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장터에서 생긴 일

by 이용분 posted Apr 14,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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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란장터에서 생긴 일                청초  이용분


    4월 9일 국회의원 선거 날이다. 심사숙고 선거를 마치고 나니 모처럼 한가롭다.
    마침 가볍게 차리고 나선 김에 모란장에 가 보기로 했다. 알지도 못하는 많은
    사람들과 장터에서 이리저리 몸이 부딪히는 게 버거워서 한참은 잘 가지를
    않았다. 이곳 모란 장날은 양력으로 나흩 날과 아흐렛날에 열린다.

    우리 집에서는 지하철 한 정거장만 가면 모란장 터이다.
    수 많은 사람들이 에스카레타를 타고 가는 틈에 우리도 끼어서 올라갔다.
    우리 처럼 선거 끝낸 뒤 심심해서 구경을 왔는지 내려오는 에스카레타에도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서로 마주보며 도열하듯 아주 천천히 내려오고 있다.

    지상으로 올라오니 어인 일인지 가는 길 양편에서 확성기를 틀어 놓고 노상
    시끄럽게 선교 활동을 하던 여러 무리의 사람들과 심심산속의 절도 아닌데 항상
    목탁을 두두리며 중생을 계도하던 종교인들이 안보이니 한결 조용하고 한가롭다.

    우선 꽃가게로 절로 발길이 옮겨진다. 여러 가지 봄꽃들이 제가끔 저 좀
    사가라는 듯 유혹을 한다. 하지만 내가 사려고 마음먹은 꽃잎이 큰 분홍색
    호접 란은 보이지 않는다. 집에 키우던 것은 지난겨울에 관리 소홀로
    안타깝게도 얼어 죽어 버렸다.

    흰색 호접 란은 팔고 있었지만 집에 제라늄 흰색 꽃이 계절을 잊은 듯 겨울동안
    그 후에도 계속 만발해 피어 있다. 게다가 몇 년 전 양재 꽃시장에서 사온 양란
    그레이스케리도 우아한 순백색으로 새로 피우고 있으니 같은 흰 꽃은 사절이다.

    이리저리 구경을 하며 돌아보니 여러 지방에서 온 많은 종류의 봄나물을 팔고
    있다. 봄나물이 웰빙 식품이라 알려진 탓인지 유난히 많은 사람들이 기웃거리며
    사려고 이곳에 모여 있다. 끼어들기가 힘들어 생각을 바꾸어 그냥 지나쳐 버렸다.

    식목절기라 나무파는 곳에서는 손가락 굵기의 어린 대추나무 묘목이 재법 팔려
    간다.우리도 이곳에 이사 오기 전 꽤 넓은 정원이 있는 집에서 삼십 여 년간 봄이면
    묘목도 사서 심고 나무를 이리저리 옮겨 심으면서 그 즐거움을 만끽한 적이 있다.

    윗둥을 싹둑 잘라 냈지만 뿌리는 있으니 심어 놓고 물만 잘 주면 그 곳에서 가지도
    벌고 잎도 나며 잘 클 것이다. 이 정도 대추나무라면 조이 몇년은 키워야 열매를
    맺게 되니 상당한 인내를 필요로 한다. 그래도 이런 봄날에 희망하던 나무를 사다
    심어놓고 키워 보는 여유는 또 다른 행복을 준다.

    그밖에도 가지, 호박 등의 묘목, 이제는 마땅히 심을 터가 한 뼘도 없건만 호기심에
    공연히 땅바닥에 주욱 펼쳐 놓은 배추 열무 씨앗들과 꽃 씨앗들이 눈길을 끈다.
    생선가게에서 필요한 생선 두세가지를 만원 오 천원 단위로 사니 벌써 짐은 무겁다.
    이 날은 재래식 장날이라 어수룩하고 쌀것 같지만 전국 장터를 돌아다니는 전문
    장돌뱅이들이 모이는 곳이라 잘못 사면 동네 보다 더 비싸게 사게 되는 수도 있다.

