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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맥아더 장군과 당시 대통령 이승만--6.25 전쟁 기록 전시장에서 찍어 옴)
  

내가 겪은 6.25 동란(전편)                                   청초 이용분

1950년 6.25 무렵 나는 장염이 걸려 며칠간 학교에 결석하고 있었다. 살살 배가 아프고 뒤가 아주 무지근하여 화장실을 자주 가야 되기 때문에 매우 괴로웠다. 약국에서 약을 사다 먹어도 잘 듣지를 않았다. 같은 동네 사는 부중 같은 반 친구 강영옥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서 우리집에 들렸다. 전교생이 학교를 며칠간 안 가게 되었다고 소식을 전한다.

26일날 아침 일찍 우리 집 북쪽 의정부 방면에서 '쿵 쿵 쿵' 대포소리 같은 소리가 먼 천둥소리처럼 들려왔다. 좀 있자 야채 밭 건너 멀리 보이는 한옥 골목에 흰 바지저고리를 입은 한 무리의 농부들이 소를 끌고 웅성웅성 나타났다. 아닌 밤중에 웬 '우시장'이 서나 하고 호기심으로 그냥 쳐다보았다. 북쪽 먼 곳에서는 콩 볶듯 하는 총소리가 조금 더 가까히 들려 왔다. 총소리를 들어 본적이 없는 때라 그게 총소리 같다는 짐작을 했을 뿐이다.

그러자 옆집에서 6.25 전쟁이 터졌다고 하는 게 아닌가. 무언가 뒤숭숭한 분위기 속에서  다음 날이 밝았다. 아침 일찍 친구 강영옥이네 집을 찾아 갔더니 그 역시 어쩔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친구네는 우리 보다 한참 뒤늦게 이북 함경도에서 삼팔선을 넘어 왔었다.

우리 집에는 나무 담장을 사이로 쪽문을 통하고 사는 마음씨가 좋은 이웃이 있었다. 점심 때면 밥사발만을 들고 찾아와서 종종 우리 집 밥상에 끼어서 밥을 먹을 정도였다. 남편은 살결이 희고 여드름이 좀 있는 '게리쿠퍼' 형 아주 미남으로 생겼는데 지위가 좀 높은 경찰관이었다. 경위라던가. 그 당시는 정말 드물게 찦차로 모시러 오곤 하였다. 함경도에서 뒤늦게 넘어온지 얼마 안되는 부인이 있을 뿐 아이는 없는 부부였다. 그 부인은 살결도 검은데다 남편에 비해 너무나 인물이 아니었다. 그의 남편이 그녀 집에 하숙을 하다가 눈이 맞았다나...

남편이 먼저 남하하고 한참 뒤 뒤따라 이북에서 넘어 왔다. 남편의 그 인물에 다시 여자가 생겨 살림을 차려 있었다. 그 여자는 눈이 크고 별로 우리 집 하고는 오가지를 않았다. 어느 날 그 본처가 넘어 오자 큰 형수가 나서서 그 나중 여자를 쫓아 내어 버리고 자기를 들여 앉혀 주었단다.

그녀는 전형적인 함경도 사투리로 '그렇지 않겠음둥' '이랬지비' '저랫지비' 이런식 말투를 구사하였지만 사근사근하고 마음은 비단 결 같았다. 그 당시에는 아주 귀했던 별 사탕이 든 군용 건빵을 막내 동생 손에 들려주곤 하였다. 그의 집에서는 유성기로 현인의 '신라의 달밤' 노래를 즐겨 듣는지 우리 집에서도 종종 그 노래가 들려오곤 하였다. 그런 그들이 어느 새 피난을 갔는지 집이 비어 있었다.

우리가 그때 살던 그 집은 우리가 그 동안 작은 집에 살다가 얼마 전에 새로 크고 좋은 사택으로 이사를 했었다. 부모님은 가구점에서 멋진 옷장도 새로 사고 남들이 비싸서 포기한 그 당시로는 아주 귀한 설탕배급을 대신 타오기도 하며 고생 끝에 좀 넉넉해져서 살기가 점점 나아지던 참이었다. 마당에는 내가 그토록 좋아하던 꽈리나무도 심었다. 좀 있으면 빨갛게 익은  꽈리를 따서 불어야지 하고 작은 희망으로 나는 기쁨에 차 있었다. 시퍼런 꽈리는 쓰디쓰기 때문이다.

