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도 방앗간' 집 여인

by 이용분 posted Apr 17,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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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낭화)
      '팔도 방앗간' 집 여인                           청 초                                

      그 방앗간은 시장으로 통하는 뒷골목에 있었다. 엉성한 한글체로 쓴
      '팔도 방앗간'이라는 간판은 사람들 눈에 확 띄게 빨간 글씨로 쓰여 있었다.

      방앗간 외벽에는 항상 방앗간에서 떡을 찔때 쓰려고 온갖 허드레 나뭇단들이 벽에
      기대어 쌓여 있었다. 방앗간 가까이 가면 언제나 기계 돌아가는 소리로 시끄러웠다.
      원래 그 동리에 처음 우리가 이사 갔을 때에는 그 집에는 머리는 반백으로 세었지만
      조금은 꾸부정한 허리에 뒷짐 지고 뒷배를 보아주던 빼빼한 영감님이 있었다.
      그는 짧은 상고머리 꼭지에 가마가 있어서 그런지 항상 고르지 못하게 뒤엉킨 머리
      결을 하고 있었다.

      그 방앗간집 여인은 다리를 저는 것은 아니지만 엉치 뼈가 아픈지 약간 기웃둥
      거리며 노상 힘겹게 방앗간 일을 하는 것이었다.
      여인이 훨씬 아래로 나이 차이가 좀 있어 보이는 부부였다. 그녀는 파마끼란 도통
      없는 긴 머리를 그냥 수탉의 긴 꼬리 모양 뻗힌 머리를 뭉뚱그려 뒷머리에 항상
      굵은 핀으로 딱 붙여 놓은 엉성한 머리형을 하고 있었다.

      얼굴은 좀 수척해서 광대뼈가 솟은 얼굴에 어찌 보면 우리가 T.V에서 흔히 보는
      월남 여인처럼 보였다. 언제 빠졌는지 앞에 이 하나가 빠져서 웃을 때 보면 조금은
      생경한 인상으로 보이기 쉬웠다.
      몇년을 두고 봐도 그러해서 그게 그녀의 인상이구나 하고 결국 받아 들이게 되었다.

      그녀의 성품은 좀 화통해서 고추 빻는 방아기계 철판 안에 붙은 단 한줌의 고추가루
      라도 다 떨어져라 하고 고추를 밀어 넣을 때 쓰는 굵은 막대기로 통을 '탕탕' 쳐서
      고추를 빠러 온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주곤 하였다.

      그런 연유로 동네 인심을 얻었는지 다른 곳에 젊은이가 하는 더 깨끗한 방앗간이
      있었지만 유난히 이 집만이 노상 떡을 해가는 사람들이 북적 거렸다.
      그 시절만 해도 설 때에는 흰 가래떡을 해 가는 사람들이 문전성시를 이루곤 했었다.

      정원이 넓은 우리 집에서는 해마다 나무가지를 전지하거나 잘라 낸 나무들을
      한동안 마당 한 구석에 쌓아 말려 두었다가 그녀에게 필요하면 가저 가라고 말
      하곤 하였다.
      그러면 니야까로 실어다가 쓰고는 경우 바르게
      “떡 할 일이 있으면 갖고 오셔유. 내가 두어 번 해 드릴께...^^ ”
      우리는 무어 그리 떡을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먹고 싶으면 시장 떡 가게에서
      두어 쪽 사다 먹으면 된다. 그러면 가을에 김장고추를 빻을 때 고추 빻는 삯을
      안받고라도 그걸 그런 식으로라도 반드시 갚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해 부터인가 나무를 못 가져 가겠다고 한다. 선 울타리 같던 영감님이
      었지만 돌아간 후 힘이 빠진 모양인지. 그녀가 허리가  아파서 더는 못 가져 간다고  
      했다.그 집에는 장성해서 삼십이 가까워 가는 좀 어눌하고 모자라게 보이는 아들이
      한명있었다. 멀쩡히 놀면서도 어머니가 바쁜 데 동네 일꾼을 사서 일을 해도 멀뚱
      멀뚱 돕지를 않는다. 젊은 나이에 그냥 놀기도 힘 들것이련만...

      무어 크게 기술이 필요한 일도 아닌 것 같은데 배워서 그대로 가업으로 이어 받으면
      참하게 될 일 처럼 보이는 데도 그게 안 되는 모양이었다.
      어느 날  내가 하도 답답 해 보여
      " 그, 다 큰아들 언제 일을 하느냐" 며 그 아들을 시키라고 해도
      “어이구 그 애 아무것도 못해요,”하고 고개를 내 젓는다.
      어쩌다 그 아들이 고추를 빻는 걸 보았다. 연방 눈물 콧물 뒤범벅이 되어 빻는
      고추를 들여다 보며 재체기를 해 재끼니 영 깨끄름 해서 그 고추가루 못 먹게
      생겼었다.

      그 후로 '목마른 사람이 샘을 판다'든가...  마당에 쌓인 나뭇단을 치우기 위해서
      하는 수 없이 우리가 잘 말린 나무를 실어다 주곤 하였다.

      참으로 사람 사는 평생이라는 게 별게 아니라는 작은 진리를 깨닫게 했다.
      영감님이 살아 있을 적에는 비록 적극적으로 도와주지는 않았지만 든든한 울타리
      노릇을 해 주었었다.
      그가 죽으니 그나마도 힘이 빠져 돈 안 들고 공짜로 생기는 나무도 못 가져가는
      것이다. 게다가 바보 아들은 전혀 도움도 되지 못한다. 그녀가 힘든 일을 평생
      면하기는 어렵게 보였다.

      분당으로 이사를 온지 족히 삽여년이 흘렀다. 지금은 나의 큰아들이 살고 있는
      나의 옛집 정원에는 베어 놓은 나무가지들이 마른 채 쌓여 동네 고양이들의
      쉼터가 되었다.
      그 후 그 녀는 어찌 되었을까. 아직도 그냥 방앗간을 하고 있을까. 오래 된 수첩
      속에 그려 놓은 아련한 삽화처럼 어느 날 그녀가 갑자기 그냥 궁금 해 졌다.

      지금 아파트 단지에도 방앗간은 있다. 이제 시절과 풍속이 바뀌어 명절 때라도
      썰어 놓은 떡국 떡을 그냥 편하게 사서 끓여 먹는다. 피자니 케잌이니 해서 간식
      거리도 흔해져 버린 요즈음 떡을 해 먹는 사람도 아주 드물다. 어느 누구도 이제
      번거러운 일을 하려하지 않는다.

      담 벼락에 마른 나무가지를 엉성하게 쌓아 놓았던 풍경.
      그 땔감으로 잔뜩 연기 매운내를 피우며 왁자지껄 김 서린 가래떡을 뽑던 광경,
      그런 중에도 경우가 아주 밝고 인간의 순수성을 지녔던 그 방앗간 집 여인...
      70년대 모두가 조금은 살기 어려웠던 그 시절의 풍경이 가끔은 그리워지곤 한다.

                                                         09년 4월 1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