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뚜라미 이야기(첫번째)

by 이용분 posted Aug 21,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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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요즘 귀뚜라미와 산다.                      청초

    장마비가 끝인뒤 얼마 전부터 어디선가 아주 가까운 곳에서 귀뚜라미소리가 들린다.
    아파트 안에 웬 귀뚜라미?
    그런데 진짜 귀뚜라미 소리다. 십층이 넘는 높은 우리 아파트, 망창으로 가려져 모기 한 마리
    들어오지 못하는 구조에 어떻게 들어 왔을까. 엘레베이타를 타고 현관문을 통해 들어왔나?
    그 것은 아주 불가능한 이야기다. 한참 전 앞산 밑 텃밭에서 화분의 흙을 보충하려 파온
    흙속에 아마도 귀뚜라미 알이 함께 옮겨 와서 우리 집 화분 속에서 깨어난 모양이다.

    아무튼 그렇게 귀뚜라미는 나의 서재 방 앞 발코니에 있는 관음죽 화분 속에서 살게 되었다.
    처음에는 둔탁한 소리로 '지직 지직' 서툴게 울더니 차차 솜씨가 날렵해 진다.하도 신기하여
    "뒷쪽 개천가 풀밭에서 암놈을 잡아다 짝을 지어주고 새끼를 까게 할까."
    "그러면 온 집안에 귀뚜라미 천지가 되어 뛰어 다녀서 안돼."  딸의 이야기...

    눈치도 빠르다. 사람소리가 나면 조용하다. 남편의 오랜 입원 퇴원 다시 입원으로 내가 한밤이
    되어 홀로 집에 돌아오니 낭낭하게 울어 댄다. 어라! 혼자 있는 것 보다 마음이 훨씬 든든하다.

    어느 날 큰 아들과 함께 늦게 돌아오니 이번에는 내가 거처하는 안방 장농 귀퉁이에서 울어
    대는 게 아닌가. 긴가 민가 발소리를 죽여 살금살금 가까이 다가 가면 조용하다. 틀림없이
    귀뚜리가 안방에 들어 왔다. 놀랍다.우리가 낮에 집을 비운 사이 발코니 관음죽에서 안방까
    지는 소파가 있는 거실은 S코스이다.그를 지나 족히 15M는 되는 거리를 뛰어서 들어 온 것이다.

    큰일이다. 사실 조용한 밤중에 귀뚜라미가 바로 방안에서 운다면 나는 어찌 잠을 이룰 수
    있을까. 그냥 살충제를 뿌려 죽여 버릴까?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죽여 버리는 건 너무 잔인
    하고 불쌍하다. 너무 피곤한 나머지 귀뚜라미 소리는 까맣게 잊어버린 채 그냥 깊은 잠에
    빠져 버렸다.

    다음 날 아침이 되었다. 그녀석이 방안에 그냥 있으면 수분도 없고 먹이도 못 먹어서 바로
    죽어 버릴텐데... 이 구석 저 구석을 불빛으로 골고루 비쳐 봐도 눈에 띄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긴 우산대로 장롱 밑을 몇번 흝어 보아도 걸려 나오는 것은 먼지뿐이다.
    에그! 불쌍한 녀석 살려주려 하는데 결국은 그 방구석 먼지 속에서 죽겠구나...

    그날 아침에 아들과 무슨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마침 눈앞에 무언가 새까만게 톡 튀어 드는
    게 아닌가. 자세히 보니 아주 작은 귀뚜라미다. 1.2센티 정도의 아주 작은 녀석이다.
    잡으려니 톡톡 튀어 도망을 간다. 잘못하여 화장대 밑으로 또 숨어 들어가면 못살게 되기
    십상이다. 부드러운 휴지를 덮어 씌워서 겨우 잡았다. 언듯 보니 한쪽 다리가 떨어진 것 같다.
    살려 주려 휘두른 우산대에 다친 모양이다.

    원래 제가 살던 고향 앞 발코니 관음죽 아래 살그머니 놓아 주었다.
    "아무래도 귀뚜라미 다리 한쪽이 떨어 진 것 같다" 고 하니 막내아들이
    "다리가 없으니 이제는 울지 못 하겠네 " 한다. 맞다. 귀뚜라미는 다리로 소리판을 굵어
    소리를 내는 걸로 안다. 은근히 마음이 아프다.

    늦은 저녁이 되었다. 집에 돌아오니 그녀석이 여전한 솜씨로 "찌릿찌릿"울고 있는 게 아닌가.
    후유 가슴을 쓸어 내렸다. 공교롭게 남편의 입원기간과 똑 맞아 떨어지는 이녀석의 생사가
    마치 우리 집의 분위기와 연결된 듯 계속 우리의 초미의 관심사가 되어 있다.

    사경을 헤메던 남편이 눈을 떴다. 이 얘기 저얘기 끝에 이 귀뚜라미가 안방으로 들어 온 얘기,
    한쪽 다리가 떨어졌는데도 잘 운다는 얘기 등이 파리한 그의 얼굴에 행복한 삶의 미소를 떠
    올리게 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그 녀석은 소리판을 열심히 긁어 예쁜 소리로 울고 있다. 이 가을이 다
    가도록 우리 집 앞발코니에서 아름다운 소리로 행복한 연주활동을 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2011.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