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일보와 국립현대미술관, ㈜로렌스 제프리스가 공동 주최하는 이번 전시회의 작품은 헤이그 소재 마우리츠하위스 왕립미술관 소장품으로 거장 렘브란트의 대표작 ‘깃 달린 모자를 쓴 남자’를 비롯해 루벤스의 ‘로마의 승리’, 반다이크의 ‘화가 퀸테인 시몬스의 초상’ 등이 포함돼 있습니다. 이들 작품은 국내 교과서와 서양 미술사를 장식한 명작으로 책에서만 보던 것을 직접 실물로 감상할 수 있는 귀한 기회가 될 것입니다. ![]() ![]() ○ 장소=덕수궁미술관(서울 지하철 시청역 1호선 2번 출구, 2호선 12번 출구) ○ 입장료=일반 25∼64세 1만원, 19∼24세 8000원, 초중고교생 6000원 (* 30인 이상은 2000원씩 할인) ○ 문의=덕수궁미술관 02-753-7222 02-779-5310∼2 www.moca.go.kr, 동아일보 문화사업팀 02-2020-1620 www.donga.com ![]()
![]() 인플레이션, 경제 성장률, 실업률 등을 비교해 17세기 이후 인류사에서 황금기로 기록할 만한 여섯 시대를 꼽았는데 그 중 최장기간 경기 호황을 누렸던 시대로 ‘네덜란드의 17세기’가 선정됐다. 네덜란드는 영국이 대제국을 건설하기 훨씬 전 상업을 중시하던 중상주의 시대의 패자(覇者)였다. 인구는 200만 명에 불과했지만 유럽 선박량의 5분의 4를 보유하고 있었고, 동인도회사를 앞세워 인구 중 절반인 100만 명가량이 아시아권으로 진출했다. 그들 중에 조선 땅에 표류해 13년간을 살았던 ‘하멜’도 있었다.》 이 시기를 ‘황금시대’ (Golden Age)로 만들어낸 네덜란드인들은 경제적으로 풍요로웠으며 문화적으로도 융성했다. 가장 두드러진 분야가 회화였다. 신흥 부르주아들의 등장과 개인주의의 확산으로 욕망을 죄악시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가 맞물려 그림은 최고의 문화상품으로 떠올랐다. 이전까지만 해도 종교화나 역사화에 국한됐던 서양회화는 17세기 네덜란드에 이르러 초상화, 정물화, 풍속화 등 다양한 장르로 확산됐으며 작품주제도 신에서 인간으로, 절대에서 상대로, 초월에서 일상으로 내려왔다. 이른바 회화의 혁명기를 연 셈이다. 렘브란트와 루벤스가 포함된 17세기 네덜란드 화가들의 작품 50점이 선보이는 ‘위대한 회화의 시대’ (15일∼11월9일 덕수궁 미술관)를 보는 감상 포인트는 단순히 거장들의 작품을 원화로 만난다는 차원을 넘어 이 같은 역사적 문화적 상상력을 수혈 받는 데 있다. 자본주의 질서 속에서 꽃 핀 17세기 네덜란드의 그림들을 통해 찬란한 문화의 토대는 물질의 풍요로움이란 자각과 함께 결국 시대를 빛나게 하는 문화적 상상력이란 자유와 관용임을 깨닫게 된다. ![]()
![]() 남자의 초상 이 상반신 초상은 회색 배경 앞에서 상체를 관객 쪽으로 돌린 채 서 있는 35세 가량의 남자를 그린 것이다. 그의 쾌활한 태도는 장난기 어린 표정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는 다시 곱슬거리는 수염, 그리고 귀를 덮은 뻗친 머리카락으로 한층 강조되고 있다. 또 이 유쾌한 남자는 커다란 흰색 소매와 어깨를 완전히 덮는 레이스 깃이 달린 광채나는 검은색 자켓을 입고, 검은색의 커다란 테두리가 있는 모자를 쓰고 있다. 남자의 상반신상을 그린 프란스 할스의 또 다른 패널화 두 점(드레스덴 미술관)은 크기와 양식 면에서 이 작품과 비교할 만하다. 모델의 밝은 성격조차도 동일할 뿐 아니라, 둘 다 일반적으로 1633년경의 작품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세 작품 모두 실물 크기의 시민군 보병 초상을 위한 예비 습작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좀 더 숙고해 볼 문제인데, 이 습작을 통해 완성된 작품 자체가 남아있지 않을 뿐더러, 현존하는 할스의 10점의 시민군 초상의 경우 어떠한 예비 습작도 알려진 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작품들은 17세기의 실내 그림과는 구별되는 작은 형태의 초상화 시리즈에 속하는 것으로 보인다. 