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나고 싶었습니다-
남산 『문학의 집·서울』정기행사인 「수요문학광장」의 인물, 2008년 3월 19일에는 자연과의 교감을 노래하는 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나태주 시인 편이었다. 나태주 시인은 기자와 같은 세대로서,「시집가는 딸에게」라는 시로 동병상련(同病相憐)의 깊은 감동을 주었기 때문에, 가까이서 꼭 만나보고 싶었던 작가였다.
세월이 빨리 간다 그런 말 있었지요
강물같이 흘러간다 이런 말도 있었구요
우리 딸 어느새 자라 시집간다 그러네요
어려서 자랑자랑 품안에 안겨들고
봄바람 산들바람 신록 같던 그 아이
이제는 제 배필 찾아 묵은 둥지 떠난대요
신랑도 좋은 청년 같은 학교선배 사이
그동안 만나보니 맑은 마음 바른 행동
멀리서 보기만 해도 미더웁고 든든해라
얘들아 하루하루 작은 일이 소중하다
사랑은 마음속에 숨겨놓은 난초화분
서로가 살펴주어야 예쁜 꽃이 핀단다
부모가 무엇을 더 바랄 것이 있겠느냐
다만 그저 두 사람 복되게 잘 살기를
손 모아 빌고 싶구나 양보하며 잘 살거라
― 「시집가는 딸에게」전문 (2004. 5)
큰 병을 앓고 있다는 소문과는 달리, 건강한 모습으로 참석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사회자의 인사가 있었다. 때마침 『강남사회복지관』에서 문학을 공부하는 실버 십여 명도 자리를 함께 하여, 젊은 사람 못지않게 진지한 모습으로 시인을 주시하고 있었다.
나태주 시인은 지난 해에 충남 장기초등학교 교장을 정년퇴직한 충남시인협회 회장으로, 흙의 문학상, 충남문화상, 현대불교문학상, 박용래문학상, 시와 시학상, 편운문학상, 황조근정훈장 등을 수상하고, 《나태주 시 전집》을 비롯해 27권의 시집을 출간했다고 한다.
나태주 시인의 문학 강좌가 시작되었다.
시인은 지난해 3월 1일 췌장염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았는데, 1년 만에 죽을 수도 있다는 의사의 말에, 굉장히 겁이 나서 살고 싶더라고 했다. 2007년 8월31일의 정년퇴직을 꼭 한 학기 앞두고 그런 일이 생겼는데, 시인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정년퇴직은 꼭 마치고 싶었다고 한다. “이제 병원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휴가 나온 것입니다.”
무엇이 나태주를 끊임없이 시인이게 하는가.
고등학교 시절인 16세 때, 사범학교에서 “시”라는 바이러스에 걸린 후, 《현대문학》지 에서 신석정의 시를 읽고 시인이 되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1971년, 서울신문사 신춘문예에 응모, 박목월 선생의 눈에 띄어 문단에 입문하였다. 그러나 교직과 시 작업을 병행한다는 일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어서, 3000페이지나 되는 《나태주 전집》을 출간할 때는, 열두 번이나 교정을 보느라 번번이 밤을 지새우기 일쑤였는데, 그 때 쭈그리고 앉아 무리하여 작업한 것이 훗날 췌장염을 불러 온 것 같다.
마음을 시로 표현하는 것에 대하여 어려서부터 많이 고심했다. 시인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부질없는 일이다. 시에 매력이 있는 것 같아서 시에 빠지면, 평생 바이러스에 걸린 것처럼 헤어 나오지 못한다. 시 3000편 내지 4000편을 썼다. 하루 이삼십 편도 썼다. 시란 무척 까다롭고 어려운 것, 시는 능동태, 시인은 수동태, 시인은 항상 귀 기울여 듣고 겸손해야 한다.
시, 무엇을 쓸까.
