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부터 찾아온 온 더위 탓인가 유난히 더위에 약한 나는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다.
그럭저럭 이대로 그만 둘랴고 하는건지 장마라고는 하지만 시원한 빗줄기가 몇 번이나
내렸던가. 와중에 아파트에 마을 시장이 열렸다. 매주 열리는 장이니 노상 그게 그것
별로 색다른 반찬거리가 눈에 띄지 않는다.
상인이 "내일 모래가 복날입니다. 토종닭을 사서 잡숫고 기운을 차려 보세요."
마침 애기 손가락 굵기가 될까 말까한 인삼까지 구색을 맞춰 놓아 팔고 있다.
만원에 세 마리 크기의 닭을 보니 두 마리만 사면 적당할것 같아 두 마리에 인삼
두 뿌리를 사기로 했다.
6.25 직후 우리나라에 양계가 성하지 않았을 때에는 닭장을 집 마당에 가는 각목
기둥을 세우고 가는 철사로 다이야몬드 형으로 꼬아 역어서 만든 닭장에 닭들을
키우기도 하고 그냥 마당에 노아 먹이기도 했다.
여름날 쌀에 벌레가 나면 어머니가 키질을 해서 이를 날려 버리면 닭들이 우루루 달려
와서 쌀 벌레는 물론 흩어지는 싸락을 줏어 먹느라고 서로 쪼고 하던 풍경도 눈에 선하다.
50년대 당시에는 누구랄것 없이 나라의 취약한 경제상태로 인하여 살기가 매우
어려웠다. 우리 집은 그렇게 닭을 키워 몇 개씩 낳는 달걀은 모두 모아 팔아서
아쉬운 집안 잡비로 쓰곤 하였다. 집에서 계란 후라이를 얻어 먹는다는 것은
아버지는 말고 어디가 아프기 전에는 어려운 일이었다.
오즉하면 그 귀한 사위가 온다는데 요즈음 같으면 겨우 씨암탉을 잡아 준다 하였을까.
일년에 한두번 가는 소풍에 계란을 삶아 가지고 간다는 건 아주 큰 이벤트다.
그후로 일본으로부터 레그혼이라는 희고 자그마하고 알을 잘 낳는 닭을 분양받아
차차 양계 기술이 발달 하여 오늘날 싼 계란과 약닭으로 영계를 먹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닭튀김이라던가 닭찜은 언감생심 엔간한 잔치 날이 아니면 먹을 념을 못 가졌다.
어느 핸가 바로 밑의 나의 남동생이 뒷산에서 갖 깬 산새, 아마도 비둘기를 잡아
온 적이 있었다. 이를 얼개미체 속에 넣어 가두고 파리를 잡아 주기도 하고 밥풀
등을 먹여 정성껏 키워서 어지간히 보송보송한 솜털이 벗어 졌다. 닭장 안에 있는
닭들이 알을 낳는 사과 상자 안에 넣어 살도록 하였더니 이 새들 때문에 달걀들이
굴러 떨어져 깨지는 걸 막을 셈으로 송판으로 못질을 하였다. 헌데 그 망치 소리에
놀라 모두 날라 도망을 간 뒤 그 새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도 망치 소리가
두렵고 싫었든 모양이다. 그 때가 한참 감성이 여린 시절이었던 듯 그 일이 한동안
우리의 마음속에 아픈 추억으로 남아 있다.
집에서 어머니가 알을 안 낳는 닭을 골라서 잡는 날이면 큰 양은 솥에 물을 가득히 붓고
한마리 닭을 펄펄 푹 삶아서 온 식구가 닭 국물 한 그릇에 고기 몇 점을 나눠 먹어도
그 맛이 왜 그리 좋았던지 지금은 어떤 음식을 먹어도 그런 맛을 느껴 보기는 드물다.
주로 마당에 심은 채소로 자급자족을 하여 고기 국을 먹기란 명절 때이거나 생일에나
구경을 하였다.그런 식사방법이 웰빙이었던지 우리형제는 키도 알맞게 크고 큰 병 없이
평생을 이렇게 살게 된 건강을 그때 얻어진 게 아닌가 싶다.
마을 장에서 사온 닭이 토종닭이었는지 가느다랗지만 값은 결코 싸지않은 인삼을 찹쌀과
함께 넣고 마늘 세통을 까고 대추도 넉넉히 한 웅큼 넣어서 푹 달였더니 뼈까지 익었다.
닭고기가 삼일 보신은 된다던가...
" 내가 하던 일중 참 잘한 일이네 " 하고 스스로 자위도 하고....
올 초복도 이 한 마리 닭으로 기력을 높여서 한 더위를 물리치고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사람들을 사랑하며 건강하게 잘 지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