프란스 할스가 네덜란드 황금시대의 가장 위대한 대가로 평가되고 있고, 또 장수했음에도 불구하고(그는 여든 번째 생일을 조금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그에 관한 전기적 자료들은 거의 없다. 그의 부모는 스페인이 앤트워프를 공격한 이후에 북부 네덜란드로 이주한 신교도로서 하를렘에 정착했는데, 바로 이 곳에서 프란스 할스는 여러 미술가들 및 미술가 전기작가인 카럴 판 만더(Karel van Mander, 1548-1606)와 함께 수학했다. 프란스의 남동생 디르크 할스(Dirck Hals, cat. no. 14) 역시 화가였으며, 그의 몇몇 자식들 또한 화가가 되었다. 할스는 매우 생산적인 작가였으며 일생동안 수많은 작품을 주문 받았다. 현재 그의 작품으로 알려진 것은 약 200여 점에 달하며, 그 대부분은 초상화이다. ![]() 여인숙의 농부들 1626년경 아드리안 판 오스타더는 아마도 프란스 할스(cat. no. 15)의 제자였을 것이다. 하지만 판 오스타더 작품에서 프란스 할스의 영향은 거의 드러나지 않는 반면, 판 오스타더와 같은 시기에 할스와 함께 수학했던 아드리안 브라우어Adriaen Brouwer의 영향은 명백히 드러난다. 또 1640년 이후의 작품에서는 렘브란트의 영향이 감지되기도 한다. 판 오스타더는 보기 드물게 다작을 한 작가로, 현재 그의 작품으로는 에칭 50점과 수많은 드로잉 이외에도 800점 이상의 작품이 남아 있다. 그는 일생에 걸쳐 꾸준히 회화 작업을 했으며, 암스테르담 출신의 부유한 여자와 결혼하게 되면서 더욱 유복한 삶을 영위했다. 그는 또한 요절한 화가 이삭 판 오스타더(Isack van Ostade, cat. no. 36)의 형이자 스승이기도 하다. 얀 스테인(Jan Steen, cat. nos. 45-46)과 더불어, 아드리안 판 오스타더는 농부의 삶을 그리는 네덜란드 최고의 화가였다. 스테인의 화려한 그림이 재료와 인물 묘사를 결여하고 있는 데 비해, 판 오스타더는 특히 작은 판형의 그림일 경우, 섬세한 빛의 표현과 화려한 색채 사용에 있어서 탁월했다. 대개 1650년에서 1670년 사이에 제작된 그의 최고작품들에서는 농부들이 등장하는 실내나 여인숙 장면이 묘사된다. <여인숙의 농부들>은 그의 작품 중에서도 재치가 넘쳐나는 개성적인 작품이다. 사람들은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시거나, 음악을 연주하거나, 개를 데리고 놀고 있으며, 이런 장면들에서는 편안함과 만족스러움이 넘쳐난다. ![]() 정물 빌럼 헤다와 피터 클라스존(Pieter Claesz., cat. no.7)는 단색조의 연회용 식탁으로 통칭되는 장르를 그린 대표적 작가들이다. 1620년대에 인기를 끌었던 이런 종류의 정물화는 단색조의 회색과 갈색으로 그려졌다. 전형적인 연회용 식탁 그림에는 온갖 종류의 음식들뿐 아니라 화려한 사물들로 꾸며진, 풍부하게 차려진 식탁이 포함된다. 또 때로는 이 그림에서처럼, 손님들이 방금 떠난 듯이 뒤집힌 유리잔들이나 먹다 남거나 잘린 채로 흩어져 있는 음식들이 묘사되어 있을 때도 있다. 그러나 보다 면밀하게 관찰해보면, 이 외관상의 어지러움이 실은 세심하게 구성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즉, 헤다는 전체가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그런 방식으로 사물들을 배치했던 것이다. 여기서 사물들은 왼쪽 상단에서 오른쪽 하단으로 이어지는 선을 따라 배치되어 있다. 또 중앙에 놓인 접시는 관객 쪽을 향해 탁자의 모서리 밖으로 튀어나와 있음으로 해서 환영적인 깊이감을 강조하고 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시선을 이동하면서 보면, 뚜껑이 열린 포켓 시계와 커다란 포도주잔(roemer), 뒤집혀진 유리잔(berkemeyer), 발이 달린 은대접(tazza), 나이프와 껍질이 반쯤 벗겨진 레몬과 두 조각의 레몬이 놓인 백납 접시, 고등어가 놓인 백납 접시, 그리고 롤빵이 놓여 있으며 빵 주위에는 도토리가 흩어져 있다. 그리고 화가는 여기서 다양한 물체의 질감과 그 표면에 반사되는 빛을 매우 성공적으로 표현해냈다. 그런데 표면상 사실적으로 보이는 이 장면 속에는 보다 심오한 의미가 숨겨져 있다. 