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고 있는곳

by 김현세 posted Mar 27,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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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분 선배님께,
답글로 쓰려다 짧게 쓰는 재주가 없어서 그냥 쓰기로 했습니다.
제가 사는곳과 날씨를 물어 보셨는데,  Northern Virginia
Great Falls 란 곳입니다. 정말 큰 폭포가 있는 아름다운 곳입니다.
서울 날씨보다 약간은 더 따뜻하고 덜 춥습니다. 지금 꽃들이 한창 봄 잔치를
하고 있지요. 한편으론 날씨도 변덕스러워서 여름 옷을 입었다가 겨울 코트로
갈아 입을 정도입니다.  미국의 수도 Washington D.C.와  Maryland 주를
운전해서 30분 안에 갈수 있는거리 입니다.

저의 13회 동기가 Maryland주에 5명 (남자1명), 제가 사는 Virginia 주에
3명 (남자1명), West Virginia 주에 1명(우리집에서 1시간 거리),
이렇게 있어서 자주 연락하며 사는데, 남자분 한명은 만난적도
없고 동창 싸이트를 통해 살고 있는곳을 알았을 정도고요.
저의 집에서 가까운 거리에 사는 남자 동창도 좀저럼 만나게 되지 않네요.
만나면 편하고 즐거운 친구들입니다.

저의 모르쇠의 고등학교 동기는 12명이나 되며 2개월에 한번씩
세번째주 토요일엔 정기적으로 만나서 부인끼리도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되었어요. 젊었을때는 몇몇 부인들이 너무 도도하고,
남을 깍아내리고, 자신들의 자랑 아니면 별로 하는 말이 없었는데,
이제 오랜 세월 만나면서 착한 남편들의 노력으로
모두 편안한 사이가 되었어요. 아주 어려서 부터 가까웠던
친구 분들은 정기 모임 이외도 살짝 자주 만납니다.

저희가 미국으로 오기전에 모르쇠가 3년간 근무했던 오끼나와
회사의 본사가 저의 집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 이곳에
정착 하게 되었답니다.
제가 미국에 오는것을 우겨서 왔으니, 저도 무엇이라도 해서
모르쇠에게 도움이 되는 생활을 하고 싶었습니다.

미국에선 이발소나 미장원 가는것이 비싸서 친지분의
머리를 부인이 깍는 다기에, 한국을 떠나기전 잠간동안
깍는법을 배워 왔는데, 이곳와서 천직이 될줄 몰랐답니다.

어느날 시장에 갔다가 Beauty Academy 란 간판을
보고 무작정 들어 갔는데, 말이 안나옵니다. 도움을 주겠다는
분에게 글로 썼습니다. 한국에서 조금 다녔고 더 배워서 면허를
받고 싶다 했더니, 당장 입학을 하라며 증명서가 없는데도
많은 Credit 을 주겠다고 써주더라고요.

그때 그날 부터 저는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학교를 시작해서
아침이면 theory 를 공부하고. 오후엔 처음3일 간 실습을 마네킹으로
연습을 시키더니 4일째 되는 날부터는 오전 수업만 하고
점심후 고객의 머리를 실제로 하도록 지시했습니다.
학교에서
머리를 하는 고객들은 학생이 어떠한 실수를 해도 불평이나 법적인
고소를 않겠다는 서류에 싸인을 합니다. 우선 머리하는 값이 싸니까
많은 고객이 왔고. 아사아 계통의 사람들이 재주가 좋다고 소문 나서
단골 고객도 많아 져서 학교로서도 수입이 늘어나서 좋아했구요.

벙어리인 저를 위해 선생님들은 갖은 수고를 다 해주었지요.
학생은 고객으로 부터 팁을 받을수는 있어서 학비도 제가 얻는
팁으로 충당이 되었구요.
어느날 남자 고객이 서투룬 일본말로 미국에 온지 얼마나 되냐고
물었는데, 그때까지 일본말을 곳잘 했기에 3주 않됬다고 답을
했는데……. 와 하고 함성을 지르는 동료 학생들과 선생님들의
기뻐하던 모습은 잊을수가 없네요.

제가 말을 할수있는 기적이 생겼다고 파티까지 열어 주었었어요.
그때부터 저는 어린아이 처럼 말문이 텄답니다.
토요일엔 노는날이지만 일을 하면 시간을 두배로 주기에 전 아주
열심히 일했죠.
그당시엔 한국 사람들은 찾아 볼수가 없었고요.
모르쇠의 절친한 고등학교 친구와 오끼나와에서 먼저 오셔서
같이 근무하게된 모르쇠의 고등학교 7년 선배님의 배려로 초기에
외로운 이민 생활은 저의 부부에게 큰 위안이 되었습니다.

