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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7년에 본 美國](24)


미스 적커먼의 인상




  KAL기가 동경에서 한 무리의 승객을 바꿔 태웠을 때 여직 것 비어 온 내 옆 좌석에 한 젊은 서양여자가 다가와서 자기 자리임을 확인하더니 내 쪽을 향해서 엷은 미소와 더불어 한눈을 찡끗, 「헬로우...」한다.

  금발에 푸른 눈과 오뚝한 코 그리고 갸름하고 예쁘장한 마스크를 가진 전형적인 미국 여자였다.

  그녀는 얼굴에 화장기 하나 없이 허름한 T셔츠와 실올이 너덜거리는 낡은 부루 진을 걸쳤고 맨발에 조리(일제 샌달화)를 신었는데, 신을 벗어 바닥에 놓고 그 위에 등에서 내린 작은 등산용 륙색을 올려놓더니 자리에 앉았다.

  비행기가 이륙하여 고도를 잡고 금연의 사인이 꺼지자 그는 즉시 짐을 뒤져서 숙녀용 멘톨켄트 담배를 꺼내어 한대를 피워 물며 내게도 내어민다. 씽긋 웃으면서 『우즈 유...?』

  아무튼 나는 이렇게 해서 행운(?)의 투어 메이트 미스 적커먼을 맞았고 그리하여 그가 호놀루루에서 내릴 때까지의 약 7시간 동안에 우리는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또 그 덕분에 미국에 관하여 좀 더 많은 예비지식을 보태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녀는 나에게 미국에의 내 첫인상을 그려준 인물이 되었다.

  그는 C주에 있는 L대학의 사회학과 2년생이고 아버지는 6.25한국전에 군의관으로 참전한 바 있는 의사이며 부모는 이혼해서 따로 살고 있다고 했다.

  또 그는 대학 컬리큐럼의 일부로 한국과 일본의 두 나라에서 현지실습을 하고 돌아가는 길인데 동행의 학우들과 함께 하와이에서 내려 며칠 더 놀다가 귀국할 것이라고도 말했다.

  한국에서는 3개월간 S대학의 대전캠퍼스에 적을 두고 그 학교의 한 여학생 집에서 숙식하면서 한국인 교수의 지도로 공부하고 조사. 연구하는 생활을 보냈고 서울에서도 1개월여를 영동 반도유스호스텔에 묵으며 지냈으며 한국의 학생들과는 불국사(佛國寺)관광도 하고 설악산(雪嶽山)등반도 했었다고 자랑했다.

  그가 처음에 한국에 오려고 했을 때, 그의 아버지는 「한국이 여학생의 신분으로 가기에는 아직 위험한 곳」이라면서 말렸었는데, 지금 돌아가면서 생각하니 그 판단이 전혀 빗나간 것이었으며, 아버지는 아마 그 때까지도 전쟁 중의 한국만을 머릿속에 그려 갖고 있었던가 보다고 말했다.

  그가 본 한국은 괄목할만한 사회적인 안정과 경제적인 발전을 이룩하여서 그가 아버지로 부터 듣고 온 한국에의 인상을 몽땅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실토하고

자기 나름대로의 판단으로는 강력한 정부의 계도와 농어촌에 퍼져가고 있는 새마을운동이 그 중추적 역할을 한 것으로 본다면서 바로 이것이 자기의 이번 학기 리포트 주제라고 소개하였다.

  그는 또 이 리포트에 담기 위하여 유신(維新)이나 에머젠시메줘(긴급조치)등에 관하여도 더 많은 자료와 지식을 얻으려고 애썼지만 실을 거두지 못했다면서 그 점을 심히 불만스러워 했다.

  어쨌든 우리는 이렇게 해서 서로 투영된 각기의 조국을 보고 보여준 셈이 되었는데 결국 이 미스 적커먼과의 대화를 통하여 얻어진 그와 그의 아버지에 대한 나의 인상은 미국을 대충 한 바퀴 돌아보고 난 뒤인 지금의 느낌으로도 그들이 한국인의 눈에 비친 보편적인 미국인의 한 모델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