예컨대, 뚜껑이 열린 포켓 시계는 시간의 경과를, 따라서 결국 무상함이라는 삶의 본질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 바니타스 정물 1617년 이후로 피터 클라스존는 하를렘에서 활동했는데, 여기서 그는 빌렘 헤다(Willem Heda, cat. no. 16)와 더불어, 17세기 상반기에 활동한 가장 중요한 정물화가였다. 헤다와 마찬가지로, 피터 클라스존 역시 탁자 한 구석에 놓인 사소한 사물들로 구성된 정물화를 그린 작가였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1623년에서 1657년 사이에 그려진 정물화들로, 단순한 배경을 바탕으로, 탁자 가장자리에 펼쳐진 하얀 천 위에 빵이 놓인 백납 접시와 청어 한 마리, 포도주잔, 화로 등등이 놓여 있는 것을 묘사한 것들이다. 1630년경이 되면, 이런 작품에서 선적인 특징이 감소하는 대신 채색은 더 화려해지며, 회색과 갈색 색조는 보다 섬세해진다. 또한 사물의 배치가 점점 자연스러워짐과 동시에, 프란스 할스(cat. no. 15)의 영향으로 붓질은 더 느슨해지게 된다. 이 시기에 피터 클라스는 주로 대기의 분위기 표현에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이번에 출품된 <바니타스 정물>은 이 같은 관심 이동이 있었던 시기의 것이라고 볼 수 있는 몇 작품들 가운데 하나이다. 해골을 비롯해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촛불 심지, 그리고 거꾸로 놓인 유리잔과 시계 등, 여기에 묘사된 사물들은 모두 세속적 삶의 짧고 덧없음을 나타내는 상징들이다 ![]() 안뜰에서 담배 피우는 남자와 술 마시는 여자 하를렘에서 수학한 후에 델프트로 돌아온 피터 드 호흐는 얀 베르메르(Jan Vermeer, 1632-1675)와 함께 그 유명한 델프트 화파를 대표하는 가장 중요한 화가가 되었다. 1660년 무렵에 드 호흐는 중산층 가정의 안뜰을 많이 그렸는데, 이번에 전시된 작품 또한 그 중 하나이다. 이 작품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양식화된 특성 및 침착하고 평화로운 인물들과 조화를 이루는 장면의 분위기이다. 드 호흐는 일반적으로 실재를 충실하게 묘사하는 대신 새로운 실체를 만들어내기 위해 건축적 요소들을 조합했다. 벽으로 둘러싸인 테라스 안쪽으로는 탁자 주변에 앉아 있는 남자와 서 있는 여자가 보인다. 남자는 파이프 담배를 피우고 있으며 여자는 큰 잔으로 술을 마시고 있다. 안뜰 뒤쪽 벽에 있는 문은 열려 있는데, 이 문으로 몇 걸음만 가면 정원이 나오게 된다. 어린 소녀 하나가 벌겋게 달아오른 숯불이 담긴 화로를 들고 오른쪽에 있는 집에서 나오고 있는데, 아마도 남자가 탁자에 놓인 두 번째 파이프에 불을 붙이는 데 그것을 사용할 것 같다. 멀리로는 델프트 새교회의 첨탑이 보인다. 그리고 뒤편으로는 풍화에 씻긴 담벼락이 보이는데, 이것은 오랜 도시 성곽의 일부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장면은 현실에서는 한가지 요소만을 끌어들인 후 전체를 조심스럽게 구성해 내고 있다. ![]() 조개와 꽃이 있는 정물 발타사르 판 데어 아스트는 정물화를 전문적으로 그린 화가이다. 그의 초기 작품은 경직된 구성을 보여주지만, 1619년 이후부터는 이전에 선호했던 대칭적인 꽃꽂이 배열을 버리고 보다 밝은 배경에 정물을 배치하는 자유로운 양식으로 변화해갔다. 이 작품은 판 데어 아스트의 전형적인 후기 작품으로, 그림 속의 다양한 요소들은 신중하게 조합되었으며 경직된 대칭성은 찾아볼 수 없다. 또 꽃다발 뒤의 배경은 밝게 채색되어 있는데, 이런 특징들로 미루어 볼 때, 이 작품은 1640년경에 제작된 것이라고 추정된다. 판 데어 아스트는 정물을 보다 생기 있게 표현하기 위해서 파리나 나비, 유충, 도마뱀 같은 곤충들을 화면에 함께 그려 넣었다. 또 화면의 전경에는 여섯 개의 조개껍질이 놓여 있는데, 마우리츠하위스에 소장된 1620년作 <조개껍질과 과일 정물>(도 1a)에서도 볼 수 있듯이, 판 데어 아스트는 종종 꽃 정물에 조개껍질을 함께 그려 넣었다. 그리고 이와 같이 조개껍질을 묘사하는 솜씨는 그만의 중요한 특징이기도 하다. 