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깊어지면 / 박고은
온통 추상에 젖은 산천
가을이 갈빛으로 깊어지면
바람은 또 얼마나 꿈꾸며 가는가
무수히 계절을 밟고 왔을 바람은
텅 비워서 가득한 풍요
올 맑은 생각들이 차서
사유의 눈을 뜨고
온 누리 함께 여물고 싶음이여
시떫은 젊음은 결이 삭고
비린 욕망은 단물이 들어
한 알 홍시로 무르익고 싶다
여기저기서 우수수 지는 것들
나이만큼 가슴 속에 지는 소리
떨어지는 낙과를 주워
그 의미를 만져 보고
천심 묻은 영원의 뜰을 두고 싶다
끝내 모든 것이 떠나고 잃는데도
카랑한 정신과 내 안에 사랑만은 남겨
연륜의 강기슭에 핀 억새를 흔들고 싶다
시집<그대를 만나면 좋아지는 이유>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