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울 오후의 산책

by 향기 posted Oct 19,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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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을 감기로 고생을 하고 있는 터에
모처럼 시간 나는 오후인지라
눕고 싶은 마음과 쳐지려는 몸을 간신히 추스려서
이를 악물 듯이 운동화 끈을 조여 매고 모자를 푹 눌러썼다,
오래간만에 뒷산에라도 가려고 나섰다.
걸음이 맘대로 걸어지지 않았지만 욕심 부리지 않고
천천히 걷기로 다짐을 하며 출발을 했다.

아직도 추수하지 않은 논 사이로 갈대가 하늘거리는 모양이 보기 좋았다.
할머니 들깨 털어 키질하는 데서는 구수한 냄새가 났다.
길가에 심은 가지도 고추도 다 추워 보이는 날이다.
바람 가리운 양지에는 아직도 달맞이꽃이 피어있고
하얀 별꽃도 잔잔하게 피어있었다.
알토란은 벌써 다 캐어 갔나보다  작은 우산 만한 잎새가 다 땅에 떨어져
이미 다 말라져 있었다.
오랜만에 솔 냄새를 맡으니 코가 저절로 벌름거려진다.
아주 천천히, 천천히 걷는다.
조금이라도 이 향기를 내 몸 속에 넣어두기 위해서 인양....  
길가에 희한하게도 보라색 엉겅퀴 딱 두 송이가 피어있었다.
마치 나를 기다려준 것 같아서 오길 잘했다 싶었다.

친구 네 가게서 마신 솔잎 차가 영 제 맛이 나지가 않아서
내가 만들어보기로 했다.
봄에 난 솔잎으로만 차를 만드는 줄 알았는데 아무 때고 새로 난 잎이면
다 된다고 했다.
솔가지 끝에 새로 난 연둣빛 잎을 따는데  훔쳐 가는 느낌이 자꾸 들었다.
손에 송진이 묻어서 아직도 지지 않는다,
잘 발효되어 제 맛이 나면 되면 친구네 가져다주려는 생각에 마음이 들뜬다.

친구 생각하며, 제대로 된 빨간 단풍잎을 한 가지 구했는데
들고 오는 동안 예쁜 잎이 다 떨어져 버렸다.
내일 다시 구하러 가야지....  
아직 온전치 않은 몸이 따라줄라나 모르지만
내일은 또 내일 걱정하고...

돌아오는 길에 막 해가 지려고 하는 시간이라서 온통 세상이 빛나고 있었다.
소나무들이 모두 주황빛을 이고 있었다.
아파트 창문마다 황금빛이고...
이젠 다 어스름 빛도 사라지고 별들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