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의 존엄성은 지켜야... 그녀는 경북의 명문 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한 전형적인 얌전한 시골 여인이었다. 어찌 보면 시골 초등학교 선생이라도 지냈슴직 한 풍모를 보이기도 했다. 그 시절에는 고등학교만 나와도 초등학교 선생 노릇이 가능하던 시절이었다. 게다가 저 유명한 양반 안동 권씨 집안의 딸인 듯 했다. 첫 번째 연애에서 남자집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혀서 결혼에 이루지 못하였다. 당시 삼십대 중반인 그녀는 다섯 살은 됨직한 딸아이 하나를 데리고 오십 중반줄이 된 딸 둘에 아들 하나를 가진 남자 홀아비의 후처로 들어 왔다. 그 남자는 전형적으로 생활에 찌든 모습에 좀 마르고 신경질적으로 생긴 남자였다. 그 녀네는 칠십년대 그 당시 한창 유행이었던 고대 중국 황실의 애완견이었던 피기니스 견을 여러마리 키우면서 어린 강아지를 키워 그를 분양을 해서 생계를 유지하는지 아무튼 남자가 뚜렷한 직업이 없어 보였다. 그들은 단칸 셋방안에서 개를 키우며 살았다. 그 많은 식구들이 어떻게 잠을 자며 생활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고 얼마나 힘이 들고 고된 일인가를 짐작을 할 수도 없었다. 전처가 오래 동안 아프다가 죽었다고 한다. 이불 빨래를 하려고 홑이불을 뜯고 보면 이불 솜 싸개가 모두 더덕더덕 기웠다고 흉인지 넉두린지 모를 이야기를 흘리곤 했다. 그 시절만 해도 지금처럼 하이론 이불솜 이불이 없던 시절이라 이불 홋청을 뜯어 내어 손으로 빨아서 풀을 먹이고 손질을 해서 일일이 이불을 실로 꿰매야 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조용한 골목에 이따금씩 그 집안에서 큰소리를 내며 부부싸움이 벌어졌다. 주로 남자의 고함소리에 우당탕탕 양은 냄비,그릇등이 길바닥으로 내동댕이 쳐지고, 웬일인가 하고 내다보면 겁에 질려 울부짖는 어린 딸 아이, 그 녀는 두들겨 맞았는지 심하게 헝크러진 머리에 옷 매무새도 추스리지 못한 모습으로 허둥지둥 맨발로 행길에 쫓겨나와 있었다. 그런 와중에 그녀는 처절하게 웃으면서 한다는 소리가 “저 양반이 저런다니까요.^^ ” 골목이 너무나 소란한 소리에 똑 같은 순간에 놀라서 뛰어 나온 이웃집 친구와 나는 과연 이런 때 이런 존칭과 존댓말을 써야 하나 ? 하고 우린 서로 쳐다 보며 어이없어 실소를 금할수가 없었다. 저렇게 두들겨 맞고 집밖으로 쫓겨 나올 정도라면 이런 때에는 나와서 "에그!! 뭐 저런 사람이 다 있어" 라든가 하며 최소한도 화가 난 어조로 어떤식의 저항으로라도 억울함을 표현을 하며 대처를 해야 되는게 아닐까. 클 때에 양반집에서 고이 자란 그녀는 어쩌다가 연애를 잘 못하여 아비없는 자식을 낳고 자기의 평생이 저렇도록 나락에 빠지게 되었을까..... 사람의 평소 말씨 속에 그 사람의 됨됨이가 담겨 있다고 흔히들 말을 한다. 그렇지만 상황에 따라서 자기 방어의 조치는 취했어야 한다는 의구심이 일어난다. 칠십년 대만 해도 우리 사회는 아직 고루하여 지금과 달리 여성들이 많이 참으며 살아야 했고 여성의 지위도 아주 미미하던 시절이었다. 장미에 가시가 있듯이... 매시꺼운 음식에 후추가루나 고춧가루를 뿌려 먹듯이 그런 때에는 사람이 화를 내는 일도 적당히 해야 자기의 존엄성도 지켜지고 사람 대접도 받아 지는게 아닐까? 순한 개도 걷어 차이면 문다고 한다. 사나운 개를 돌아 본다는 말도 있다. 어느 날 어떤 T.V. 아침 프로그램에서 누구라면 알만한 어떤 여가수가 홀어머니 밑에서 크면서 온갖 고생을 겪으면서 자라 유명한 가수로 성공에 이루기까지의 그녀 자신의 인생역정을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았다. 이 일은 벌써 삼십여 년이 흐른 이야기다. 그래도 어쩐 일인지 잘 잊혀 지지를 않는다. 과연 그때 무방비의 그 여인은 그후 어찌 되었을까. 그 뒤 자기의 운명을 현명하게 대처 해 나갔을까. 그 어린 딸아이는 그 후 제대로 교육이나 받으며 자랐을까 하는 궁금증이 문득 되 살아 나는 것이었다. 07년 12월 27일 청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