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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에 바치는 사모곡(思母曲)                      청초

    어슴프레 여명이 밝았는데 낮이 길어진 걸 제 먼저 아는지 뒤결 냇가에 이름 모를 새들이
    우짖기 시작한다. 무심한 세월은 어버이날도 지나치고 계절은 푸르른 오월의 절정에 이르렀다.  

    나는 우리 집의 맏딸이었다. 바로 밑 두 살 터울의 남동생이 있어서 공무원이신 아버지의
    박봉으로는 집안 형편이 여의치 않아 제 때에 대학을 가지 못했다. 그때 우리학교는
    서울대학 입학률 98퍼센트 하면서 김영훈 교장선생님이 처음 '천하부고'를 외치시며 구가하던
    시절이다.

    모든 친구들이 대학 합격의 즐거움으로 기쁨을 만끽하던 때다. 그런 와중에 나는 학교
    추천으로 서울 대 입시 못지않게 치열한 경쟁을 치루고 다행히 한국은행에 취직을 했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이런 일은 발밑에 밟힌 개미의 소리만치도 아닐 만큼 누구의 기억에도
    살아 있지 않은 하찮은 일이 되었다.

    혹독했던 일제로 부터의 해방과 어이없는 6.25사변을 치른 후 모든 국가기반 시설은 파괴되고
    일체 산업이 전무했던 시절이다. 작금의 치열한 취직전쟁을 생각하면 정말
    이 세상살이에서
    나는 최후의 일전에 승리를 했던 셈이다.  

    은행에 들어가니 입행동기 모든 동료들이 제 나름대로 집안 사정이 여의치 않아 서울대
    입시에 합격하고도 은행을 택한 친구들이 많았다. 월급도 많이 타게 되니 대학을 못간
    서러움 같은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마음에 위로가 생겼다. 차차 대학에 간 아이들은
    여전히 부모의 보살핌을 받고 있지만 나는 의젓하게 돈을 벌어 부모님께 드리며 사회를 먼저
    배운다는 나 나름대로의 가치관이 성립되어졌다.  

    하루는 무슨 일이었는지 어머니께서 어려운 걸음으로 나를 찾아 오셔서 남대문 옆 거리에서
    만나게 되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는데 어머니는 내가 입고 출근하던 내 저고리를
    입고 나오신 것이다. 그 시절에는 한복을 많이 입었다. 순간 내 직장 동료들에게 얼마나
    창피한지 몸들 바를 모르겠다.  

    그게 무에 그리 창피스런 일이었을까. 그 당시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살기 어려웠던 시절이다.
    정말 철도 없지, 가족 간 옷을 좀 입었기로서니 무엇이 대순가...
    지금 생각하면 정말 죄송한 생각이 든다.

      은행에 들어가자 양화점에서 몇 개월 할부로 아버지 가죽 구두를 맞추어 드렸다. 내 이름을
    걸고 월부로 구두를 맞출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큰 즐거움이었다. 그 당시는 구두값도
    비싸 아버지는 낡은 구두를 신고 계셨다. 내 이름이 이 세상에 신용을 발한다는 생각에
    나를 소중하고 신용 있는 나로 되기 위해 점점 더 착실해 지고 나를 잘 가꾸어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그 신조는 지금도 마찬가지로 살아 움직인다. 아이들을 셋을 낳아 키우면서
    우리 자녀들과 실행하지 못할 약속은 절대 하지 않는다. 일단 약속을 한 것이면 꼭 지키는 게
    불문율이다.  

    월급을 타자마자 제일 먼저 샀던 게 두툼한 영어 콘사이스였다. 여전히 학교에 다니는
    기분으로 영어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에는 어떤 친구가 준 앞뒤장이
    몇 장 떨어져 나간 얄팍한 헌 영어사전으로 단어 찾기 숙제를 열심히 했다. 반 친구들이
    내 단어장을 빌려가 보면 자기들이 모르는 단어가 많이 없다면서 실망을 하였다.