꽃이 꽂혀 있는 자기 화병은 중국 명대(明代)의 만력제(萬曆帝, 재위 기간 1573-1619)에 생산된 것으로서, 1600년경부터 네덜란드에서는 중국 도자기에 대한 수요가 엄청났으며, 이 도자기들은 아시아와 네덜란드의 해로를 오가는 네덜란드 상인들의 선박을 통해 수송되었다. 그리고 판 데어 아스트와 같은 작가들은 먼 이국의 장인들이 만들어낸 물건들을 작품 속에 즐겨 그렸던 것이다 ![]() 램프를 든 젊은 여인 헤리트 다우는 17세기에 가장 인기 있고 가장 수입이 많았던 화가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14살 때 자신보다 겨우 7살이 많던 렘브란트의 제자가 되었으며(cat. nos. 38-40), 3년간 렘브란트 공방에서 지내면서 매우 정교한 회화양식을 발전시켜나갔다. 이런 점에서 그는 훨씬 자유로운 방식으로 작업했던 스승 렘브란트와 다르며, 그래서 일명 ‘레이든의 정밀화가 Leiden fijnschilders’(매우 정교한 붓질을 사용하는 화가들)라고 알려진 화가 그룹의 창시자로 여겨진다. 이 화가들의 특징은 세부를 풍부하게 묘사한다는 것인데, 그 묘사가 얼마나 정교한지 붓질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이다. 이들은 대개 일상적인 풍속화를 그렸는데, 이 장면들은 종종 석재 창문틀로 테두리가 둘려 있다. 이 밖에도 이들은 성서적인 장면들을 자주 그렸다. 1650년대 후반부터 다우는 자신이 도입한 새로운 유형의 작품으로 유행을 만들어냈는데, 그것은 바로 야경이었다. 어스레하게 빛나는 장면들을 그리는 그의 솜씨는 어디서든 칭송되었으며, 촛불이나 램프 불빛이 비치는 가운데 창문 난간에 앉아 있는 인물상을 등장시킨 장면을 담은 일련의 그림들을 그렸다. 이 작품에서는 젊은 여인 하나가 왼손에 든 램프의 불꽃에 의해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데, 다른 한 손으로는 이 빛을 가리고 있기 때문에 얼굴과 손가락에는 사랑스러운 홍조가 드리워지고 있다. 누군가를 맞아들이는 듯한 이 여인의 표정과 창 밖으로 몸을 내밀면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시선을 보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사실은 그녀가 한밤의 밀회를 나눌 자신의 연인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임을 알 수 있다. ![]() 아픈소녀 의사의 왕진은 얀 스테인이 즐겨 그린 주제로서, 1660년대에는 이 주제를 가지고 최소한 18점의 작품을 제작했다. 이 주제를 통해 그는 당시 많은 여성들을 괴롭히는 것처럼 보였던 병, 일명 상사병뿐만 아니라 돌팔이 의사를 조롱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아주 성공적으로 이런 주제의 희극적 요소들을 강조하고, 그것의 진가를 십분 발휘할 수 있었다. 하녀 하나가, 우스꽝스럽고 이상하게 차려입은 의사가 우울증에 빠진 젊은 여성의 맥박을 재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예로부터 맥박은 심장 상태를 측정하는 좋은 지표로 여겨졌는데, 통설에 의하면 사랑하는 사람을 보면, 심지어 그들의 이름을 듣기만 해도 심장박동이 빨라진다는 것이다. 한편 벽난로 장식 위에는 활과 화살을 든 작은 큐피드 이 서 있는데, 사랑의 신이 등장한다는 사실을 통해 이 작품에서 격정이 주요 주제로 다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또 탁자 위에는 소변을 담은 병이 놓여 있는데, 당시 돌팔이 의사들은 소변의 색깔이나 구성성분을 보면 여성이 상사병에 걸렸는지의 여부를 알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작품 속의 의사는 17세기 당시의 의상을 입고 있지않다. 즉 얀 스테인은 의상을 통해 의사를 우스꽝스럽게 보이도록 한 것이다. 하지만 의사는 확신에 찬 눈빛을 보이면서 자신이 돌팔이라는 사실을 숨기려 하고 있다. 결국 얀 스테인은 이 희극적인 장면에서 돌팔이 의사와 가엾은 소녀를 모두 조롱하고 있으며, 배경에 있는 하녀는 조소를 머금은 채 이 장면을 관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 카리클레아로부터 승리의 종려가지를 하사받는 테아게네스 혼설라르스데이크Honselaarsdijk 궁전은 프레데릭 헨드릭 총독이 좋아하던 관저였다. 