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매화)
약간 쌀쌀한 기운이 돌기는 하지만 햇살이 유난히 밝은 청명한 봄날이다. 맨 꼭대기 위층에서 이사를 가는지 정말 기다란 이사 짐을 나르는 리프트가 부지 런히 우리 집 앞발코니 유리창 앞을 스치며 오르내린다. 중간 층인 우리 집에서 목을 길게 빼고 올려다 보니 23층 집이 이사를 가는 모양이다. 그 집이라면 다리 를 약간 기웃둥 거리며 한쪽 팔을 휘저으면서 다니던 선해 보이는 남자 노인 내외가 사는 댁인것 같다. 그는 힘이 드는지 오가는 길가 밴취에서 자주 쉬곤 하였다. 아파트 당첨과 동시에 이사와서 오랜 동안 같은 아파트에 살았으니 눈에 익어서 길에서 오며 가며 수인사를 해 오던 터다. 가끔은 에레베이터에서도 인사를 나누고...그래도 눈여겨 보지 않았으면 내가 몇층에 사는 지는 기억을 못 할 것이다. 나도 그들이 23층에 산다는 걸 쫓아 가서 확인하지는 않았었으니까. 우리가 이곳에 이사 온지 십 오년, 그 네들도 그쯤 살았을 것이다.우리처럼 당첨이 돼 초기에 온 소위 원주민이었다. 그간 많은 세대가 바뀌어 이사를 오갔지만 아직도 원주민이 제법 많이 산다. 그들과는 그냥 인사만 나누었을 뿐 누구라고 상세한 인사를 나눈 적은 없던 처지다. 그런데 마음이 섭섭하다. 유리창 아래로 내려다보니 아무도 그들이 이사 간다고 내다 보는 사람이 없는 것 같다. 나는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고 에레베이타를 타고 23층으로 올라 갔다. 벌써 이사를 올 사람들이 집수리를 할 모양인지 일꾼이 함께 탔다. 이미 어지간히 짐은 실려 나갔고 그 노인도 부인도 모두 없다. 아들인 듯한 젊은 사람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 하니 아래층 이삿짐차 옆에 계실지 모르겠으니 내려가 보란다. 어찌 할까 잠시 머뭇거리다가 에레베이타를 타고 있으면 제절로 내려가니 무어 어려울 게 있겠나 싶어 내려 갔는데도 만나 지를 못했다. 대머리가 약간 벗어진 그들의 큰 아들이라는 사람과 섭섭하다는 인사를 나누고 그냥 들어오는 마음이 씁쓰름하다. 몇층에 사는 사람인데 내가 섭섭해 한다는 인사 말을 전해 달라고 한 말도 나를 상세히 소개한 적이 없으니 그들이 알리는 없을 것이다. 그냥 그렇게 보통 때 처럼 인사만 나누었으면 했었는 데... 그 때가 한 40년전 60년대 말이었던 것 같다.우리가 문화촌에서 화곡동으로 이사 올 때에는 이웃 사람이 자잘한 이삿짐을 주섬주섬 이삿짐 추럭이 있는 곳 까지 날라다 주었다. 게다가 아직은 어렸던 우리 아이들 손에 크고 파란 인도 사과를 들려주며 섭섭해 하던 동네사람 생각이 갑자기 떠오른다. 기억 하건 대 그전 이사 풍속으로는 불을 먼저 가져가야 부자가 된다고 불 피운 연탄통을 가지고 갔다. 재래식 화장실이었던 집에서 수세식 화장실이 있는 새 집으로 이사를 가면서 이제는 쓸모가 없어진 요강을 버리지 못하고 양은 솥 속에 넣어 가지고 가기도 했다. 먹고 배설 하는일이 아주 소중한 일이기에 옛 어른들이 그리 정했던것 같다. 멀쩡한 문종이를 뜯어 놓기도 하고... 물론 어른 들께서 솔선 그리 하셨다. 이건 어디서 온 풍습일까... 지금 생각하면 어이가 없는 행동이다. 그 바쁜 와중에 팥을 삶아 가지고 가서 팥죽을 쑤거나 팥 시루떡을 한 시루 쪄 가지고 가서 새로운 이웃 집에 돌려 서먹한 이웃의 우호심을 우선 돋우려던 흐뭇한 풍속도 없어 진지 오래다. 이사간 날 첫날 밤은 머리를 아랫 목 쪽으로 두고 자라고 하셨다. 요즈음은 방의 모든 방향이 아랫목이니 머리를 어느 방향으로 머리를 두고 자야 될까 고민하지 말고 그냥 편하게 자면 될일이다. 15년이라면 짧다면 짧고 길다 면 긴 세월이다. 서로 같은 아파트에 살면서도 누가 이사를 가던 오던 이제는 관심이 없다. 정말 삭막한 세상 인심이 되었다. 예전에 마당이 있는 단독주택에 살적에는 이사 가는 날이면 열어 놓은 대문으로 하다 못해 낯 익은 이웃 집 강아지라도 들어와서 관심을 가지고 마당 구석구석 쿵쿵 거리며 냄새를 맡으며 한 바퀴 돌다 나갔으련만 그도 멀리멀리 사라져 가 버린 풍경이 되어 버렸다. 09년 3월 28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