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후 뒤집히는 집안 권력
노부부의 ‘황혼 전쟁’
남편은 화내는 아내 낯설고, 아내는 밥 달라는 남편 성가시다 …
자녀 독립 후 둘만의 19년, 준비하시나요
한국 사회의 노인 인구가 급속도로 늘고 있다.
65세 이상 노인 인구가 542만명(2010년)을 넘었다.
평균수명이 늘어난 만큼 1인 노인 가구 못잖게
노인 부부가 함께 생존해 있는 기간도 크게 늘고 있는 추세다.
2010년 전체 가구에서 노인 부부가 차지하는 비율이 39%.
자녀가 결혼 등으로 독립하고 부부만 함께 사는
빈 둥지 기간도 길어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노부부가 서로 적응하지 못하며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다.
한 집에서 살지만 대화도 식사도 함께하지 않는
‘한 지붕 별거생활’을 하는가 하면,
뒤늦게 이혼을 고려하는 70대 부부도 적지 않다.
빈곤과 질환 외에 노년기 부부 갈등이
100세 시대의 또 다른 그늘로 대두되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황혼의 전쟁이다.
전문가들은 ‘100세 시대는 노년기가 길어지고,
부부가 둘이 지낼 시간이 길어진다는 뜻’이라며
‘현재 노년기를 앞둔 베이비붐 세대(1955~63년생) 부부가
빈 둥지에서 함께 보낼 기간은 적어도
19년을 넘어설 것이라고 예측했다.
60~70대 부부 ‘황혼의 전쟁’
자녀들 출가 이후 둘만 사는 기간 평균 19년...
"무슨 말만 하면 싸움, 날마다 지옥 따로 없어"
#주부 이모(72)씨는 최근‘제2의 권태기’라고 불릴 만큼
남편(74)과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다.
대기업에 다니던 남편이 퇴직한 건 15년 전.
처음 4~5년은 함께 여행 다니며 큰 갈등 없이 지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함께할 일이 없어졌다.
세 자녀가 모두 결혼하자 집에 둘만 있는 시간이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이씨는 복지관·주부대학을 나가며 활동반경을 넓혔다.
반면 ‘복지관=경로당’이라고 생각하는 남편은 집안에
틀어박혀 지내고 있다. 이씨는“집 밖으로 나갈 때마다
남편의 잔소리가 심하다.
밖에 나갔다가도 집에 들어오기 싫어진다.
집에 아주 귀한 애완견이 있는 것 같다”고 털어놨다.
이씨 부부는 각 방 쓴 지 6년째,
분가한 자녀는 이 사실을 전혀 모른다.
이씨는 “젊었을 때는 몰랐는데 ‘성격 차이’가 너무 심하다.
날마다 다투고 있으니 지옥이 따로 없다. 앞으로 갈등이
더 심해질 것 같아 걱정”이라며
부부 관계 상담소를 찾았다.
#공무원 출신인 정모(76)씨도 아내 한모(72)씨와
‘한 지붕 별거’생활 10년째다.
정씨는 연금으로,
아내는 가게 임대료를 받으며 돈 관리도 각자 한다.
텔레비전도 각 방에서 따로 본다.
아내가 남편에게 해주는 건 밥상을 차려주는 정도.
젊을 때부터 남편 정씨는 가부장적인 성격이었다.
아내에게 ‘끼어들지마’‘알지도 못하면서’
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한씨는 젊었을 땐 이런 말을 참고 견뎠다.
한데 이제는 달라졌다.
쌈짓돈을 모아 가게를 차리면서부터 목소리가 커졌다.
정씨가 무슨 말만 하면 같이 소리를 지르며 싸우기 일쑤다.
아들·며느리·손자·손녀 등 10여 명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정씨는 “무슨 말을 해도 싸움이 되니 아예 모르는
사람처럼 지내는 게 차라리 낫다”고 말했다.
고령화 시대의 그늘은 질병과 빈곤만이 아니다.
부부 관계도 그중 하나다.
평균 수명이 늘고 자녀가 독립하고 부부만 사는
‘빈 둥지 기간’이 늘면서 65세 이상 노년층 부부가
겪는 갈등이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100세 시대, 그리고‘빈 둥지 20년’시대를 맞아
나타난 새로운 현상이다.
통계청이 지난해 발표한‘2010년 인구총조사’결과에 따르면
65세 이상 노인 인구는 542만 명.
5년 사이 노인 인구가 24% 급증했다.
노인 인구 비율은 11.3%로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두 자리 숫자를 기록했다.
한국 사회가 급속도로 ‘고령 사회(14~20%)’로
진입하고 있다는 신호다.
주목할 것은 고령화가 급속화되면서 부부가 함께 생존하는
기간이 과거에 비해 현저히 늘고 있다는 점이다.
2010년 기준 전체 부부 가구에서 노인 부부가
차지하는 비중은 39%인 것으로 나타났다.
한경혜 서울대 아동가족학과 교수는 지난해
여성정책연구원이 ‘100세 시대 가족’을 주제로 연 여성정책포럼에서
“(베이비붐) 이전 세대는 자녀를 여러 명 낳고 수명이 짧아서
자녀가 독립한 뒤 남편과 아내 단둘이 사는
기간이 1.4년에 불과했다.
