의 섬이랄까? 자유의 마을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지만 생활하기에는 그리 자유롭지 못한 곳이기도 하다. 바람만이 지나다니는 철조망 너머로 가깝고도 먼 동네, 기정동에는 인공기가 펄럭인다.
  마을에 들어서면 주민들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제일 먼저 민정반에 들려 입촌 신고를 하고 마을 밖으로 나갈 때는 퇴촌신고를 해야 한다. 민정반이란 마을 주민들의 안전을 최우선시하는 경비부대로 JSA소속이다. 영농활동 및 작업신고는 6하 원칙에 의해 하루 전에 해야 하고, 작업 내용과 위치에 따라 사전 승인을 받아야 하는 곳도 있다. 간혹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면 사람들은 그런 곳에서 어떻게 살 수 있냐며 놀란다. 그렇지만 사람은 환경에 적응하기 마련이고 고향이기에 불편한 일상을 참고 견디며 살아왔다.
  나는 결혼을 하면서 대성동에 들어와 농부의 아내가 되었다. 서른두 살의 농촌 총각과 스물아홉 도시처녀의 결혼은 운명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가 없다. 당시 내 주위사람들은 농사를 짓는 사람과 결혼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랐지만, 사는 곳이 대성동이란 걸 알고는 더 놀랐다. 다행히 남편은 성실하고 자상했다. 그러나 시골 생활이란 것이 낭만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시골에서의 삶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대부분 기계의 힘을 빌려 농사를 짓기는 하지만, 그래도 사람 손이 많이 필요한 일은 서너 집씩 묶인 두레로 품앗이를 한다. 이때는 이른 새벽부터 이 집, 저 집으로 일하러 다니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고, 내 일과 이웃 일 구분 없이 우리 모두의 일이 된다. 그러기에 좋게는 이웃사촌이지만 지나친 친분 덕에 때로는 감추고 싶은 비밀이 있어도 그리되지 않았다. 살림살이 하나를 사도 금방 소문나고 집집마다 똑같은 그릇에 밥을 먹고, 아이들은 똑같은 환경에서 매일 같은 사람을 보고 자랐다. 도시에서 생활하던 나는 이런 공동체 의식이 강한 생활이 낯설고 당황스러웠다.
  대여섯 번의 봄을 지내고서야 어느 정도 이 생활에 익숙해졌다. 이곳 생활은 지극히 단순하다. 봄이면 넓은 대성동 들판에서 논둑 사이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와 개나리, 진달래, 아카시아 꽃을 보며 모내기를 하고 여름이면 너나없이 햇볕에 그을려 까매졌다. 비가 오면 벼가 물에 잠길까 애태우고 가뭄 들면 물 찾아 땀방울이 비 오듯 흘렀다. 가을이면 누렇게 고개 숙인 벼를 보며 고단함을 잊고, 겨울엔 정중동靜中動의 시간으로 한없이 평화로운 곳이다.
  그러나 올해는 달랐다. 동네에는 크고 작은 두개의 저수지 있고 그 물로 대대로 농사를 지으며 살아왔다. 계속된 가뭄으로 물이 줄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작년엔 두 저수지가 모두 바닥을 드러냈다. 치수작업의 일환으로 새로 공사한 농로는 하얗게 말라 본래의 임무를 다하지 못했다. 찰랑거리는 물소리를 들어 본 적이 언제인지. 저수지와 냇물이 흐르던 바닥엔 잡초만 무성한 상태에서 다시 봄을 맞았다.
  봄비의 경제적 가치가 수백억이 넘는다는 경제학자들의 말이 아니라도 물이 없으면 모를 낼 수가 없다. 웅덩이를 파고 관정을 뚫고 물이 있는 곳이면 몇 킬로미터도 마다 않고 호스를 연결했다. 처음 겪는 일에 당황한 사람들은 자기 논에 물 대기 바빴다. 평생을 한 동네 살아온 사람들이 물 때문에 얼굴 붉히는 일이 생겼다. 물기 없는 바짝 말라버린 논바닥을 바라보는 가슴은 무너져 갔다. 그렇게 타들어가던 논과 가슴에 물꼬가 트였다. 비는 오지 않았지만 이웃사촌들의 마음이 물과 함께 논바닥으로 흘러들었다.
  물과의 전쟁을 치르며 한숨 돌릴 즈음 동네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북한의 목함지뢰도발 사건이 일어나고 이어 연천폭격사건이 발생했다. 동네에는 비상이 발령되었고 주민들은 메뉴얼에 따라 외부 출입과 영농활동이 금지되었다. 일 년에 두 번씩 철수훈련을 해오긴 했지만 막상 현실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두려웠다. 안부를 묻는 지인들의 전화벨이 쉼 없이 울렸다. 그들의 염려 덕분에 불안하던 마음은 밝은 목소리를 되찾고 괜찮다는 말을 웃으면서 할 수 있었다. 장장 43시간에 걸친 마라톤회담 협상 끝에 극적인 합의가 이루어졌다. 기다리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없는 시간이 지나고 답답했던 마음의 체증이 가라앉았다. 누구보다도 긴장 속에 살아야만 했던 우리들, 오늘의 이 평화가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긴 기다림이 지나고 가을이 왔다. 가뭄을 해소시켜 줄 단비를 기다렸고, 전쟁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난 평범한 일상을 기다렸다. 시원한 빗줄기는 없었고 반쪽짜리 평화가 찾아왔다. 늦게 낸 벼도 뜨거운 태양 아래 이삭이 패고 나날이 영글어 갔다. 새소리 멀리 울려 퍼지는 고요 속에 우리들만의 외로움도 깊어가는 사이 들판은 누렇게 물들었다. 신바람 추수는 아니었지만 들녘을 자유로이 돌아다니며 가을걷이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었다.
  오늘도 민정반 옆에는 태극기가 펄럭이고 기정동에는 인공기가 찬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나의 바람은 단순하다. 이제는 내 고향이기도 한 이곳에서 소박한 농사꾼의 아내로 더 이상 마음 졸이지 않고 자잘한 일상을 행복으로 여기며 살고 싶을 뿐이다    <.qkr1595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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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鮮岩 신윤식 2015.12.21 15:20
    이화대학교 교수로 정년하고 이대평생교육원에서 수필쓰기를 가르치는 친구가있다. 대부분 주부들인 제자중에 DMZ대성동에 사는 제자의 열성적인 학구열을 이야기했다. 나는 "대성동"이란 제목으로 수필을 써서 보내주면 "책과인생"이란 월간지에 수록해주겠다했더니 보내온 "내가사는곳,대성동" 수필원고이다. 1월 아니면 2월호에 게재될것이다. 먼저 동기여분들께 보내드린다
    鮮岩 신윤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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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혁 2015.12.22 13:34
    퇴임 교수의 수필로 DMZ대성동에 사는 제자의 수기를
    소개 해 주시어 고맙네. 무엇보다도 우리 홈에 글을 쓰는
    동기가 한 사람 더 늘었으니 반갑네.
    새 해에는 더욱 건강하시고 다복하시기를 기도드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