“그리움”이다. 시란 그리운 것을 향해 가는 마음인 것이다. 그리움은 지금(시간), 여기(공간), 나(인식주체)에게 없는 그 무엇이다. 시를 많이 쓴 사람은 그만큼 갚琉?咫굼?많은 사람이다. 시란 호기심, 그리움, 사랑, 헌신의 마음이라 생각한다. 그 열정이 나로 하여금 한 주일에 한두 번씩 폭음을 하게 한 것인지도 모른다. 젊은 시절부터 이어져온 폭주로, 명치끝이 자주 아팠었는데, 그것이 췌장염의 시초가 아니었을까.
돌이켜 보면 외로움, 고독, 시련, 가난, 질병이 평생 나를 괴롭혔고, 그것들이 나에게 무언가를 주었고, 무언가를 요구했고, 시인이 되게 했다. 그러나 세월은 흘러 병약한 몸이 되어 버린 지금, 유통기한이 만료된 폐선처럼, 나에겐 젊은 시절의 격정은 어느덧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시인은 태어나서부터 외할머니 손에서 자라다가, 어머니가 무남독녀인 까닭으로 외할머니의 보살핌 속에 성장하였다. 그런 이유로 시인의 사유 밑바탕에는 늘 외할머니가 있었다. 외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그대로 토해 내듯, 다음과 같이 시를 낭송하였다.
시방도 기다리고 계실 것이다,
외할머니는
손자들이
오나오나 해서
흰옷 입고 흰 버선 신고
조마조마
고목나무 아래
오두막집에서
손자들이 오면 주려고
물렁감도 따다 놓으시고
상수리묵도 쑤어 두시고
오나오나 혹시나 해서
고갯마루에 올라
들길을 보며
조마조마 혼자서
기다리고 계실 것이다,
시방도 언덕에 서서만 계실 것이다,
흰옷 입은 외할머니는.
― 「외할머니」전문(1970.7)
청년시절에는 연애를 하고 실연의 상습범이 되었다고 했다. “나는 아직도 예쁜 여자를 세 번만 만나면 무릎을 꿇고 싶다.”라는 시인은 천생 로맨티시스트인가 보다. “이제 실연은 안 하고 싶습니다. 많이 해보아서요.” 그렇게 실연의 아픔을 승화시킨 시가, 197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 박목월 시인이 문단에 명찰을 달아준 것이다.
1.
바람은 구름을 몰고
구름은 생각을 몰고
다시 생각은 대숲을 몰고
대숲 아래 내 마음은 낙엽을 몬다.
2.
밤새도록 댓잎에 별빛 어리듯
그슬린 등피에는 네 얼굴이 어리고
밤 깊어 대숲에는 후득이다 가는 밤소나기 소리.
그리고도 간간이 사운대다 가는 밤바람 소리.
3.
어제는 보고 싶다 편지 쓰고
어젯밤 꿈엔 너를 만나 쓰러져 울었다.
자고 나니 눈두덩엔 메마른 눈물 자죽.
문을 여니 산골엔 실비단 안개.
4.
모두가 내 것만은 아닌 가을.
해 지는 서녘구름만이 내 차지다.
또한 동구 밖에서부터 피어오르는
밤안개만이 내 차지다.
하기는 모두가 내 것만은 아닌 것도 아닌
이 가을.
저녁밥 일찍이 먹고
우물가에 산보 나온
달님만이 내 차지다.
물에 빠져 머리칼 헹구는 달님만이 내 차지다.
― 「대숲 아래서」전문, 197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평생을 교직에 있으면서 직장에서의 인간관계를 중시하고, 성실한 노력으로 최선을 다한 결과로, 남보다 일찍 교장을 했다 한다. 상복도 많아, 많은 수상 기록을 갖고 있단다.
살아오면서 교직과 시, 두 가지를 놓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했다. 인생은 직렬이 아니라 병렬인 것이다. 농부가 씨를 뿌리고 농사를 짓듯, 선생이란 직업을 놓지 않으려고 애쓰는 한편, 시인의 자리도 힘들게 붙들고 늘어졌다.
