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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호지 문에 빨갛고 샛노란 단풍잎을 붙여 넣어서.               청초

    푸르던 앞산의 숲이 물감으로 다시 덧칠을 한 듯 황갈색으로 한껏 늦가을의 정취를
    자아내고 있다. 어느 듯 불어오는 쌀쌀한 소슬바람에 노란 은행잎과 빨간 단풍잎이
    보도 위에 나 뒹굴고 커다란 후박 나뭇잎은 바람의 성화에 못 이겨서 그만 커다란
    몸집이 질질 끌려가고 있다.

    어느 듯 시월도 훌쩍 지나서  계절은 만추 십일월에 들어 섰다.
    밤낮의 일교차가 심하니 앞 발코니의 커다란 유리창이 아침저녁으로 마치 우유를
    뿌린 듯한 뿌연 안개처럼 성에로 뒤 덮였다.

    어렸을 때 저녁이나 아침나절 유리창에 낀 안개 성에에 손가락으로 기차를 그린
    다음 바퀴와 칙칙 폭폭 연기도 그려 넣고, 기다랗게 레일도 그려서 마음은 알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로 달려가 보기도 하였다.

    그 다음 유리창에는 동그라미를 작고 크게 두개를 겹쳐서 그린 다음 가운데는
    두점 돼지 코를 그리고 다음으로 큰 동그라미에 두점 벌려 찍어 두 눈을 그리고
    조그만 귀와 나사모양으로 도루루 말려 꼬부라진 꼬리를 엉덩이에 덧 붙여
    그리면 간단한 아기돼지가 되었다.

    토끼도 잘 그렸다. 커다랗고 쫑긋하고 긴 두귀, 타원형으로 기다랗고 좀 큰 몸통
    그 몸통 끝에 몽실한 작은 꼬리는 동그스럼하게 점점이 찍어서 부드럽게 그리고
    먹이인 풀도 ㅆㅆ 이렇게 그려 넣고...
    마음 한 구석 저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가 매년 이맘때면 생각이 나는 추억이다.

    겨울 방학 때 나는 종종 시골 외가댁에를 다니러 가곤 했었다. 누군가가 집에 찾아
    오면 촘촘한 한지종이 문살사이에 붙여놓은 명함 크기만한 조그마한 유리 조각에
    한쪽 눈을 바짝 대고 누가 오나 내다보던 정경도 생각이 난다. 문을 열고 내다보는
    순간 사나운 황소바람이 마구 들어 올 터이니까. 그 시절 시골에서는 유리가 아주
    귀한 물건이었던 것 같다.

    정원이 있는 단독 주택에서 아이들을 키우며 살던 한참 젊던 시절...
    가을이면 완자무늬 나무 문살에 붙은 헌 문종이를 물을 뿌려서 깨끗이 뜯어내고
    남은 풀 찌꺼기도 잘 씼어 낸다. 밀가루 풀을 묽게 쑤워 준비한다. 가장자리가
    매끄럽지 못한 흰 한지를 반듯하게 잘라서 손질을 할 때도 있고 아니면 그냥 생긴
    대로 문종이를 바른다. 이일은 혼자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말이 이래서 나온게 아닌가 싶다.

    그 위에 진분홍색 코스모스 꽃잎이나 노란국화 꽃잎과 꽃송이를 따다 붙여 넣고
    덧바른다.냉수를 한입 가득 물고 골고루 확 뿌린다. 양지 바른 곳에 비스듬하게
    널어 놓으면 짱짱하게 잘 말라 손가락으로 튕겨보면 탱탱 북소리가 나도록 기분
    좋게 잘 마른다. 추운때 이 문을 여닫으면서 뭉긋한 겨울을 맞고는 했었는데...

    이 문종이가 숨을 쉬어서 숩도도 조절하고 적당히 맑은 공기도 들랑거리게 해서
    한겨울에 숨을 쉬고 지나기가 훨씬 부드러웠다.

    그 당시에는 스산한 겨울이 닥쳐오는데 세 아이들을 키우면서 여러가지 마음을 써야
    되는 바쁜 일들이 많은 시절이었다. 일년만 지나도 빛이 바래고 거므스레 때가
    탄데다가 여기저기 찢어져서 구멍까지 숭숭 난 이 종이문을 보노라면 가을 김장준비
    못지않게 마음이 쫓기고 어수선하다. 이와 같은 일이 예사로울 때도 있었지만
    성가시러울 때도 종종 있었다.

    아이들이 차차 커지면서 집이 좁아져서 크게 증축 수리를하게 되었다. 그 참에 성가신
    안쪽 종이 문을 모두 반투명 유리창 틀로 모두 바꾸어 버렸다. 이제 가을이 되어도
    한결 편안해 지긴 했지만 생각밖으로 목소리가 유리창에 부딛혀서 찌렁찌렁 울리는
    듯 하다. 습도도 조절이 안 되는 것 같고 그윽하던 분위기도 그만 사그러진 듯 했다.

    그 후로 이사를 해서 이제는 획일화된 세멘트 구조물 아파트 속에 갇혀 살게 됐다.
    때때로 이런 옛날 물건으로 장식을 한 전통 찻집이나 음식점에서 장식품으로 걸려
    있는 문틀이 유난히 눈에 띌때가 종종 있다. 그때 귀찮다고 모두 버릴 일이 아니라
    한두 개라도 잘 보관 해 두었다가 쓸것을...

    삭막하기 조차한 나의 서재에 그 옛날 정취도 살리고 집안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서라도 가을이면 새 하얀 닥문종이에 밀가루 풀 냄새, 향긋한 황국과 샛노란
    은행잎. 빨간 단풍잎을 넣어 바른 이 완자무늬 한지문으로 한 귀퉁이를 꾸몄더라면
    얼마나 운치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하게 된다.

                                                  09년 11월 1일







  • ?
    김 혁 2009.11.01 07:54

    이용분 동기께,

    올해도 저물어 가는 11월의 첫 날에
    좋은 글과 직접 찍은 꽃 사진 그리고
    조용한 음악을 보여주시어 고맙습니다.

    눈 수술을 받은 다음에 바쁘게 글을
    쓰시는 데 무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늘 건강하시고 다복하시기를 빕니다.
    감사합니다.
  • ?
    이용분 2009.11.01 16:03
    김혁 동기님.

    염려 해 주신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염려 해서 주시는 말씀 유의하겠습니다.^^

    아까운 가을 날들이
    흐르는 강물 처럼 흘러가고 있습니다.

    행복하신 날들이 되도록
    동기님께서도 부디 건강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