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나 딸의 눈에 훌륭하게 보이지 않는 어머니가 없을 것입니다. 불효막심한 아들‧딸은 예외로 치더라도 그런 것을 일컬어 ‘인지상정’이라고 할 것입니다. <한글 큰 사전>에 수록된 10만 단자 중에서 우리 모두에게 가장 정다운 낱말 한 마디는 ‘어머니’라고 들었습니다.
나의 어머님은 평안남도 맹산이라는 시골에 태어나 열일곱 살에 그 고을의 젊은 면장에게 시집간 평범한 주부였습니다. 그러나 그 시골 아낙네의 가슴 깊이는 어떤 크고 굳센 정신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어머님 친정 부모님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내 생각에는 그 시골을 찾아온 미국 선교사로부터 스물네 살에 세례를 받고 기독교 신자가 된 사실이 큰 영향을 주었으리라고 믿습니다.
나의 어머님은 70세에 세상을 떠나셨는데 장례식에는 그 어머님의 아들‧딸을 보고 문상 온 조객들이 몇 백 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는 신촌 시장에서 장사하는 아주머니들이 여러 분 있었습니다. 모두 일을 하다가 허름한 차림으로 봉투 하나씩 들고 돌아가신 ‘무명’의 할머니에게 ‘조의’를 표하기 위해 온 것입니다.
어머님의 아들‧딸은 한 번도 그 시장에 가본 일이 없는데 어찌된 일일까,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이 사실에 나의 어머님의 삶의 비결이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합니다.
◆2013/02/09(토) <나의 어머님(2)> (1746)
신촌 장터의 아주머니들이 여럿 문상 온데는 모두 그만한 ‘사연’이 있었습니다. 어머님이 장터에 오시면 거기서 장사하는 아주머니들이 모두 반가워하였답니다. 왜? 어머님은 도대체 물건 값을 깎는 일이 없었답니다.
뒤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아침에 어머님이 장터에 나타나시면 아주머니들은 모두 반기며 “할머니, 어서 오세요”하며 반기었는데 나의 어머님은 물건 값을 깎는 일이 없었을 뿐 아니라 조금이라도 더 주면, 오히려 “남지도 않는 장사를 하면서 더 주면 밑진다”고 하셨답니다. 나는 요 짧은 에피소드에서 어머님의 삶의 비결을 터득할 수 있었습니다.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옛글이 있습니다. 처지를 바꾸어 생각해본다는 뜻입니다. 상대편의 처지에서 생각해 보는 겁니다. 저자에서 채소나 생선을 벌려놓고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는 아주머니 입장에 선다면 물건 값을 깎고 싶은 생각이 나지 않을 겁니다.
환자가 의사의 입장에 설 수만 있다면 의사 노릇 하기도 쉽고 환자도 의료혜택을 더 많이 받을 수 있을 겁니다. 환자가 의사를 소송하는 일만 줄어도 환자의 의료비는 많이 줄 것입니다.
정치판도 그럴 것 아닌가요. 여당이 야당의 입장에 서고, 야당이 여당의 입장에 설 수만 있으면 정치판의 풍토는 완전히 달라질 것입니다. 말이 쉽지, 그렇게 될 수는 없다고 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 방법 아니고는 문제 해결의 방안이 없습니다.
◆2013/02/1
0(일) <나의 어머님(3)> (1747)
어찌하여 ‘어머님’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게 되었는가? 거기에는 까닭이 있습니다. 지난 해 12월 19일 대선에서 여성이 이 나라의 대통령으로 뽑힌 사실에 나 만큼 감격한 사람도 드물 겁니다. 그것은 내가 나의 어머님을 통해서 여성의 위대함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어머님은 평범한 가정주부로 일생을 마치셨지만 타고 나신 능력은 탁월하셨고 어머님의 삶이 가족과 이웃에게 미친 영향은 매우 큰 것이어서 이 기회에 한국의 모든 여성들을 향하여 감히 “나의 어머님을 본받으라”고 외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여 몇 마디 하기로 마음먹었고, 내 말이 새로 취임하는 여성 대통령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소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님이 시골 면장 노릇만 계속 하셨으면 온 식구가 그런 ‘가난’을 겪게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아버님이 면장 일을 그만두시고 광산에 손을 대면서부터 집안의 경제적 위기가 닥쳐온 것입니다. 논밭을 팔아 넣어도, 집을 팔아 넣어도 안 되는 광산은 안 됩니다.