이 아름다운 저택의 장식 프로그램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이곳이 제2의 퐁텐블로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이다. 승리의 장면들이 계단을 장식하고 있고, 위층 홀에는 사냥 장면들이 걸려 있지만, 총독의 부인인 아말리아 판 솔름스Amalia van Solms의 개인 숙소에는 목가적 주제와 러브스토리를 묘사한 그림이 걸려 있었다. 1625년에서 1628년 사이에 아브라함 블루마르트는 당시 널리 읽혔던 소설인 <에디오피아의 설화Historiae Aethiopicae>를 바탕으로 연작을 그렸는데, 이 작품은 그 중에서 테아게네스Theagenes와 카리클레아Chariclea의 모험을 다룬 것이다. 아마도 프레데릭 헨드릭 총독은 퐁텐블로에서 이런 연작들을 보았을 것이다. 카리클레아로부터 승리의 종려가지를 수여받는 테아게네스를 그린 이 작품은 총독 소장품에 남아 있는 유화 작품으로는 유일한 것이다. 그 이야기를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에티오피아의 어떤 여왕이 너무도 아름다운 안드로메다를 묘사한 그림을 숭배한 나머지 백인 아이를 낳게 되었다. 그러자 부정을 저질렀다는 비난을 받을 것이 두려워진 이 여왕은 자신의 딸을 그리스의 델피에 있는 카리클레스Charicles 사제에게 바쳤고, 이 사제는 자신의 이름을 따라 아이의 이름을 카리클레아라고 지었다. 그리고 이 아이는 수녀가 될 것을 맹세했지만 테아게네스가 델피에서 열린 경기에서 승리를 거둔 어느 날, 그녀는 자신의 서약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말았다. 승리의 종려가지를 하사받은 테아게네스는 카리클레아의 손에 입을 맞추었고, 이내 그 둘 사이에는 사랑의 감정이 타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사랑에 빠진 이 둘은 카리클레아의 아버지가 있는 나라를 찾아가면서 많은 고난을 겪어야 했다. 블루마르트는 이 작품에서 이야기의 두 순간을 묘사하고 있다. 즉 화면 왼쪽의 배경에는 경기가 펼쳐지고 있으며, 오른쪽 전경에는 사랑에 빠진 연인들의 삶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되는 입맞춤 장면이 그려져 있다. ![]() 헤이그의 마우리츠하위스와 호프페이퍼 호수의 풍경 지붕 꼭대기에 있는 네 개의 굴뚝으로 식별되는 마우리츠하위스는 이 작품의 중앙 뒷 배경에 그려져 있다. 17세기 당시 시청사였던 이 건물에는 현재, 이번 전시회에 그림을 대여해 준 미술관이 들어서 있다. 마우리츠하위스의 오른쪽에 있는 둑을 따라 늘어선 건물들은 대규모 공업단지의 일부이다. 13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 절충주의적 구조물들은 네덜란드의 백작들이 살던 성의 일부로서, 네덜란드 공화국의 총독을 지낸 오란녀家가 여러 세대에 걸쳐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 대규모의 보수와 신축에도 불구하고, 이 저택의 특징은 오늘날까지도 잘 보존되어 있는 편이다. 세 방향에서 성을 둘러싸고 있는 운하의 일부로 만들어진 호프페이퍼 호수를 따라 말을 탄 사냥꾼들이 무리지어 있으며, 이 그림 속에 등장하는 다른 건물들 중에서도, 두 그루 나무의 오른쪽으로 커다란 창문이 있는 궁정 예배당 건물을 찾아낼 수 있다. 이 작품 속에 묘사된 건물들은 1814년 이후로 네덜란드 정부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다. 17세기 말에 헤이그를 묘사한 그림이나 오란녀家가 살던 이 대저택을 그린 그림들은 매우 인기를 끌었고, 특히 이 가문의 새로운 귀공자였던 빌럼 3세(1650-1702)가 등극한 1672년 이후로는 더욱 그러했다. 그리고 그 결과, 이 도시와 오란녀가문 간의 역사적 유대관계가 회복되었다. 헤리트 베르크헤이더가 이 그림을 완성했던 1690년 무렵이 되면 오란녀家의 인기는 절정에 달한다. 