그때는 9월이 신학기였던 것 같다. 남들이 추켜세우며 모두 부러워하는 국립사대부중을 특차로 들어가 우리 학교 반 친구들은 너나없이 어린 마음에 으쓱해 하며 아주 행복 해 하던 시절이었다.
2학년 신학기에 쓰려고 지질이 아주 좋고 칸이 좁게 줄이 진 하얀 노트 등 새로 학용품을 잔뜩 사서 그걸 어루만지며 나는 무척 마음이 흡족 했다. 그러는 와중에 뜻밖에 전쟁이 터졌단다. 작고 네모진 가죽트렁크에 가득 꼭꼭 담아 놓고는 피난을 가면 가져가야지 하고 잔뜩 마음을 먹고 있었다.

점심나절 되어서 수색 쪽에 근무하시던 아버지가 집에 며칠 만에 돌아 오셨다. 우린 그때 청량리에 살고 있었다. 느닷없이 우리도 피난을 가자고 하신다. 그때까지도 레디오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이 서울은 사수를 하고 있으니 조금도 동요하지 말라는 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생각하면 우리는 고향이 남쪽 충청도라 귀향을 한 셈이지만 이북 황해도에서 넘어왔기 때문에 혹여라도 아는 이북사람들이 아버지를 찾아오면 큰일이라며 그리 작정을 하신 모양이었다.

공교롭게도 그 당시 어머니는 다리 무릎관절염에 걸셔서 꼼짝을 못 하실 형편이었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그냥 집에 머무르기로 하셨다. 납작한 가죽가방에 달랑 누런 국방색 미제담요 한   장만 넣었다. 마침 집에서 흰 설기를 찐 게 있어서 그 떡 덩어리를 두어 개 넣어 주셨다. 나와 바로 밑 두살 터울 남동생과 두 살이 됐을까 걸음마를 겨우 띄는 남동생을 아버지가 등에 업고 무작정 길을 나섰다.

방향을 서빙고나루 쪽으로 잡았던 것 같다.  하늘에는 가지각색 모양의 이북 비행기가 쌩쌩 날아다니고 있는 속에 우리나라 연습기는 천천히 무심하게 연습하듯 날아다니고 있었다. 남부여대(男負女戴) 가족들을 이끌고 떠나는 피난민 속에 섞여 걷다보니 니야까에 노인을 싣고 가는 사람이 눈에 띈다. 엄마도 저리 하고 오면 되었을 것을 ... 후회가 막급하다.

저녁 5시는 좀 넘었을 듯 한때 서빙고 나루에 도착을 했다. 벌써 배를 타고 건너려는 피난민들의 대열이 뒤죽박죽 서로 먼저 타려다가 물에 빠지고 배가 엎어지고 난리가 났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데 대한청년단원 젊은이들이 나서서 겨우 정렬을 시키는 바람에 요행히 우리는 배 머리 쪽에 얻어 타고 무사히 한강을 건널 수 있었다.

해는 지고 어둑어둑한데 비까지 주룩주룩 내리는 게 아닌가. 어디 누구네 쇠 외양간에라도 들어가 비를 피하고 어서 다리를 쉬고 싶다. 살면서 이렇게 지붕이 있는 공간을 그리워한 적도 없는 것 같았다. 묻고 또 물어 찾아 들어간 어느 농가에서 고맙게도 방 한 칸을 빌려 주었다.

바깥에는 무심한 비는 줄줄 내리고 있었다. 새벽녘이 되었는지 나는 또 배가 살살 아파서 낯이 선 시골집 화장실도 못 찾고 풀밭에 나가 한참을 앉아 있었다. 바로 뒤 높은 산봉우리 뒤에서 섬광이 번쩍하더니 '우르르 쾅' 한다. 번개가 치나보다 하고 무서워 재빨리 집안으로 들어갔다. 후에 알고 보니 그때 한강 다리를 끊었다 한다.

