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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03 00:16

비 오는 날

조회 수 1367 추천 수 57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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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 오는 날

    당장 더위가 한 여름으로 치닫을 듯이 서둘던 날씨였다.오늘은 서늘한 바람이
    불면서 하늘에는 검은 구름이 둠성둠성 몇점 떠 다닌다. 어째 비를 머금은
    구름인가... 집을 나서서 한 참을 걸었는데 드디어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진다.

    며칠 전 내린 비로 우리 집 뒷곁을 흐르는 실개천 냇물이 전보다 조금은 맑고
    깨끗하게 흐른다. 그러잖아도 봄가뭄이 계속 되는듯 하여 걱정하던 차 비 좀
    올테면 더 오라지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걸었다.

    지하철을 타고 두어 정거장 갔는데 거짓 말 처럼 비는 그치고 햇빛이 쨍쨍하다.
    잠시 우산 걱정을 잊고 볼일을 보았다.오다가다 사람들 손에 우산이 들려 있다.
    지하철을 타고 다시 돌아 오는 길, 지하철역 에레베이타를 타고 지상으로 올라
    오니 기다렸다는 듯이 비가 다시 쏟아 진다. 두어 정거장 사이에 사정이 아주
    판이하다. 어찌 할까? 조금씩 뿌리는 비는 상관 없었지만 쏟아 지는 비에 정말
    난감 해 졌다.

    엘레베이타에 함께 탔던 사람들은 잠깐 사이 각각 제 우산을 쓰고 흩어져 갔다.
    나는 기다렸다가 비가 좀 멎은 다음에 가야지 마음을 먹고 서서 있었다. 그때
    그중 가장 늦게 내린 한 아주머니가 작은 파라솔을 든채 나에게 눈짓을 보낸다.

    “어느 쪽으로 가세요?”
    X병원이 있는 방향을 가르키며
    “네. 저쪽으로 가는데요.”
    “저도 그 쪽으로 가는데...병원에 가세요.”
    “아뇨.00은행 있는 쪽으로 가는데요. 그 병원에도 자주 가지요. 나이를 먹으니
    공연히 여기저기 아픈데가 많아서요”
    "그래요, 저도 하두 아픈데가 많아서 종합병원이라고 해요.ㅎㅎㅎ"
    다정한 친구처럼 그녀는 팔짱까지 끼면서 좁은 우산속에서 함께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걸었다.정말 고맙고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다. 질화로에 담겨 있는 잿속에
    죽은 듯이 묻혀 있던 작은 불씨 처럼 아직도 이렇게 따뜻한 인정이 살아 있다니...

    요즈음에는 드문 경험이다.비를 좀 맞더라도 그냥 걷지 감히 아무도 남의 우산
    속에 들어가 얻어 쓸 념을 안낸다.누군가 비를 맞고 가는 사람이 있어도 우산
    한쪽을 씌워 줄 인심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마치 이런 작은 인심까지도 우리
    모두가 지긋지긋 가난하던 지난 시절의 구질구질한 잔재라고 생각해서 인지
    모르겠다.서로 신세를 지려고 안하고 베풀려 들지도 않는다.

    지하철을 타서도 바로 앞에 무거운 짐을 들고 있는 사람이 서 있어도 앉은 사람이
    그 짐을 절대 들어 주지 않고 모르는척 한다. 앉은 사람이 미안해서 선 사람에게
    쏟던 작은 인정이다.어느날 부터인가 모두가 어리둥절할 정도로 잘 살게 되었다.
    그런데 인심은 꺼꾸로 야박 해지고 개인주의로 흐르게 되는 것은 어떤 이치일까.

    옛날 같으면 여름날 이렇게 비가 부슬부슬 오는 날이면 애호박에 풋고추를 잘게
    채 썰어 넣고 부추전을 자주 지졌다. 갖 지져서 따끈한 것이 식을 세라 담 너머로
    이웃 집을 불러서 먼저 건네주며 인정을 나누었다. 길에서 무거운 짐을 들고 오는
    이웃을 만나면 얼른 쫓아가서 그 짐을 받아다 대문 앞까지 날라다 주기도 했다.

    실제 예전에 나는 이웃집 친구와는 저녁 찬거리를 사러 매일 동네시장을 함께 다녔다.
    그저 싱겁한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장을 보는일은 매일매일 참으로 즐거운 일이었다.
    늦게 결혼을 하여 아이들이 어리고 아이 수도 하나 적었던 그 친구는 상대적으로
    아이 수도 하나 더 많고 커서 먹새가 세었던 내 짐을 매번 들어 주곤 하였었다.
    집안 일을 하다가 팔목에 신경통이 걸린 나를 안타까워 하면서 그리 해 주었다.

    이제 펀리하고 현대적인 아파트에 살면서 구질구질한 이웃도 별로 없다. 모두
    자가용차를 타고 다니면서 아주 멋있고 신나게들 산다. 꺼져 버린 연탄 불씨를
    좀 빌리자면서 이웃집 문을 두드릴 일도 없다. 외출로 집이 비니 담 넘어로 잠깐
    집을 좀 넘겨다 보아 주기를 서로 부탁 할일도 없는 아주 편리한 세상이다.

    지금 사는 곳은 몇년을 살았어도 이웃들이 무엇을 하고 사는 사람인지 잘 모른다.
    또한 이웃 집에 무슨 일이 있는지 도통 알수 없다. 아파트 엘레베이타 안에서나마
    요행히 눈을 마주보며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일 조차도 가뭄에 콩 나듯이 아주
    드문 일이 되었다.

    그래도 조금은 부족하고 아쉬운 것이 있어서 이웃끼리 서로 비비대며 살았던 그
    옛날이 그리워지는 것은 내가 구식에다 이제 나이가 들어 버린 탓인가.

                                           08년 6눨2일 청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