이어 1677년에 빌럼 3세가 영국의 공주 메리 스튜어트(Mary Stuart, 1662-1695)와 결혼하고, 1689년에 이들 부처는 영국의 왕위에 오르게 되었으며, 그로부터 2년 후 총독 겸 국왕이었던 빌럼 3세는 자신의 조국을 당당히 물려받게 되었다. 그래서 이 장면은 한때, 빌럼 3세가 헤이그에 잠시 머물던 때를 그린 것이라고 여겨지기도 했다. 화면의 오른쪽 전경에는 기품 있는 일행들이 말을 탄 채로 ‘감옥의 문Prisons Gate`이라고 불리는 문을 통과하고 있다. 이 감옥 위에는 황새 둥지가 있는데,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이 새를 상징으로 삼는 이 도시의 문장이다. 사냥꾼들 뒤로는 두 명의 말 탄 나팔수들이 뒤따르고 있으며, 몰이꾼과 사냥견을 데리고 나선 매사냥꾼이 그 뒤를 따라가고 있다. 사냥꾼들은 말을 쉽게 몰면서 나아가고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마구를 쥐고 있다. 또 두 그루의 나무 옆에는 매사냥꾼이 있는데, 그의 사냥용 매들은 채찍 위에, 그 중 한 마리는 그의 장갑낀 손 위에 앉아 있다. 그리고 그는 채찍과 사냥용 부대자루를 든 몰이꾼과 대화를 나누는 중이다. 그리고 이 문의 오른 쪽에 아이와 함께 앉아 있는 거지 여인은, 사냥이 엘리트들의 오락이라는 사실을 강조해준다. ![]() 엘텐 근처의 라인강에서 바라본 풍경 네덜란드 풍경화가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화가로 알려진 얀 판 호연의 ‘엘텐 근처 라인강에서 바라 본 풍경’((1653년). 종교화나 역사화에 국한됐던 서양회화는 17세기 네덜란드에 이르러 초상화, 정물화, 풍속화 등 다양한 장르로 확산됐다. 네덜란드의 다양한 풍경화는 80여년의 투쟁 끝에 독립을 성취한 사람들의 국가적 자부심과 신을 믿는 칼뱅주의자들이 신의 창조물로서 자연을 얼마나 사랑하고 경외했는지를 보여준다. 얀 판 호연은 네덜란드의 풍경화가 중에서도 가장 뛰어나고 중요한 화가이다. 그의 초기작은 매우 활기차면서도 화려한데 1627년에 그려진 그림들은 구성면에서 더 단순하며, 색채의 사용은 보다 단조롭다. 다른 화가들과는 달리 얀 판 호연의 경우에는 끊임없이 그 기량이 향상되어갔기 때문에 1650년 이후에 제작된 그림들은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겨졌다. 1653년에 그려진 이 작품은 판 호연의 후기 양식을 대표하는 느슨한 방식을 보여주는 것으로 라인 강의 왼쪽 기슭에서 엘텐이라는 독일도시까지의 풍광을 담고 있다. 1652년에도 판 호연은 이와 유사한 엘텐의 풍경을 그렸는데(베르트랑 박물관, 샤토루), 더 작고 덜 섬세하게 그려진 이 작품에서는 강폭도 더 좁고 배들도 거의 묘사되지 않았다. 날짜가 기록되어 있는 판 호연의 여행 스케치북을 통해, 우리는 그가 언제, 어디서 작업했는지를 알 수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1647년경에는 네덜란드 북부와 남부를 여행했고 1648년에는 브라반트Brabant를 1650년과 1651년에는 라인강변을 여행했다고 한다. 1653년作으로 추정되는 이 작품은 아마도 판 호연이 그보다 몇 년 전에 현장에서 직접 스케치한 것을 바탕으로 그려진 것이라고 생각된다. ![]() 깃 달린 모자를 쓴 남자의 초상 렘브란트 판 레인은 17세기 네덜란드에서 가장 위대한 화가로 평가된다. 그는 아주 다재다능한 작가로서, 초상화뿐 아니라 기념비적 역사화도 많이 그렸다. 극적으로 표현된 암스테르담 민병대의 집단 초상화라고 할 수 있는 1642년作 <야경>(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은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렘브란트는 대담한 필치를 사용했으며, 흔히 작품에 빛과 어둠의 극명한 대조를 부여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라파엘, 티치아노 같은 이탈리아의 위대한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렘브란트 역시 이 작품에서처럼, 자신의 작품에 세례명으로만 서명했다. 또 렘브란트는 화가일 뿐만 아니라, 뛰어난 데생화가이자 동판화가이기도 했다. 