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을 날의 낙수(落穗) 청초 뒷 발코니 창문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나무들의 풍경이 형형색색으로 아름답게 물이 들어간다. 하루 밤만 자고 나면 나무마다 그 색갈이 확연히 다르게 변해 있다. 우리 집 바로 뒷켠 개울건너에 있는 나지막한 4층짜리 빌라의 지붕의 오렌지색과 가을 나무들의 갈색 짙은 갈색 노란색 빨간색 색조가 아우러진 풍경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어느 핸가 유럽 여행을 갔을 때 어느 나라에서였는지 높은 언덕에서 내려 다 보았던 마치 어느 중세 도시 속에 들어와 있지 않나 하는 착각을 들게 한다. 유럽사람들은 오렌지색을 특히 선호하는지 지붕색은 거의 오렌지색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이 아까운 가을날을 붙잡아 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하루하루의 색깔들이 하도 다르게 변하니 좀 더 아름다운 가을을 사진에 담아 놓기 위해 카메라를 들고 집을 나섰다. 여름날 푸르렀을 때에는 색깔이 엇비슷했던 푸른 나무 잎들이 일대 변혁을 일으켜 매일 매일 온갖 물감으로 다시 덧칠을 한 듯 제가끔 다르게 변신을 시도한다. 그러나 이미 물이 들었거나 성질이 급한 나무들은 잎을 떨구고 나목이 되어 깊은 겨울잠으로 들어갈 준비를 맞친 것 같다. 나지막한 지붕을 타고 올라가 여인의 어깨에 들른 레이스처럼 곱게 물이 든 담쟁이 덩쿨이 시선을 붙잡는다. 빨간 열매와 함께 빨갛게 물이 든 산수유 같기도 한 나 뭇잎이 눈을 현혹 시킨다.샛노란 색으로 물이든 은행나무 잎도 빨간 단풍 속에서는 낮은 음 자리 베이스 음속에 높은 음자리 소프라노의 음색처럼 곱디곱다. 마치 색조로 가늠하는 미술전람회에 초대 된 기분이다. 곱게 물이 든 단풍을 따라 정신없이 샷타를 누르면서 가다보니 큰길 건너 산 밑에 있는 채마밭에 까지 가게 되었다. 몇 해 전이나 다름없이 농사꾼들의 후예들인가 싶은 아파트 주민들이 올해에도 열심히 채소들을 심고 가꾸어 놓았다. 이미 그 뿌리들은 캐어 수확을 했는지 말라버린 고구마 줄기들은 한옆으로 치워 놓았다. 속이 꽉 차라고 짚으로 동여매 놓은 배추. 양념거리 파, 연초록색을 띄운 무가 금세라도 겅중 튀어 나오려는 아가씨의 통통한 종아리처럼 몸을 들어 내 놓고 짙 푸른색 무 이파리들이 이 초가을 정취 속에서 싱싱함을 자랑한다. 엉뚱하게 아주까리 나무가 붉은 껍질을 깨고 노란 꽃을 피우며 한옆에 서 있다. 잎은 이미 따 간 듯 검붉은 가지 끝에 꽃과 덜 영근 씨앗만이 조롱조롱 남았다. 이 나무의 잎은 삶아서 들기름으로 나물로 볶아 먹으면 맛이 있는데 요즈음 젊은 사람들도 이를 좋아 할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나이가 많은 이들이 추억 으로 심어서 향수(鄕愁)로 나물을 해 먹기 위해 한두 포기 심어 놓은 것 같다. 채마밭 사이 길을 어지간히 빠져 나오려는데 어떤 할머니와 중학생 또래의 손녀가 총각무를 심었던 자리에 무를 다 뽑고 뒷마무리 정리를 하고 있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그늘진 곳이라 무얼 심어도 될것 같지 않던 자리인데 그들이 이를 개간하여 작은 밭을 일구워 총각무를 심었던 모양이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어 사연을 듣게 되었다. 