    그래도 장터 뒤쪽으로 찾아 가면 진짜 이곳 토박이 시골사람들이 농사를 지어
    금 새 뽑아다 파는 곳이 있다.  싱싱한 야채나 호박 무 김치거리등이 조금은 싸게
    사는 수도 있고 인심도 조금은 넉넉하다. 고구마를 몇 무더기로 나누어 놓고 파는
    어느 영감님이 있기에 그중 한 무더기를 골라서 샀다. 고구마도 소량이지만 돈도
    작아 적당하다.

    아무 말도 않 했는데 고구마 한 개를 덤으로 더 얹어 넣어 준다.
    역시 시골사람이라 인심이 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먹을 사람이 없으니
    요즘 같은 날씨에는 많이 사 놓으면 모르는 새 썩혀 버리기 십상이다.

    돌아오는 길에 가지를 수북하게 쌓아 놓은 게 보이기에 찾아 가 보았다.
    제철도 아닌데 어디서 그렇게 많은 가지를 키워 냈을까...
    그중 뚱뚱한 게 먼저 눈에 띄기에 만지니 속에 바람이 든 건지 어째 좀 물럼물렁 하다.
    “좀 큰 건 물렁물렁 하네” 혼자 소리로 말을 했는데 상인이 어느새 알아 듣고는
    “그렇게 꽉 누르지 마세요."
        (꽉 누르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사려면 만져야 하는데...)
    "뜨거운 손으로 자꾸 만지면 상해 버려요” (팔지는 않고 지킬 모양인가...)

    어째 말씨가 곱지 않다. 불시에 무안하여 그제 사 주인을 쳐다보았다.
    좀 험상궂게 생긴 중년이 지난 남자 장삿 꾼이 내 손만을 노려보고 있지 않은가...
    이 사람 가지는 산더미처럼 쌓아 놓았는데 날은 어지간히 저물어 가고 있는데도
    손님이 안 끼니 신경이 곤두 선 모양이다. (이 사람은 장사를 하면 안 되겠구나...)
    그러고 보니 바글거리는 시장 통에서 유난히 이 집에만 손님이 나 하나뿐이다.

    기분대로라면, 아니 다른 사람들만 더 있었더라면 그냥 던져 버리고 그 자리를
    뜨고 싶었다. 허나 인상이 험악한 그가 그냥 가면 더 못되게 굴 것 같아 슬슬
    화가 치미는 것을 억누르고 절대 싼값은 아닌데 몇 개를 사들고 돌아섰다.

    자기 가게에서 오이도 사주고 했건만 저리 심하게 굴어서야 다음에 또 찾아 가서
    팔아 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겠나...
    원래 그 자리는 내가 단골로 팔아주던 유쾌한 젊은이들이 장사를 하던 자리었는데...
    주인이 바뀐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집에 와서 이리저리 생각을 굴려 봐도 못내 기분이 찜찜하다.
    자기 것은 아주 귀하고 비싼 산삼 뿌리라도 된다고 생각한 모양인가...
    수퍼마켓에서 였다면 아무리 고르고 만져 보아도 전혀 문제가 안 되는 세상이다.

    그럭저럭 며칠이 지났다. 오늘 갑자기 사온 고구마 생각이 나서 그중 몇 개를
    찌려고 비닐 봉투에서 제일 큰 것을 하나 꺼내 드는 순간 쯧쯧쯧 ...
    아니 제일 큰 것의 한쪽이 쥐가 깊게 파먹은 것이잖아...
    살짝 안 보이게 뒤집어 놓았었구나...!
    이런 건 팔면 안되겠구만서도... 께름직 하여 다듬을 것도 없이 버려야 되겠다.

    그날 그 영감이 아무 말도 안했는데 어쩐지 한 개를 더 얹어 준 덤의 의미를
    이제야 깨닫고는 마음 한 켠이 씁쓰름해지는 건 나의 옹졸한 마음의 소치일까...                              

    ...                                      08년 4월 어느날에 청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