그는 많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헤리트 다우(Gerrit Dou, cat. no. 9)처럼 그 중 많은 사람들이 화가로 명성을 얻었다. 이 작품에서는, 인상적인 차림새를 한 남자가 다소 거만하게 오른쪽 어깨 너머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톱니무늬 테를 두른 화려한 자주빛 베레모를 쓰고 있고, 금으로 수놓은 휘장과 망토를 두르고 있다. 1868년까지 마우리츠하위스의 주요 전시물 중 하나였던 이 작품은, 그것이 자화상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 해에 갑자기 인기가 높아졌다. 그러나 오늘날 이 작품은 ‘트로니tronie’ (see cat. no. 38)로 인식되고 있다. 17세기 당시에 ‘트로니’라는 용어는, 고유의 의상을 입은 특별한 인물 유형을 대표하는 사람들을 그린, 가슴 높이의 초상화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 때 모델의 정체성 같은 것은 규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누구든지, 심지어 화가 자신까지도 그런 작품의 모델이 될 수 있었다. 이 작품 속 인물이 렘브란트 자신과 너무도 닮았기 때문에, 이 트로니가 오랫동안 렘브란트의 자화상이라고 여겨졌던 것도 무리는 아니다. 트로니로 분류될 수 있는 그의 수많은 자화상에서는 찌푸린 표정, 열린 입, 눈 주위의 그늘 등이 한결같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이 초상들이 렘브란트와 닮았다는 것은 피상적인 관찰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는데, 특히 두드러진 콧날은 그와 너무나도 달라서 이것이 화가의 자화상이라는 것을 정당화하기가 어렵다. ![]() 겨울 풍경 야콥 판 롸이스달의 작품은 17세기 네덜란드 풍경화의 최고봉 중의 하나로 평가된다. 그는 자신만의 드라마틱한 풍경화를 발전시키면서 얀 판 호연(Jan van Goyen, cat. no. 12) 같은 풍경화가들의 사실주의적 작품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판 롸이스달은 모래언덕이나 시골길, 물레방아 같은 전형적인 네덜란드 풍경의 요소들로 풍경을 그렸으나, 후기에는 네덜란드적이지 않은 산이나 폭포를 그리기도 했다. 1660년도부터 판 롸이스달은 겨울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이 중 몇몇 작품은 대단히 음울한 느낌을 주는 것들로, 여기서 납빛 구름으로 뒤덮인 하늘은 스산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에 비해 모티프의 선택은 상대적으로 단순한데, 예를 들면 작은 건물들이나 길가에 서 있는 나무들, 혹은 전경에서부터 배경까지 대각선 방향으로 놓인 수로들이 주로 등장한다. 그리고 색채는 회색과 갈색류, 그리고 백설의 하얀 색으로 한정되어 있다. 이런 분위기를 자아내는 겨울 풍경 속에는 뒤편의 농가까지 구불구불한 시골길이 이어져 있으나 키가 큰 나무들 때문에 그 풍경이 정확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왼쪽의 물가에는 두 척의 배가 떠 있으며, 지평선 위로는 교회의 첨탑이 희미하게 보인다. 이밖에도 배와 농가 근처에서 많은 형상들을 식별해낼 수 있다. 거대한 번개구름이 장면 전체를 어둠으로 뒤덮고 있는데, 살짝 보이는 푸른 하늘을 통해서 아직 날이 저물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젊은 여인의 초상 루벤스는 이탈리아에서 체류한 8년 동안에 티치아노의 형태와 색채 처리, 미켈란젤로와 라파엘의 작품, 심지어는 헬레니즘의 조각에서조차도 영감을 이끌어냈다. 그리고 나서 네덜란드로 돌아온 이 플랑드르 작가는 이후 17세기의 가장 중요한 화가로서 성장해나갔다. 사실상 루벤스는 당시 플랑드르 회화의 지형도를 결정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즉, 그의 주제는 종종 전통적이었지만 그는 그것을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성과 및 당대 유행한 카라바조의 사실주의와 결합시켰다. 