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2003.11.12 16:48

보충설명

조회 수 1406 추천 수 214 댓글 1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최근 이곳에 올려진 <관동대진재조선인추모제>에 관한 글이 약간의 부정확한
부분이 있고, 또 미진한 부분이 있어 보충하려합니다.

7회 동기생 여러분 인사드립니다.
김혁 형이 <관동대진재 조선인희생자 추모제>에 관한 자료를 보내라고 해서,
사무실 간사에게 간추린 자료를 보내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일을 서두르는 가운데, 아래 실린 글입니다만, 여러가지 매끄럽지 못한
글을 보냈습니다. 사과 드립니다.
나는 1985년 희곡<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라는 것을 발표하였습니다.
이 작품을 쓰기 위해 일본 현지조사를 하다가 충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일본 千葉縣 八千代市는 옛 일본 헌병사령부와 일로전쟁 때의 포로수용소가
있었던 나라시노[習志野] 지역입니다.
아시다시피, 지진이 일어나자 일본정부는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있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려으며, 이에 흥분한 일본인들이 自警團을 조직, 조선인으로
보이면 닥치는대로 살해하였습니다. 일이 커지자 다시 일본정부는 살해행위를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며, 그의 일환으로 조선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나라시노 지역 옛 포로수용소 건물에 수용하였습니다.
물론 말이 수용이었습니다. 그 안에는 스파이가 있어서 조금만 언행이 거칠면
데리고 나갔습니다. 끌려나간 사람은 누구도 다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을 죽이고 나니 어디엔가 묻어야 했습니다. 구덩이를 파고 몇명씩
떠밀어넣고 생매장을 하기도 하였고, 시체들을 한꺼면에 쓸어넣고 흙을
덮었습니다.
그러한 한곳이 八千代市에 있는 관음사 근처 한 밭두덕이었습니다.
이 절의 先代 주지가 이를 불쌍하게 생각하여 그 땅에 자그만 碑木을 세웠습니다. 이름하여
<爲關東大震災朝鮮人犧生者精靈諸位>따위입니다.
무참하게 이국 땅에서, 단지 조선인이었기 때문에 죽어간 이들이, 이 지역에
살던 2만명 가운데 6-7천명에 이르렀습니다. 그 비목을 목도하는 순간 나는
치미는 분노와 함께 눈물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사람의 목숨이란 때로는 한없이 고귀하기도 하고 또한 한없이 비천하기도
합니다. 재수가 없어서 죽었거니 하면 또 그럴 수도 있는 것이 생명입니다.
그러나 1923년의 일본인의 만행은 인간으로서 결코 용서할 수 없고,
또 이해할 수도 없는 蠻行이었습니다.
... 각설...
나는 그해, 1985년 서울에 돌아와서 문화-언론계의 친지들을 설득하여 모금을
하였고, 보신각 종을 본 딴, 높이 105cm의 범종을 헌정하였습니다.
관음사 경내에 基壇 1평의종각을 지었습니다. 한국의 나무, 흙, 기와를 가지고
갔습니다. 아름다운 丹靑을 입힌 <普化鐘樓>가 일본 하늘아래 여보란듯이
섰습니다.

올해는 진재 발발 80주년, 우리들은 다시 한번 모금하여 단청을 새로 입히고
주변을 정비하였으며, 8월31일(일) 정오에 추모제를 지냈습니다.
한국의 무형문화재 곧 국보인 梵唄(중요무형문화재제54호=영산재보존회),
새남굿(경기지방의 굿으로 동 104호), 서울대 이애주(동 27호 기능보유자)의
鎭魂춤, 그리고 소생의 졸작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의 제3막 중 일부분의
낭독공연---이 추모제의 내용이었습니다. 일본인의 만행에 대한 문화적
<되돌림>이었습니다.

이야기가 장황하여졌습니다. 추후에 당일의 사진, 한겨레신문과 연합뉴스의
기사를 참고로 올리겠습니다. 관심이 계신 분은 더 읽어주십시오.
合掌


글쓴이 : 김의경   ( ekkim36@hanmail.net )  작성일 : 2003-11-11
  • ?
    김 혁 2003.11.12 17:24
    김의경 동기님,

    보충설명을 하여주신 김의경 동기님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이 글을 "이전게시판"에 올려놓아서 하마트면
    못볼뻔 하였습니다. "좋은글추천글"에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이 곳에서 자주 뵙기를 바랍니다.

    김 혁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