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부터 바람이 아주 스산하게 분다.
검은 포도(鋪道) 위에는 노란 은행잎들이 이리저리 흩어지기도 하고,
굴러다니다가, 모였다 하면서
검은 바탕에 노란색만으로 된 그림을 계속 만들었다가 지우고 다시 만들고..... 있다.
"어제"의 후회도 같이 굴러갔으면 좋겠다.
이따금 지나가는 차들의 바퀴에 방해만 받지 않는다면 종일 그러고 있을 텐데...
그 중에 맘에 드는 작품이 하나쯤은 있겠지?
구워낸 도자기를 부숴버리는 도공(陶工)이 마음이 느껴진다.
새벽 하늘은 검었지만 동편에는 시퍼런 섬광이 비쳐오고 있었다.
섬뜩하게 느껴지는 푸른 섬광...
무사들이 지니고 다니던 긴칼에서 품어져 나올 것 같은 그런 푸른빛이었다.
"오늘"이라는 '책임'이 무섭게 그 빛에 실려 있는 것 같았다.
아침 햇볕은 온화했지만 바람은 몹시 세게 불었다.
내가 입은 Wind jaket에서 나뭇잎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나무들과 바람이 부딪히며 아주 스산한 소리를 만들어 냈다.
얼마 남아 있는 푸른 잎들도 제 몸을 오그러뜨리며 어떻게든 피해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무궁화나무는 씨앗들을 단단한 껍질 속에 집어넣고 단속을 하나보다.
아카시아 흰 꽃향기를 날려주던 바람이, 이제는 아름다운 선의 나뭇가지들만
남겨주고 이제는 함께 겨울 노래를 연주하자고 한다.
무성하게 뻗어나가던 칡덩굴들도 이제는 쉬어야할 때임을 알고 겸손히 옷을 벗고,
그 에너지를 땅 속 깊은 곳 뿌리에 저축하고 있나보다.
푸른색의 솔방울이 갈색이 되어 간신히 매달려 있고
다 따가고, 조금 남은 산초 열매의 검은빛이 불안해 보인다.
오랜만에 다시 와 본 뒷산에 가을은 벌써 숨어 버려하고
대신 벌써 겨울의 얼굴이 언뜻언뜻 보이려고 한다.
산길엔 누런 솔잎이 깔려져 발 밑의 감촉이 폭신하다.
소나무 그림자가 솔잎 양탄자에 가로줄 무늬를 만들어 주고 있었다.
시가지가 다 내려다보이는 쉼터의 정상에서 바람과 마주 선다.
봄에는 부드럽게 내 얼굴을 어루 만져주었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온몸을 감싸 주었는데,
이제는 쌀쌀맞게 나를 대한다.
그래도 아직 나는 바람이 좋다.
좀 더 있으면 나도 변심할라나 모르지만...
바람, 그 속에는 봄, 여름, 가을, 겨울과,
아직 못 다 들은 많은 이야기들이 있어서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