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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18 06:24

어느 여름 날의 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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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여름 날의 삽화                        청초

    엊그제 까지만 해도 뒷곁 개천 변 숲속에서 매미 소리가 요란 했었다. 오늘 보니 어느 새  초가을인 걸 알아차린 귀뚜라미들이 새벽 녘까지 무대를 독차지하고 울기 시작 했다.
    그러나 아직은 마지막 무더위가 맹위를 떨치고 있다. 넓은 집안에서도 열기가 확확 느껴진다.

    남편이 근처 백화점 수퍼에서 수박을 사왔다.
    매번 아들이 다니러 오면서 사온 것을 먹었다. 아파트 입구에 있는 구멍 가게만한 작은 수퍼에서 사오니 모르기는 해도 아주 비쌀 것이다. 가격을 물으면 아들은 언제나

    “얼마 안 해요”

    무엇이던지 그 애가 사온 건 값을 말을 안 한다. 하지만 사과의 경우 그냥 다른 곳에서 사는 때 보다 배는 비싸다는 걸 알게 됐다. 그 가게는 아파트의 특수 소비성향에 맞추어 비싸지만 고급 물건만 취급하는 전략을 구사하는 집인 것 같았다.그러니 다른 것도 마찬 가지일 것이다.

    지난번에는 수박이 떨어 질만하니 나의 딸인 남이가 다니러 오면서 또 큰 걸 사왔다. 우리는 두 식구가 살지만 그 애는 집으로 돌아가면 한참 먹성이 좋은 아이가 둘이나 있어서 반개를 갈라서 되 들려 보냈다. 워낙 큰것 이라 우리는 반개인데도 한 열흘간은 먹은 것 같았다.

    남편이 내가 외출하고 없는 날 근처 킴스클럽에서 진짜 달덩이만 한 엄청 큰 수박을 사온 것이다. 여러 가지 과일이 있던 터라 그 수박은 냉장고에 그냥 넣어 둔 채 며칠이 지났다. 하도 크니 나는 무거워서 꺼내 볼 염도 못 내고 매일 그 돼지 언제 잡을까 궁리를 하며 지내 왔다.수박이 돼지처럼 커서 어찌 감당할지 엄두가 안 나는 것이다. 그렇게 말을 하니 할 때 마다 재미있다.

    마침 큰 아들 찬진이의 생일이자 광복절인 오늘 잡기로 했다.
    가격이 8900원을 주었다니 싼 게 비지떡이 아닐까. 하는 염려가 우선 앞선다. 애들은 사올 때 농사 진 농부의 인증서가 붙은 걸 사오니 틀림없이 달게 되어 있다. 언제부터인가 수박이나 과일 상자에 생산자 이름을 붙이고 가격도 책임을 지겠다는 이름값인지 배는 비싸게 받는 풍조가 생겨났다.

    전에 우리 아이들을 키울 때에는 인증서라는 개념은 생각지도 못했던 시절이었다. 허긴 '무등산 수박'이라는 엄청 비싼 게 있긴 했었다. 수박을 사러 가면 우선 같은 값이면 눈에 띄는 큰걸 고르고 본다. 수박 장사한테 한번 봐 달라하거나 골라 달라고 하기도 했다. 그도 별수 없이 두드려 귀에 대 보기도 하고 두 손으로 꽉 늘러 보기도 한 다음 자신 있다는 듯이 끝이 뾰죽한 작은 칼로 한 귀퉁이를 손가락 두 마디 크기만큼 삼각형으로 잘라서 빨가면 됐다 하고 사가지고 온다. 조금 덜 익었어도 거절 못하고 그냥 들고 오면서도 마음은 늘 찜찜했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에는 수박을 두레박처럼 우물 속에 노끈으로 묶어서 띄어 놓기도 했다고 하는데 수박을 찬물 위에 띄워서 이리저리 굴려 차거워지면 모두 저녁을 먹은 후에 아이들과 다 함께 한자리에 모여서 즐거운 시간을 갖게 된다. 둘러 앉은 아이들은 수박이 잘 익었으면 하는 기대와 얼른 먹고 싶은 생각으로 침이 꼴깍 넘어 간다.

    드디어 힘이 제일 센 아빠가 부엌칼로 뻐개고 보면 희한하게도 장사가 잘랐던 부분만 빨갛게 잘 익고 나머지는 덜 익어 분홍색일 때가 많았다.장사꾼은 묘하게도 요술쟁이처럼 수박이 잘 익은 부분만 잘라 보인다. 햇볕이 잘 쬔 부분은 잘 익었기 때문이다.그곳만을 골라서 조금 잘라 보이기 때문에 살적에는 잘 익은 것처럼 보인 것이다.그 이치를 한참 나중에서야 알게 됐다.
    사먹은 참외나 수박에서 나온 씨를 호기심에 어쩌다 마당 한 귀퉁이에 거름을 넣고 심어 본적이 있다. 어줍잖은 열매가 열릴 뿐 끝내 먹을 수 있을 만큼의 좋은 열매로 영글지는 않았다. 호박은 쉬웠다.농부가 이렇게 훌륭한 수박으로 키워 내기는 얼마만한 정성이 들어가는지 모를 일이라는 걸 알게했다.

    이제 농사짓는 기술도 과학 영농이니 D.N.A.검사를 해 가면서 품종 개량을 해서 몰라보게 농법이 발전을 했다. 이제 그런 실패작은 안나오는 모양인지 아니면 비싼 것을 사와서 그런지 최근 들어 선 수박을 먹어 본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너무 큰 수박을 싸게 사왔기에 잘라 보기가 좀 겁이 나서 차일피일 미루어 온 점도 있긴 하다.

    판매 직원이 귀를 대고 두드려 보면서 "틀림없다 "고. 장담을 하면서 골라서 주었다고는 한다.
    나는 다른 일을 하면서 그 수박 돼지를 잡는 일을 모르는 척 피했다. 마음이 여린 나는 잘 안 익었으면 어쩌나 싶어서였다. 드디어 그가 싱크대 도마 위에 올려놓고 잘 드는 부엌칼로 가르면서 “어이구 힘들어” 하는 게 아닌가. 나도 모르게 부리나케 달려가서 한옆에서 함께 힘을 쓰며 도왔다. 마치 흥부네 박 타듯이 ...

    그 수박은 겉가죽이 좀 두껍고 한 쪽이 너무 빨갛다. 아무래도 농익어서 좀 무를 것만 같아 보인다. 우선 큰 바가지만한 반쪽은 랩을 씌워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 나머지를 먹기 좋게 썰면서도 에그, 다 물렀으면 어쩌나 했다.

    공연한 기우였다. 맛을 보니 아삭아삭하고 끝에 가서는 입안에 은은한 향기까지 풍기는 게 아닌가. 아마도 햇볕을 잘 쬐는 노지(露地)에서 재배(栽培)한 수박 인 것 같았다. 요즈음처럼 무더운 여름 날 나는 냉장고에 돼지만큼이나 큰 수박을 넣어놓고 한 동안 행복한 날들을 보낼 것이다.

    사람의 행복이 별것인가. 행복하면 행복한거지...^^                     
                                                 09년 8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