비단강이 비단강임은
많은 강을 돌아보고 나서야
비로소 알겠습디다
그대가 내게 소중한 사람임은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알겠습디다
백 년을 가는
사람 목숨이 어디 있으며
오십 년을 가는
사람 사랑이 어디 있으랴……
오늘도 나는
강가를 지나며
되뇌어 봅니다.
― 「비단강」전문 (1984.11.2)
“오십 년을 가는 사랑이 어디 있어요? 사십대, 오십대를 넘기고 교장이 되고 이제 조금 사람들이 기억해 줍니다.”
“1999년 9월 1일, 교장이 되어 공주거리에서 술을 마시고 머플러를 휘날리며 비틀거리며 살아도 되겠다 싶었어요.”
나태주 시인은 조그맣고 병약했다. 아내는 더욱 병약하여 시인이 아플 새가 없었다고 한다. 그런 아내가 시인이 병원에 입원해 있는 6개월 동안, 병원 간이침대에서 쪼그리고 자며 병간호를 하느라 우울증까지 걸렸다고 한다.
지난해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김남조 선생께서 3월 18일에 휠체어를 타고 문병을 오셨는데, 병상에서 시를 지어 그분에게 드렸다. 문병을 마치고 김 남조 선생이 돌아가시면서 “문병을 왔다가 이렇게 기분 좋은 적이 없다.”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이 병을 이기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그날, 김남조 선생에게 드린 시 문학사상사에 들어가 그것이 빌미가 되어, 7월에 『꽃이 되어 새가 되어』라는 시집으로 나오고, 시인은 8월에서야 퇴원하게 되었다. 이렇듯 “시”는 병이 되기도 하고, 약이 되기도 하며, 시인의 한 평생을 이끌어 온 것이다.
처음 시집의 제목을 『꽃을 던지다』라고 했는데 출판사 측에서 다시 책 제목으로 합당한 시를 한편 더 써 달라 해서 쓴 시가 시집 제목이 된 시 「꽃이 되어 새가 되어」라고 한다. 이 시는 주사기를 달고 병원 뜨락으로 나와 ‘시여, 나를 찾아 주시라.' 라고 기원하면서 썼다고 한다.
지고 가기 힘겨운 슬픔 있거든
꽃들에게 맡기고
부리기도 버거운 아픔 있거든
새들에게 맡긴다
날마다 하루해는 사람들을 비껴서
강물 되어 저만큼 멀어지지만
들판 가득 꽃들은 피어서 붉고
하늘가로 스치는 새들도 본다.
― 「꽃이 되어 새가 되어」전문 (2007. 6. 28)
시는 허망한 것이다. 흰 구름과 같은 것이고 무지개 같은 것이다. 한 사람의 시인으로 사는 것은 뜬구름을 잡고 사는 것과 같다.
‘너희들은 모를 꺼야, 이 기쁨 모를 꺼야’ 라고 죽음 바로 앞까지 갔다 와서 노래를 불렀는데, 아내는 그때 시인의 얼굴 모습이 너무나 무서웠노라고 했다. 아직도 완치되지 않은 췌장염과 당뇨로 약을 복용 중이라는 시인의 얼굴에, 투병으로 인한 피곤함이 엷게 드리워져 있었다.
산버찌 나무 아래서 두 눈이 마주쳤다네
산버찌 나무아래서 두 손을 잡았었다네
지금은 어른 된 나무 키 작은 아기 산버찌
산버찌 나무 아래서 울면서 헤어졌다네
― 「산버찌 나무 아래」전문(1982.4.12), 김춘원 작곡
“어른 된 나무 키 작은 아기 산버찌” 부분은 인생의 정점이고, “산버찌 나무 아래서 울면서 헤어졌다네”는 인생의 결말을 노래한 것이라 한다.
“1971년의 시나 지금의 시나 변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절망하는 것이지요. 한 시인의 한계요, 특성인 것 같습니다.”라면서, 악보까지 있는 시「산버찌 나무 아래」를 시인이 선창한 다음 청중 모두가 합창하는 것으로 대미를 장식했다.
[글 쓴 이: 실버넷뉴스 민문자 기자 mjmin7@silvernews.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