    때때로 시행하는 은행 내 영어 경시대회에 응시하면서 내 영어 실력을 닦았다. 은행 내에
    있는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다가 틈틈이 밤새 읽어서 독서 영역을 넓혀 나갔다. 그 덕에
    오늘날 내가 외국여행을 다닐 때 영어에 대한 공포심도 없이 회화를 구사하곤 한다. 게다가
    독서 덕분에 미력하나마 이렇게 글을 쓰는 바탕을 갖게 된 것 같기도 하다.

    그 후 3년인가 지난 후 다시‘혈의 루’이인직 등을... 다시 외우며 입시공부를 하여 야간대학
    영문학과에 다니게 되었다. 마침 은행 가까이에 있는 대학에 진학을 하게 되었다.
    주간보다 야간에 더 실력이 좋은 친구들이 모여 들었다. 정식으로 제 때에 들어 온 학우들
    보다 두어 살 위인 나를 아우들이 '언니, 언니' 하며 많이 따랐다. 대학 내 오월의 메이퀸에
    나를 추천하는 급우들이 많았지만 극구 사양하여 나가지는 않았다.  

    그곳에서 교양과목으로 처음 불어도 배우게 되었다. 프랑스 사람들은 무엇보다 구두가 깨끗해야
    신사라고 한단다. 교실 문 앞에서 모자로 구두를 쓱쓱 닥아 신고 다시 그 모자를 쓰고
    들어가야 된다고 하여 아연실색을 하였다. 그 선생이 이만영 교수다.
    정한모 교수한테서도 국문학공부를 배웠다.  

    지금까지 인생길에서 학벌이 무어 그리 중요한 부분은 아니지만 문학을 하고 내 수필집을
    내다보니 수학 경력 난에 대학을 안간 것보다는 간 게 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늦은 나이었지만 대학을 가도록 종용했던 지금의 남편에게 고마운 마음도 든다.  

    요즘 T.V.에 보면 부모님의 딸자식 차별과 가난으로 한글도 못 깨우쳐 때 늦은 나이에
    할머니들이 마을회관에 삼삼오오 모여 한글 받아쓰기를 하며 즐거워하는 정경을 보며
    눈물겹다.
    그렇게 늦은 나이에도 검정고시를 거쳐 중학교 고등학교 과정을 수료한 후 더러는 대학을
    가겠다고 기염을 토하는 이들이 있어 종종 화제에 떠오르곤 하는 걸 본다.

      어느 날 지하철에서 60대 중반에 이른 어느 아주머니가 영어회화 책을 들고 마치 닭이 물을
    마시는 형국으로 책 한번 드려다 보고 천정 한번 쳐다보고를 연속하며 영어 회화를 중얼중얼
    외우는 걸 보고 얼마나 신선한 충격을 받았는지... 그 녀는 외국인이 많이 오가는 곳에서
    일을 하는데 영어가 절실해서 영어공부를 하게 되었다고 여학생처럼 해맑게 웃는다.
    목적이 순수하면 표정도 밝다.

    이제 인생 백세를 운운하는 세태에 이르렀다. 60세에 퇴직을 하고 앞으로 하는 일 없이 보낼
    세월이 30년이 넘는다. 무엇을 하며 그 긴 세월을 보낼 것인가. 돈을 벌고 안 벌고의 문제를
    떠나 무엇인가 나의 존재감을 일깨울 일이 있어야 되겠다.
    돈도 벌고
    세월도 보람 있게 보내면 좋겠지만 수많은 사람들 중에 무에 그리 용이하겠는가.  

    요즘은 평생교육 시대다. 컴퓨터도 하고 노래도 배우고 그림도 그려 보고...
    우선 치매에 안 걸리도록 독서를 한다거나 마음에 맞는 친구들과 만나서 바둑이라도 두며
    마음속에 응어리진 인생사를 토의 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이 모두 여의치 않으면 매일 매일 신문을 꼬박꼬박 읽던가. 신문만 제대로 읽어도 그 속에
    온갖 세상사 궂은 일 좋은 일 얼마나 재미있는 이야기가 펼쳐있는가...
    아니면 꽃을 키우든가 무엇인가 좋은 취미생활을 갖도록 노력을 하여야 되지 않을까...
                                
                                                          2013. 5.16







(그림에 대고 연속 두번 클릭을 하면 아주 시원한 숲길이 펼쳐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