‘노다지’ 꿈에 연연한 아버님은 집에 돌아오시지 않고 계속 그 ‘무지개’를 쫓아 헤매셨고, 어머님은 그 시골서 그 큰살림을 꾸려나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어머님은 아이들 손목을 잡고 평양이라는 번화한 도시로 나오셨습니다. 아직 30 밖에 안 되는 젊은 엄마, 그 일을 생각하면 오늘도 내 눈시울이 젖어듭니다.
◆2013/02/11(월) <나의 어머님(4)> (1748)
가난을 겁내지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는 비결을 나는 나의 어머님에게서 물려받았습니다. 저녁 끼니를 끓일 쌀이 떨어져도 어머님은 걱정을 안 하셨을 뿐 아니라 웃는 낯으로 “산 사람 입에 거미줄 쓸겠냐”고 하시며 오히려 우리를 위로하셨습니다.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미국 교계의 거물 못(J. R. Mott) 박사는 “인간의 곤경은 하나님의 기회다”(Man’s extremity is God’s opportunity)라고 했다는데 그 말은 진리입니다.
저녁 끼니를 끓일 쌀이 떨어지면 5년, 10년 얼씬도 안 하던 친척이나 친지가 몇 됫박 되지 않는 쌀이라도 자루에 넣어 지고 대문으로 들어오면서, “오래 찾아뵙지 못해 미안합니다”라고 하는 그 광경을 나도 어려서 두 서너 번 본 기억이 있습니다. 어머님은 늘 “하나님은 우리를 굶겨 죽이시지 않는다”고 하셨고 나도 그 말씀을 믿고 이 날까지 살아 왔습니다.
아이들 손목 잡고 생소한 평양역에 내리셨을 때 나이가 30 밖에 안 되셨는데, 왕년의 면장 사모님이 안 하신 고생이 없었습니다. 처음 10년에 이사를 열네 번 하면서 셋집을 전전하시면서, 부잣집 빨래, 남의 삯바느질, 학생 하숙을 하시면서 우리를 키우시고 가르치셨습니다. 우리는 가난했지만 어머님 덕분에 언제나 떳떳하고 당당하였습니다. 딸은 여학교에 보냈고 아들들은 중고등학교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내가 있습니다.
◆2013/02/12(화) <나의 어머님(5)> (1749)
그 고생을 하시면서도 어머님은 딸을 여학교에 보내셨습니다. 처음에는 선교사들이 세운 미션 스쿨인 숭의여고에 보내셨으나 일제 말기에 가서 강제로 폐교되는 바람에 서문여고에 전학하여 졸업하였습니다. 돈도 없으면서 아들도 아닌 딸을 여학교에까지 보내느냐는 동네 아주머니들의 핀잔을 어머님께서는 웃으시면서 받아 넘기셨습니다. “뉘 집에서는 돈을 쌓아 놓고 아이들을 공부 시키나요!” 그것이 어머님의 항변이셨습니다.
평양 시내에는 대동강이 흐르고 그 강변의 경치가 매우 뛰어난데 거기에는 국일관‧명월관 같은 요정들이 있었고 요정마다 권번(券番-기생양성소)이 있었습니다. 가난한 집에 태어난 예쁘장한 소녀들을 모아, 장구 치고 춤추고 소리하는 법을 가르쳐 기생을 만드는 곳이었습니다. 이웃의 아주머니들이, “옥길이는 권번에 보내면 집안 살림은 나아질 텐데”하며 오히려 우리 어머니를 나무랐다고 합니다.
그런 ‘권면’을 웃어넘기면서, “아이들이 학교엘 다녀야지 기생이 돼서야 되겠어요”라고 하시며 학교엘 보냈으니 그가 뒤에 이화대학교 총장도 되고 문교부장관도 됐을 것 아닙니까. 그가 권번을 거쳐 기생이 되었다면, 젓가락으로 사발이나 두들기며, “니나노, 니나노, 닐니리야 닐니리야”하다 끝났을 터인! 그 딸을 이화여전까지 보낸 어머님의 뜻은 참 용감하고도 고상한 것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