다음 날 아침도 못 먹은 채 집 주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우리는 난민 속에 끼어서 무조건 걸어야만 되었다. 날은 개었다. 오다가다 흙투성이군복의 다친 우리 국방군이 총신을 지팡이 삼아 다리를 질질 끌고 대열에 섞인다. 전쟁에서 다친 모양이지... 나는 그간 아파서 제대로 먹지도 못 했는데 아버지는 끝에 동생을 업고 저만치 앞장 서 가신다.

햇볕은 뜨겁게 쨍쨍 내려 비치고  나는 미제 담요가 든 가죽가방을 들었다. 내 나이 열다섯 살이다. 어찌도 무거운지 저만치 뒤쳐저서 따라 갈 수가 없다. 땅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서 낑낑 거리고 있는 데 바로 밑 열세살 남동생이 왜 못 오느냐고 소리를 빽빽 지르며 채근이 대단하더니 드디어 가방을 빼앗아 질질 끌고 간다. 그 남동생은 원래 성질이 급해서 크는 동안에도 종종 닭싸움을 하듯 그러면서 큰 사이다.

드디어 저녁나절 수원에 도착했다. 요행이도 우리는 남행열차의 한 귀퉁이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기차가 슬슬 떠나기에 창밖을 내다보았다. 수원비행장에 서 있는 대형 수송기니 전투기니 여러 종류의 비행기가 마구 폭격을 당하여 주저앉고 있는 게 보인다. 우리는 그 적기가 우리가 탄 기차를 쫓아 와서 폭격을 할까 봐 마음이 조마조마 하였다. 무사히 대전에 도착을 하였다. 우리를 대전 근교 '한우물' 외갓집에 맡겨 놓고 아버지는 다시 직장으로 복귀 하셨다.

그때 처음으로 초음속 쌕쌕이 비행기를 보았다. 분명히 '쌩' 하고 비행기 소리를 들었는데 연기만 남겨 놓고 비행기는 벌써 저만큼 날아가고 있는 게 아닌가. 그걸 '호주 쌕쌕이 비행기' 라 일컬었다.

외갓 댁은 아주 시골이라 아무런 소식도 들을 수가 없었다. 지금에는 그 흔한 레디오도 없었다. 사실 그시절 누구도 아무런 통신수단이 없었다. 술렁거리는 어른들의 낌새에 좀 불안 하기는 했지만 도통 세상소식을 알 수가 없었다. 이따금 쌩하고 하늘위의 구름을 뚫고 지나가는 비행기의 괭음 만이 무슨 일들이 벌어지고 있구나 짐작을 하게 했을뿐...

좀 있자 외갓집에서도 한 밤중에 어른들이 등잔불을 켜 놓고 둘러 앉아 잠들도 못 주무시고 의논이 분분하다. 쌀과 옷은 큰독에 넣어 땅속 깊이 파묻고 정감록에 써있기를 신도안이나 태안 쪽과 계룡산 쪽이 피난처라니 그리 피난을 가자는 등 근심스런 의논을 하시던 정경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우리 삼남매는 적 치하에 들어간 서울 청량리에 그냥 두고 온 할머니와 어머닌 어찌 되셨을까. 돌아 가셨을지도 몰라... 셋이서 새파란 벼 이삭이 바람에 파도처럼 넘실대는 논두렁을 이리저리 헤매어 다니면서 마주 보고 눈물짓던 정경에 지금도 마음이 울컥한다. 그 곳에 머무르는 것도 잠시 아버지는 우리를 대전으로 데려가 다시 복작거리는 기차 맨 뒷 칸에 태우고 대구로 피난을 떠나게 되었다.

(뒤에 안 일이지만 어머니는 돈을 빌려갔던 사람이 한국 돈으로 빌려간 돈을 갚아줘서 장독 속에 숨겨 놓고 그 난리중이지만 참으로 다행하게도 한약방에 약을 지어 먹고 완쾌 되어 계셨다.)

                                              2010년 6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