그러나 소자녀, 수명 증가로 베이비붐 세대
(55~63년에 출생한 세대)의 경우 부부만 사는 기간이
19.4년 이상이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한 교수는“자녀가 떠나고 부부가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준비가 돼 있지 않으면 수명이 늘수록 부부 갈등과
이혼이 증가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말했다.
최근 발표된 서울시 정보화기획단의 ‘2011 혼인·이혼통계’는
이 같은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결혼생활 20년 이상의 황혼 이혼이 4년 이하
신혼이혼을 추월하고 있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에 따르면 2011년 70대 부부의
이혼상담 건수는 모두 118건이었다.
전체의 2.28% 수준이지만 4~5년 전만 해도 70대는
아예 건수를 셀 수 없었다.
100세 시대의 또 다른 그늘,‘황혼의 전쟁’이다.
부부 고유의 관계로 남는 70대
고위 공무원 출신 70대 남편,
온화했던 아내 툭하면 불같이 화내
남편은 자식들에게 "이혼하고 싶다',
40대 자녀 "이 정도인지 몰랐다" 당혹
‘종심(從心)'. 공자는 70세를 두고 이렇게 표현했다.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해도 어긋남이 없을 만큼
성숙하고 평온한 나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현실은 사뭇 다르다.
70대 부부들의 갈등은 겹겹이 쌓인 세월만큼
더 두텁고 독설도 더 살벌하다.
고위 공무원 출신 임모(76)씨가 요즘 겪고 있는 갈등도 마찬가지.
최근 그는 분가해 살고 있는 자녀 2남2녀를 모은 자리에서
“요즘 너무 힘들다.
이혼하고 싶다”고
깊은 시름을 털어놨다.
아주 사소한 일에도 불같이 화를 내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아내를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도저히 자신이 없다고 했다.
중년의 자녀들에게‘구조요청'을 한 셈이다.
임씨의 차녀(45)는“건강이 좋지 않으신 어머니가 몇 년 전부터
눈에 띄게 공격적인 성향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부모님
사이의 골이 이 정도로 깊은 줄은 전혀 몰랐다”고 했다.
임씨는 또 “예전과 달라진 어머니의 변화도 당혹스럽고,
과거의 권위가 있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하루하루를
힘겨워하는 아버지 모습을 보는 것도 안타깝다”고 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늘어가는 고령 부부65세 이상 542만 명, 5년 새 24% 증가
65세 이상 부부도 전체 부부의 39%, 황혼 이혼이 신혼 이혼 추월
일단 부부가 둘이서 보내는 시간 자체가 크게 늘어난
것이 원인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이호선 한국노인상담센터장(명지대 겸임 조교수)은
“현재 70대 부부들은 대부분 25세 전후로 결혼했던 사람들인 만큼
평균수명을 80세로 볼 때 55년을 함께 사는 셈”이라고 말했다.
특히 70대 부부 관계는 50~60대 때와는 현격히 다르다는 것.
50~60대에는 은퇴 이후라도 경제적·체력적으로 여유가 있었다.
자녀 결혼이라는 부부의 공동 과제도 남아 있다.
하지만 70대엔 이 모든 것이 사라지고,
두 사람이 보낼 시간이 늘어남으로써 부부 고유의 관계가
전면에 부각될 수밖에 없다.
은행원으로 정년 퇴직한 정모(71)씨도 최근 이혼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는 경우.
정씨가 등산길에서 만난 50대 여성과 친하게 지내는 것을
아내가 외도라고 여기면서 갈등이 심각해진 것.
하지만 아내는“10년만 젊었어도 혼사 앞둔 애들
생각해서라도 덮었겠지만,
이 나이에 참고 살 이유가 없다”며
강하게 이혼을 주장하고 있다.
한국여성정책개발원 최인희(노년학 박사) 연구위원은
“100세 시대는 인생의 후반기,
즉 노년기가 연장되고 가족생활 시기가 길어진다는 뜻”이라며,
“노인 부부 가구가 증가하는 만큼 배우자와의 관계가
노년의 삶에 중요한 이슈로 주목받고 있다”고 전했다.
정신적·신체적인 노화(老化) 역시 부부 사이를 멀어지게 하는 요인이다.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건강의학과 윤대현 교수는
“흔히 나이 들면 사고가 더 성숙해지고 관대해질 것이라
여기지만 그렇지 않다”며 “오히려 상대방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져 자기 고집이 세지고 잔소리가 심해진다”고 말한다.
각자 많은 경험이 축적돼 있는 만큼
‘내가 옳다’는 생각이 더 굳어지고, 화를 낼 때조차
‘나는 화를 낼 만하다’고 정당화하는 경우가 많아진다는 것이다.
신체적인 노화로 두뇌의 유연성이 떨어지면서
감정 컨트롤이 안 되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윤 교수는“노화로 두뇌 유연성이 떨어지면서 본래 경직된
성격인 사람은 경직성이 더 증폭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뇌세포 손상이 병적인 단계(치매)로 접어들면
감정 통제가 안 돼 공격적인 성향이 큰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