이 작품은 처음부터 루벤스의 작품으로 여겨졌는데, 작품 속의 여인은 보통 루벤스의 첫 번째 부인인 이사벨라 브란트(Isabella Brant, 1591-1626)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루벤스가 그렸다고 하는 브란트의 다른 초상화들과 비교해보면, 이 작품의 여인이 그녀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아직까지도 이 여인이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아무튼 이 여인이 입고 있는 의상은 스페인풍의 영향을 보여준다. 루벤스는 재능이 있는 조수들을 여러 명 둔 작업장에서 그림을 제작했는데, 이 조수들은 대가의 스케치를 바탕으로 그림을 그림으로써 이례적으로 높은 수준의 작품을 생산할 수 있었다. 그러나 루벤스가 작업한 정도는 작품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이 작품의 경우에는, 얼굴 표현에서 뛰어난 자질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아 얼굴은 루벤스가 직접 그렸다고 생각되지만, 얼굴 이외의 나머지 부분들은 틀림없이 한 명 또는 그 이상의 조수들이 그렸을 것이다. 안소니 반 다이크(Anthony van Dyck, cat. no. 10)와 프란스 스네이더스(Frans Snijders, cat. no. 44)는 루벤스 공방이 배출해낸 가장 유명한 화가들이다. ![]() 화가 퀸테인 시몬스의 초상 루벤스 이후로 17세기에 가장 유명했던 플랑드르 화가였던 안소니 반 다이크는 여러 장르에서 재능을 보였지만, 무엇보다도 그는 최고의 초상화가였다. <화가 퀸테인 시몬스의 초상>에서 잘 드러나듯이, 그는 모델의 리얼리티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도 인물에 기품과 우아함을 부여할 줄 아는 화가였던 것이다. 여기서 시몬스는 허리 높이에서 화면 중앙보다 약간 오른쪽으로 치우쳐 묘사되었으며, 얼굴은 왼쪽을 향한 채 회화 평면 밖을 바라보는 것처럼 보여서, 정지된 한 순간인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런 효과를 강조하는 것은 어깨에 느슨하게 걸친 코트와, 가장 엉성하게 그려진 것 같은 하얀 레이스 칼라, 그리고 판 데이크가 얼굴에 입체감을 부여하는 데 사용한, 신속하고 확신에 찬 붓질의 흔적이다. 1630년대부터 반 다이크와 몇몇 조판공들은 동시대의 인물들을 그린 반 다이크의 초상화를 판화로 재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도상연구Iconography』(미술가, 수집가, 통치자, 전사, 과학자, 정치가 같은 주요 인물을 그린 80여 점의 작품집)가 차례로 나오기 시작했는데, 이런 종류의 연속물 출판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부터 내려오는 전통에 속하는 것이다. 이 초상화는 1634년에 그려졌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해는 영국왕 찰스 1세의 궁정화가였던 반 다이크가 잠시 앤트워프에 있는 자신의 고향에 머물렀던 때이다. 『도상연구』에 있는 퀸테인 시몬스의 판화에 덧붙여진 설명에 따르면 그는 역사화가였다고 한다. 전시에 출품된 이 작품은 흠 없이 복원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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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히 좋은 작품 올리느라 애 많이 썼군요,
수고 많았어요.
젊어서 그런지 파워가 넘치는군요,!!
작품들이 대단합니다.
직접 가서 감상을해야할것을 이렇게 집에편히 앉아서 감상할수 있게해줘서 고맙군요
한문희씨는 예술에 조예가 깊군요.
다시 고마움을 표합니다.
7회 소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