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어느 동료 경험자가 이런 귀띔을 해주었다.
“옛날에 친했던 친구라고 당신을 꼭 반갑게 맞아줄 것이라고 기대하지도 말고 반대로 전에 그리 가깝게 지내지 않았던 친구라고 해서 소홀하게 대해줄 거라고 지레 짐작하지도 말라”고.
사실 나는 이번에 여행하는 중에 대학 동기생들 30여명의 옛 친구들을 만났는데 역시 들었던 바대로 그들 각자가 나에게 베풀어준 정의 표시는 각양각색이어서 때로는 나를 놀라게도 하였고 또 때로는 당황하게도 하였다.
즉 평소에 덤덤하게 알고 지냈던 대학 친구나 고등학교 동창생이 그들의 가족을 모두 동원해 가면서 나의 관광안내를 도맡아 준다거나 그의 부인이 생면부지의 내 아내에게 여행 선물을 사서 들려준다거나 또는 자기의 할일까지도 뒤로 제쳐놓고 나를 도와주려고 동분서주 애를 쓴다거나 하여 나를 놀라게 해준 경우도 있었고,
그 반대로 내가 이 친구를 찾아보지 않고 그냥 돌아가면 그가 두고두고 나를 원망할 것이다 싶어서 일부러 스케줄을 잡아 찾아간 그 옛날의 절친했던 친구가 뜻밖에도 방문객을 거추장스럽게 여기는 빛이 완연하도록 섭섭하게 대해 주어 나를 당황하게 만든 경우도 있었다.
물론 대부분의 친구들은 나에게 지난날의 우의에 상응하는 대접을 해주어서 내 쪽에서 별로 큰 부담감을 갖지 않을 수 있었지만, 위에 말한바와 같은 몇몇의 친구들은 과분한 호의나 감격에 의하여 아니면 정반대로 커다란 실망이나 격분을 통하여 나의 심금을 울려주거나 또는 오래도록 잊을 수 없는 노여움으로 남아 있게 하였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실망했던 쪽의 예에서는 그 섭섭했던 마음을 이루다 여기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여서 어느 때는 크게 분노감마저도 느꼈었으니 이때의 감정이 쉽게 잊어버려지기를 기대하기에는 그 심상의 도가 지나쳤었던 것이다.
예 컨데 시내에 나가는 길의 친구에게 내일 치 메이저리그 야구장 입장권을 한 장 사다달라고 부탁했더니 입석조차 매진이어서 못 샀노라고 했는데 그 다음날 우연히 다른 친구와 그곳을 지나치다가 표를 팔고 있는 것을 보고 들어가 보니 좌석은 반 남짓밖에 차있지 않았던 일이며,
관광유람선을 타보고 싶어 도선장으로 안내해 달라고 하자 7~8년을 그 시에서 살아온 그가 그 위치를 모른다는 등의 핑계로 자꾸 기피하다가 내 고집에 못 이겨 함께 물어서(?) 찾아간 곳이 그 시의 한복판 번화가의 일우였고, 거기서 나만을 댕그러니 떨궈 놓고 아내의 가사를 거들어 주어야 한다는 이유로 돌아가 버린 일... 등이니,
이러한 일들을 어찌 불원천리 고국에서 찾아간 사람과 그와 오래도록 다정하게 지냈었던 옛 친구와의 사이에서 있었던 일이라 할 수 있으며 또 세월과 환경의 변화만으로 그 탓을 돌릴 수 있겠는가.
「學而時習之(학이시습지)면 不亦說乎(불역열호)아,
有朋(유붕)이 自遠方來(자원방래)면 不亦樂乎(불역낙호)아,
人不知而不慍(인부지이불온)이면 不亦君子乎(불역군자호)아」
하는 論語(논어)의 學而篇(학이편) 첫머리에 나오는 글이 생각난다.
너무나 당연한 말씀이다.
그러나 일부에서나마 ‘벗이 있어 먼 곳으로부터 찾아와도’ 즐겁지 않은 친구가 있고, ‘벗이 나를 알아봐 주지 않아’ 노여운 친구도 있는걸 보면 孔子의 말씀도 풍류와 인정의 변천에 따라 그 진가가 퇴색되어 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