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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07 09:05

자식훈련

조회 수 675 추천 수 81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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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느리와 쌍동이 큰 아들, 2006년 여름, 미육군대위 시절


아침 일찍 뉴욕에 사는 큰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제 막 백일된 아기(나의 손자)의 버릇을 단단히 고쳐주었다고 약간 흥분된 음성으로 어제 저녁에 일어난 일을 보고하며 칭찬을 구하는 눈치였다. 사건의 내용인즉 아기가 울 때마다 아들 내외가 번갈아 가며 안아 주었더니 나중에는 안고 있어야 잠도 자고 놀기도 하지 저혼자 눕혀 놓으면 쉬지않고 울어서, 부부가 상의한 끝에 어제 밤에는 아기가 우는 것을 시침 뚝 따고 그냥 내버려 두었더니 10분 가까이나 고집스럽게 울다가 결국에는 지쳐서 잠이 들었는데 10시간 동안이나 늘어지게 자서 아들 내외와 손자까지 세 식구가 아주 평안한 밤을 지냈다는 얘기이다.

"네 처가 아기 우는 것을 어떻게 견디었느냐?" 물었더니, 아기가 울기 시작하고 한 5분정도 되었을 때 "아무래도 저렇게 아기가 울다가 무언가 잘못될 수 있으니, 오늘은 여기서 그만 포기합시다" 하고 며느리의 마음이 약해졌다 한다. 아들이 "내가 알아서 훈련 잘 시킬테니, 내게 맡겨두라" 주장을 하는 바람에 나머지 5분 동안에는 며느리와 아기 모자(母子)가 함께 울었다고 한다. 아기를 10분동안이나 울리며 훈련을 시켰다는 말이 내 맘에 안 들었다. 못된 것... 우리 큰 아들이 따뜻할 땐 솜사탕 같다가도 한번 작정하면 무지막지하게 밀어부치는 것이 남편을 빼다 박았다.

육군보병학교 유격대 본부중대장(Army Ranger Captain)을 하는 동안 범같이 튼튼한 동료 교관들과 사흘간 사생결단하는 강훈련을 받았는데 70여명중에서 12등을 하여 Discovery TV Program에 나올만큼 무서운 아들이 초등학교 4-5학년 때의 일이 생각난다. 쌍동이로 자라면서 어찌나 장난이 심하고 기운이 거셌는지 저희 누나아이를 기를 때보다 열배는 더 힘이 들었다. 여름방학이 시작될 때였는데, 같은 나이의 아이들과 외박을 하겠다고 내게 넌지시 전해왔다. 가서 잘 집이 누구의 집이냐 물었더니, 어디 사는 아무개라고 하는데 가슴이 철렁했다. 그 집은 아이와 어른이 모두 요주의(要注意) 인물들이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그 날은 부모가 멀리 휴가여행을 떠나고, 열 댓살된 누나아이 책임하에 10살짜리 안팎의 사내아이들 여럿이 모여 같이 놀고 잔다하니 마음이 불안했다. 남편에게 그 사정을 말하고 의견을 물었더니 한 마디로 딱 잘라서 "안된다" 한다. 아이들에게 "그 집은 엄마 아빠도 잘 아는데, 나도 그렇지만 너희 아빠가 안된다고 하시더라" 했더니 아이들이 발끈하며 부당하다고 항의를 한다. 마침 대학이 방학을 해서 집에 와 있던 제 누나가 "가정재판소(Family Court)"에서 해결하자고 건의를 하여, 쌍동이들은 원고(原告, Plaintiff)가 되고, 나와 남편은 피고(被告, Defendant), 그리고 딸아이는 재판장인 판사(判事, Judge)가 되었다.

큰 아들이 원고대표로 의견을 진술하는데 나는 그 영민(英敏)함에 속으로 혀를 둘렀다. "부모님이 다른 집을 무시하는 점은 고사하고라도, 그 집의 환경이 마음에 안든다고 우리들의 인격까지 무시하여, 우리들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주장이다. 그 애 말을 들으면서 내 마음이 쌍동이를 두호하고 싶어졌다. 얼핏 보니 판사인 딸 아이도 동생들 쪽으로 기우는 눈치이다. 아들의 변론이 끝나고 남편의 진술이 있었는데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 했으니 위험한 곳에는 아예 근처에도 가지 않도록 절제하는 훈련을 하라"는 내용으로 대충 말한 것 같다. 피차에 할 얘기를 마쳤으니 이제 곧 투표에 들어갈 순간이었다.

큰 아들이 판사인 제 누나에게 질문을 한다 "찬반동수(贊反同數)가 되면 어떡합니까?" 이렇게도 저렇게도 편을 들기 곤란한 입장에 처한 딸이 잠시 생각에 잠겨있을 때에 남편이 폭탄선언을 한다 "어떤 표는 무겁고 어떤 표는 가볍기 때문에 찬반결정에 문제는 없다." 그 말을 들은 아이들은 발끈하며 "애시당초 부정선거를 계획하였으면 재판소는 무엇하러 열었느냐"고 불평이다. 나도 남편이 틀렸다고 생각했다. 그 때 남편이 다시 말을 한다. "잘 들 듣거라. 이 일은 엄마 아빠보다 너희들에게 더욱 중요한 일이니, 우리 표는 하나씩, 너희 표는 하나반씩 계산한다. 잘 알겠느냐?" 남편의 말에 나머지 네 식구가 큰 충격을 받았다.

"우리가 서로 할 얘기를 다 했으니, 이제 얼른 투표하자." 이렇게 남편은 투표를 주장하는데 승리를 눈앞에 둔 쌍동이들은 오히려 주춤거린다. 드디어 큰 아들이 제안을 한다 "타임 아웃하고 우리 둘이 상의하고 싶습니다." 남편과 딸이 청을 받아들인다 "그렇게 하렴." 얼마 후에 법정으로 다시 돌아온 원고팀을 대표해서 큰 아들이 조용히 그러나 또 하나의 폭탄선언을 한다 "저희가 투표권을 포기하겠습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딸이 남편에게 묻는다 "원고측이 투표권을 포기했습니다. 피고측은 어떻습니까?" 남편의 대답은 한결같이 "못 간다"였다. 저렇게 착한 아이들을 실망시키다니! 남편에게 항의하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그 후 이십년 가까이 흘러 그 때 판사였던 딸이나 원고측 대표였던 큰 아들은 변호사가 되었고, 작은 아들은 심장전문의가 되었는데, 우리 쌍동이를 초대했던 그 가정은 자취도 없이 망가져버렸다. 결과만 놓고 볼 때에는 남편이 자식훈련을 잘 시킨 것 같다. 오늘 아침에 남편에게 큰 아들이 손자 훈련 시킨 얘기를 했더니 "으음, 무지막지해. 이제 백일된 아이를... 쯧쯧" 한다. 옛날 그 가정재판소 얘기를 하며 "지금도 그렇게 딱 잘라 '못간다' 말하시려오?" 물으니 "아마 지금은 '나도 투표권을 포기할테니, 가서 재미있게 놀다 와라' 그럴 것 같소." 이십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아들은 옛날의 남편처럼, 남편은 옛날의 아들처럼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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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혁 2009.04.09 18:32

    자랑스러운 아드님을 두셨습니다.

    미국에서 행복한 생활을 하시는
    김호중 후배님 내외분께 찬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잔잔한 생활담을 써주시는
    우리 가족께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우리 홈에서 자주 뵙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