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모처럼 날씨가 맑아서 동네 가까이에 있는 채마밭으로 구경을 갔었다. 숲으로 들러 쌓인 곳이라 공기도 아주 맑고 깨끗하다. 작은 규모로 야채를 심는 것은 무료한 아파트 생활에서 자연과 접할 기회도 되고 약간의 취미생활도 되어서 즐거울 듯도 하다. 봄만 되면 그 들은 작게 나누어진 손바닥만한 터에 매년 무엇인가를 심는다. 그 전에는 꽃만을 좋아하던 나도 요새는 먹 거리를 심어 놓은 게 더 보기좋다. 소독도 하지 않고 진짜 유기농인 무 배추를 심어서 가을이면 김장을 하는 것 같다. 가깝게 자주 보기 힘든 하얀 참깨 꽃이 귀물(貴物)스럽다.호박 들깨 고구마 토란 콩 동부 콩 오이 가지 생강 옥수수 방울토마토 등 우리가 평소 즐겨 먹는 먹 거리들이 심겨 있다. 모처럼 비가 개인 날이라 연하고 어린 호박잎이 유난히 반짝거린다. 이를 따다 쪄서 매운 풋고추 숭숭 썰어 넣고 끓인 깡 된장에 밥을 싸 먹으면 혀속에 느끼는 알싸한 그맛이 한 여름 날의 풍미를 느끼게 한다. 문득 예전에 평생을 다니던 공직에서 퇴직한 후 서울 근교 집 가까이에 장만해 두었던 몇 마지기 논과 몇 백 평의 밭에 밭작물을 키우면서 말년을 보내신 아버지 생각이 났다. 그 시절에는 비닐하우스의 개념은 아예 없던 시절이었다. 집에서 먹기 위해 농사를 짓기에는 밭이 너무 컸다. 아마 큰 규모로 심어서 소일 삼아 용돈도 쓰려고 하신 것 같다. 그냥 노지에 열무나 파를 심어서 일정한 크기에 이르면 뽑아서 시장 상인에게 넘기곤 하셨다. 공교롭게도 주변 농민들과 똑 같은 작물 출하 시기가 겹치면 한꺼번에 가격이 폭락을 하여서 인건비니 하여 들어간 제비용을 건질 수가 없었던것 같다. 그렇다고 조금 늦게 뽑으면 열무가 모두 쇠어 버려서 못쓰게 되곤 하였다. 게다가 요즈음처럼 비가 시도 때도 없이 쏟아지는 날에는 연한 열무가 모두 녹아 버려서 못 쓰게 되기 십상이었다. 결국에는 하는 수 없이 이런 야채류를 심는 걸 포기하고 딸기를 심었었는데 얼마나 재미를 보셨는지는 알 수 없다. 그 시절은 그런 과일류 보다는 우선 배부르게 먹고 사는 게 급선무였던 시절이었다. 다만 우리 아이들을 데리고 딸기 밭에 가서 싱싱한 딸기를 싫 컷 따 먹였던 일이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한편 논농사도 지셨는데 봄이면 모 내기하느라 턱 없이 분주하고 여름내 벼 심은 논 김매기, 피 뽑기 등 하루라도 몸 편할 날이 없으셨던 걸로 기억 된다. 게다가 가을이면 이제 겨우 설 영근 벼를 핥아 먹는 참새떼들을 쫓는 일도 보통 일은 아닌듯 싶었다. 물론 일일이 일꾼을 사서 하였지만 그도 쉬운 게 아니었다. 이따끔 나의 큰 아들아이가 할아버지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논으로 갔던 일을 기억해 내고는 다정하셨던 외할아버지에 대한 생각을 떠 올리곤 한다. 가을에 벼는 익어서 이를 베야 되는데 요즘처럼 이렇게 비가 연일 내리면 잘 영근 벼가 서 있는 채로 싹이 돋아나서 못 쓰게 된다고 한다. 너무 늦게 베어도 벼 낟알이 모두 떨어져서 쏟아진다고도 한다. 지금은 벼를 베는 동시에 탈곡을 하여 자루에 담는다. 그 시절에는 말리기 위해 벤 볏단을 논바닥에 주욱 널어놓았는데 요즘처럼 또 비라도 추적추적 오는 날에는 역시 벼가 새싹이 돋아나 이를 도정을 하면 반 토막 싸래기 쌀이 되기 십상이라 노상 걱정 끊일 날이 없으셨다. 더구나 날씨가 갑자기 추워져서 어름이 라도 어는 날에는 벼가 논바닥에 모두 얼어붙어 버려서 정말 헛농사가 되는 것이다. 일전 T.V.에서 들으니 어떤 탈렌트가 인삼을 온갖 정성을 들여 6년이나 키워서 이제 수확을 해야 할 시기에 때 마추어 비가 연일 오면 그 인삼이 모두 녹아서 못 쓰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농사짓는 일도 결코 쉬운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옛 시조에 “풍파에 놀란 사공 배 팔아 말을 사니 구절양장이 물 도곤 어려 외라 이후엘 랑 배도 말도 말고 밭 갈기나 하리라“ 라는 시조 구절이 생각난다. 나도 이 나이에 이르러 보니 이제 세상 사 쉬운 것이 하나도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제 추석도 한 달여 조금 밖에 남지 않았다. 나의 친정아버지는 아들을 꿈찍히 사랑하여 어려운 일들은 혼자 해결하려고 무던히 애쓰시는 듯 하였다.그리고 좀 소심한 어른이셨던 것 같다. 노년에 큰 아들과 함께 살면서도 차차 몸이 쇠하여 지니 소일삼아 짓던 서투른 농사일로 항상 노심초사를 하셨다.이 모든 일들을 출가하여 멀리 떨어져 살던 큰 딸인 나에게 괴로운 일만 생기면은 전화를 해서 하소연을 하셨다. 오늘 따라 때 이르게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소록소록 하루 왼종일 내린다. 문득 아버지 생각이 떠올라 다시금 코끝이 찡하고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금할 수 가 없다. 이제는 이 괴로운 세상 일 모두 잊고 지하에서 편안한 날들을 보내고 계시리라. 08년 8월 2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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