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2003.10.23 14:32

바람부는 가을 날

조회 수 1892 추천 수 414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새벽부터 바람이 아주 스산하게 분다.
검은 포도(鋪道) 위에는 노란 은행잎들이 이리저리 흩어지기도 하고,
굴러다니다가, 모였다 하면서
검은 바탕에 노란색만으로 된 그림을 계속 만들었다가 지우고 다시 만들고..... 있다.
"어제"의 후회도 같이 굴러갔으면 좋겠다.
이따금 지나가는 차들의 바퀴에 방해만 받지 않는다면 종일 그러고 있을 텐데...
그 중에 맘에 드는 작품이 하나쯤은 있겠지?
구워낸 도자기를 부숴버리는 도공(陶工)이 마음이 느껴진다.

새벽 하늘은 검었지만 동편에는 시퍼런 섬광이 비쳐오고 있었다.
섬뜩하게 느껴지는 푸른 섬광...
무사들이 지니고 다니던 긴칼에서 품어져 나올 것 같은 그런 푸른빛이었다.
"오늘"이라는 '책임'이 무섭게 그 빛에 실려 있는 것 같았다.

아침 햇볕은 온화했지만 바람은 몹시 세게 불었다.
내가 입은 Wind jaket에서 나뭇잎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나무들과 바람이 부딪히며 아주 스산한 소리를 만들어 냈다.

얼마 남아 있는 푸른 잎들도 제 몸을 오그러뜨리며 어떻게든 피해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무궁화나무는 씨앗들을 단단한 껍질 속에 집어넣고 단속을 하나보다.
아카시아 흰 꽃향기를 날려주던 바람이, 이제는 아름다운 선의 나뭇가지들만
남겨주고 이제는 함께 겨울 노래를 연주하자고 한다.
무성하게 뻗어나가던  칡덩굴들도 이제는 쉬어야할 때임을 알고 겸손히 옷을 벗고,
그 에너지를 땅 속 깊은 곳 뿌리에 저축하고 있나보다.
푸른색의 솔방울이 갈색이 되어 간신히 매달려 있고
다 따가고, 조금 남은 산초 열매의 검은빛이 불안해 보인다.

오랜만에 다시 와 본 뒷산에 가을은 벌써  숨어 버려하고
대신 벌써 겨울의 얼굴이 언뜻언뜻 보이려고 한다.
산길엔 누런 솔잎이 깔려져 발 밑의 감촉이 폭신하다.
소나무 그림자가 솔잎 양탄자에 가로줄 무늬를 만들어 주고 있었다.

시가지가 다 내려다보이는 쉼터의 정상에서 바람과 마주 선다.
봄에는 부드럽게 내 얼굴을 어루 만져주었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온몸을 감싸 주었는데,
이제는 쌀쌀맞게 나를 대한다.
그래도 아직 나는 바람이 좋다.  
좀 더 있으면 나도 변심할라나 모르지만...
바람, 그 속에는 봄, 여름, 가을, 겨울과,
아직 못 다 들은 많은 이야기들이 있어서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