면허를 딸때쯤 여러 미장원에서 scout 를 하러 오는데 꽤 오래전에
미국에 왔다는 한국분이 찾아왔어요. 자기 미장원엘 데려가서 보여주며
여러가지 좋은 조건으로 같이 일하자고 했습니다.
면허를 받고 일을 시작했는데…. 퇴근 시간이면 “ 야 너 미장원 청소하고 가거라”
이것만이 아니고 자잘구레한 개인 심부름 까지 매일 시키더라고요.
이 미장원엔 많은 한국 여자분들이 모이는데 모두 국제 결혼을 한분들로
말투로보아 아주 질이 좋지않은 여자분들도 많았어요.

어느날 다녔던 미용학교 친구 Brenda 를 만나서 얘기끝에 청소까지 해야
된다 했더니, 펄펄 뛰면서 당장 그만 두라하고, 자기가 다니는 미장원에서
함께 일하도록 알선 해 주어서 미국 사람들만 있는 곳에서 일 하게
되었습니다. 분위기도 아주 좋고 사람다운 대접을 받게 되었죠.
모르쇠에게  2주일 동안 다녔던 미장원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 해 주었더니
너무 속상해 하더라고요.

오끼나와에 살때 얼마 않되는 한국분들끼리 서로 모함을 하고 싸움들을
하다가, 한분이 세 어린딸을 남겨 놓고 목메어 자살을 한 사건이 있었기에
모르쇠는 처음부터 많은 한국 여자들이 모이는것도 못마땅하고, 직장에서 영어를
배워야 하는데 한국말만 해서야 쓰겠냐며 좋지 않다고 했는데…..
하지만 좋은 경험을 했습니다.

제성격상 다른 사람 밑에서 일 하기 보단 독립하고 싶어서
섭섭하지만 좋은 친구가된 Brenda 와 헤여져 다른 직장으로 왔어요.

제가 일하게된 Reston 이란 신 도시엔 고급 공무원 들이 많았고,
특히 외교관 들이 많았어요. 미장원이 두개 밖에 없었고,
미용사를 구할수 없어서 늘 고객들이 예약없이는 들어 올수도
없었고 주인인 John 은 저보고 전화를 받으라고 떠밉니다.
틀리게 말한다고 물어 뜯을 사람 없다고요.

John 은 차분하지 못했고, 바람끼가 있어서 들어오는 돈을 진탕만탕
써버려서 2주마다  직원들에게 주어야  되는 돈이 없을때도 있었답니다.

열심히 일을 배웠고, 좋은 기회가 찾아와서(?) 제 꿈을 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에서의 사업 경험이 없다고 않된다네요.
포기 상태 였었는데,
그당시 많은 남자 분들의 머리 스타일이 조금 길게 하는 편이라 남자
단골 고객이 많았는데, 그중 이 타운에서 많은 책임을 하고 있는분의
보증으로 아주 아담하고 멋진 제 미장원을 갖게 되었어요.
단돈 $150. 갖고 고향을 떠나와서 조금씩 저금했던 돈과 모자란 금액은
같은 시기에 미국에 온 뉴욕에 살고있는 저의 친한 13회 친구가
도움을 주었어요.

얼마쯤 있다가 John 이 미장원을 닫을 지경이 되었다 해서
함께 일하던 친구 Mary와 Tom이 찾아와서 저보고 미장원을 사랍니다.
작은 사업체지만 경험이 있다고 쉽게 얻었고,  또다시 더 하나
미장원을 3개씩이나 할수 있었던 행운을 얻기 까지 많은 분들의
도움이 컸습니다. 이분들의 은혜는 평생을 두고도 다 갚을길이
없을것 같군요.
나중에 미장원에서 일어난 많은 얘기 보따리들을 조금씩 써볼께요.
전 제주가 없어서 사진도 겨우 올리고, 음악도 퍼 오는 글도 못해서
제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밖엔 쓸 재료가 없습니다.
너무 길어져서 다음에 또 쓰겠습니다.

내일 토요일에 사위 먹쇠와(Scott) 딸(Cindy) 부부가 마라톤 경주에
나간다고 손주들을 봐 달래서 곳 떠나야 됩니다.
우리 사위가 먹쇠 별명을 얻은 것은 제가 해주는건 다 너무 잘먹어사
한국 이름을 지어 준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