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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오랫동안 편찮으신 중에 생애에 마지막인가 싶은 여행을 떠나셨다. 어머니의 친정집, 일가친척들이 모두 모여사는 외갓집 동리로 다니러 가셨던 것이다. 충남 D시 가까운 시골 한우물.태어나서 시집 오기 전까지 뛰어 놀며 자란 어린시절 고향집이다. 외조부모님은 벌써 돌아 가셔서 계시지 않지만 친정 조카들이 살고 있었다.마지막으로 그곳 고향산천이 그리우셨던 모양이다. 그 곳에는 며칠 간 유하셨다. 그 친정 조카는 맨 처음 서울에 올라와서 대학공부를 할적에 우리 집에 한 동안 데리고 있던 적이 있었다. 그곳에 머무를 동안 아버지는 그 처 조카네 고장난 부엌 아궁이도 고쳐 주고 집안 이곳저곳 손질을 해 주면서 지나셨다 한다. 옛날 처갓집이란 생각에 그리하신 모양이다. 평생 공직에 몸 담았던 아버지는 평소 그런 일을 하시지는 않으셨다. 한편 그 당시 나의 남편은 그 근방 D시 지점근무를 하고 있었다.그때 나는 같은 지방인 그 곳 친척 집에 무슨 일이 있었던지 다니러 갔던 것 같다. 어머니 아버지와 나는 서울로 돌아 오는 길에 역에서 뜻밖의 해후를 해서 같은 기차를 타게 됐었다. 삽십여년이 지난 일이라 지금 생각하면 기억이 가물가물 하다. 그 곳이 모든 기차가 서는 큰역이 아닌 작은 역이라 그 당시 완행열차를 탔었던것 같다. 아버지는 자리가 비어 있는 데를 찾아서 건너 편 빈 자리에 앉으셨다. 어머니와 나는 같은 자리에 마주 보고 앉게 되었다. 기차가 떠났다.그 때 마침 기찻간을 돌아 다니며 간식을 파는 홍익판매원이 지나 갔다.그러자 어머니는 다른 자리에 앉아서 옆 사람과 담소를 하고 계신 아버지에게 “여보” 하고 힘 없는 목 소리로 부르셨다. 나는 어디가 더 편찮으신가? 왜 아버지를 부르실까? 하고 생각을 했었다. 아버지가 황급히 "왜 그래요? 어디 더 아파요?”하고 달려 오셨다. 그러자 어머니는 나를 가리키며 “얘, 사이다 하고 무어 맛있는것 좀 사 먹여요.” 하시는게 아닌가 ! 순간 나는 어안이 벙벙 하였다.그때 나는 사십을 넘어 아이들을 셋이나 낳아서 한참 키우고 있었다. 나 대로는 어른이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마음 속에서 나를 아직도 품안에 놀던 어린 딸로 여기셨던 것이리라. 내가 사드려야 될 나이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사주신 사이다를 마시면서 마음속으로 의아해 하며 얼마나 가슴이 뭉쿨 했었던지. 그런게 부모님의 마음이란 것을 한참 후 깨닫게 되었다. 그게 어머니와의 마지막 여행이 되었다. 어머니가 떠나신 후 아버지는 몇년을 더 사셨다. 어머니가 두살 연상이셨던 두분은 유난히 부부간의 금술이 좋으셨다. 어머니가 가신 뒤 홀로 남아 어쩔줄 몰라 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당시 젊었던 나는 아버지의 그 외로움을 미쳐 깨닫지 못 했었다. 이제 우리가 바로 그 나이에 이루렀다. 이제 다시 맞이하는 어버이 날 ! 이제는 이 세상에 안계신 나의 부모님 !! 해가 갈수록 부모님의 그 따뜻하고 크신 사랑에 마음속으로 눈물겨워 짐을 어찌 할 수가 없다. 08년 5월 어버이 날에. 청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