어느 친구가 이사를 가면서 이 밭에 채소를 심어 보라며 넘겨주고 갔단다. (이 땅은 시유지(市有地)인 것 같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보니 벌래 구멍이 좀 숭숭 나긴 했지만 깨끗한 무청이 제법 많이 그냥 남아 있기에 " 이걸 좀 골라 가도 괜찮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 그럼요. 그러잖아도 두고 가기가 아까웠는데... 잘 되었네요. 이것들은 내가 농약도 하나치지 않은 무공해 채소랍니다." 하며 반색을 한다. 내가 주섬주섬 골라 걷으니 얼른 자기 보따리 속에서 한 응큼의 무청을 꺼내다가 내게 보태 주는데 보니 내가 고른 것이나 진배없이 똑 같다. (무공해니 벌래가 먹은 것은 당연하다.) "이걸 삶아서 넣고 콩 비지를 해 먹으면 아주 맛이 있지요. 돼지고기도 좀 넣구요"^^ 하며 아주 기분이 좋아서 손녀한테 "얘야, 이 어른께 신문지 좀 두어 장 갖다 드려라, 싸서 가지고 가시게...^^ " 뽑아서 한옆에 세워 놓은 마른 들깻 단들을 가리키며 봄에 이웃 밭주인이 준 들깨 모종을 심었다고 한다. "내년에 내가 들깨를 심거든 잎 좀 따다 잡수세요. 내가 집이 좀 멀어서 미처 못 챙겼더니 올해에는 이렇게 잎이 그냥 시들어서 모두 떨어져 버렸지 뭡니까! 들깨 알이 다 쏟아져 버렸어요, ㅎㅎㅎ^^" 듣고 있던 내가 " 무슨 그런 말씀까지 원.... 감사합니다.^^ " 주인이 그리 말을 했다 손 치도라도 아무려면 내가 임자도 없는 밭에서 남이 애써 지어 놓은 것을 따다 먹을 생각은 아예 없지만 생면부지의 나에게 그런 인심 후한말까지하다니... 요즈음 같은 각박한 세상에 그냥 말만 들어도 너무나 고마운 일이다. 무청에는 여러가지 아주 좋은 영양소가 많이 들어 있어 외국에 사는 교포들은 이를 일부러 수입 해다 우거지 된장국을 끓여 먹는단다. 집에 돌아와서 깨끗이 씼고 보니 그냥 우거지 국을 해먹기에는 아까운 마음에 무청 김치를 담기로 했다. 보통 시중에서 파는 것은 거의 비닐하우스에서 키운 것이라는데 이것은 노지에서 하루종일 햇볕을 쬐고 자랐으니 여러 가지 영양소가 둠뿍 들어 있으리라. 소금에 적당히 저리고 멸치 젖 갈을 넣고 찹쌀 풀도 쒀서 정성스레 김치를 담그니 쌉싸름 한게 내가 바라던 바로 그 김치 맛이다. 밤에 잠자리에 누워 생각을 해보았다. 인심이라는 게 이렇게 누군가가 먼저 씨앗을 뿌리면 연결 고리처럼 사람들 마음속에 번저 나가는 큰 힘이 있구나... 온 사회의 분위기도 도미노 현상처럼 그리 되어 지는 게 아닐까? 나는 애도 하나 안 쓰고 그 할머니가 손수 벌레를 잡아가며 온 가우 내 씨앗을 뿌리고 가꾸어 키워 놓은 채소를 이렇게 그냥 먹게 되었으니 내심 너무나 고마운 마음이 든다. 맞벌이를 하는 아들네에게도 이 김치를 조금 나누어 주었다. 세상이 아무리 각박하다고 생각들을 하지만 모든 이들의 마음속에는 아직도 이렇게 순박하고 따뜻한 온기가 흐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돈으로 산다면 몇 푼 안될 이 김치 거리가 주는 감동이란 요즈음 내가 담궈 먹은 어느 김치 보다 제일 맛이 있었다. 갑자기 이 세상은 아직도 살아 볼만한 세상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가을날이다. 07년 11월 20일 |

2012.11.10 18:46
어느 가을 날의 낙수(落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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