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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상륙 작전시 맥아더장군 - 6.25 전쟁 기록 전시장에서 찍어 옴)
         

             내가 겪은 6.25 동란 그후 이야기(후편)              청초 이용분 

시골 외갓집에서 대전까지는 족히 한 나절은 넘게 걸어야만 되는 거리다. 전시에 시골집에서 가수원 기차역, 서대전역 그리고 나서 대전역인데 대전역 까지는 어찌 왔는지 도통 기억에 없다.
어느 새  60여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고 이 문제에 대해서 그 후 전혀 생각을 안 해 왔기 때문이리라. 대전역 구내 복작거리는 프레트홈 위 기차의 가장 마지막 칸에 오르기 위해 우리는 이제나 저제나 하고 목을 길게 늘인 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타려는 기찻 간에 사람들이 무언가 나무 상자를 싣는 것을 한참 동안 기다려야만 되었다. 드디어 우리 네 식구는 간신히 문간 옆 마지막 끝 좌석에 옹색하게 끼어 앉을 수 있었다. 객차 안은 아수라장이다. 선반위에도 사람이 목을 잔뜩 숙이고 앉기는 예사, 통로 가운데도 피난 봇따리 짐이 쌓이고 그 위에 아이나 어른이 겹겹이 앉았다. 자기가 앉은 공간에 머리만 위로 하고 있으면 그게 일등석이다.

이런 기차를 탔다는 것에 대한 안도의 한숨을 돌리는 데 얼마 안 있자 기차는 대전역을 뒤로 하고 슬슬 떠나갔다. 우리가 왼쪽에 앉고 오른쪽 끝자리에 여자군인 소령 일행이 앉아 있다. 그때까지 여자 군인이 그렇게 높은 계급장을 단걸 본적이 없기 때문에 내 시선은 호기심에 그들에게 자주 머무르게 되었다. 그도 앞뒤 정황 짐작으로 (후에 안 일이지만 한국은행 금궤를 그날 싣고 간 게 아니었던가 짐작이 된다.) 그렇게 대전서도 정부는 서서히 후퇴를 했던 게 아니었나...

아무튼 우리는 대구에 무사히 도착을 하였다. 땅에 붙박이로 서 있는 우편 나르는 헌 기차간에 거처를 잡게 되었다. 바닥은 좁게 네모진 나무들로 울퉁불퉁하게 골이 지게 만들어서 불편한 곳이다. 어찌 그곳에서 지냈는지 기억이 없다. 행동도 제한적이라 기차가 오가는 걸 보는 것 말고는 끝에 동생을 돌보고 동생 둘하고 그냥 심심하게 하루하루를 지내게 되었다.

함께 기거하게 된 사람은 좀 마른 편에 바지저고리 입은 시골 사람 같은 내외인데 그들은 아이가 없었다. 런닝이나 속옷 빨래를 하면 그 난시에 그걸 접어서 꼭꼭 밟아서 널어 말려 입는 등 좀 까다롭고 남에게 곁을 안주는 사람들 같았다.
지내면서 차차 그 곳이 눈에 익자 근처에 군부대가 있어서 밥을 하는 것을 구경하게 되었다. 쌀을 한가마인지 더 되는지 큰 목욕탕 같은 무쇠 솥에 물을 붓고 삽으로 흙 파듯이 뒤집어 대강 씻어서 밥을 하는 게 신기했다.

묵은 쌀일 경우 쌀벌레도 종종 먹었다고 군에 갔던 사람들이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그때 쌀은 석발이 안 되었던 때인데 밥속에 섞인 그 돌맹이들은 또 어쨌을까...캬베츠를 숭숭 썰어서 국을 끓이는 데 옅은 고춧가루에 고기를 조금 넣었는지 어땠는지는 모르겠는데. 싱겁하고 들척지근한 게 정말 맛이 없었다.

그 후 알게 된 일이지만 대구는 분지라 유난히 기후가 덥다고 한다. 그런 대구 날씨 속에 그렇게 뜨겁고 지루한 여름날을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어느 날 한 밤중 새벽에 느닷없이 알수 없는 어디선가 박격포 탄이 몇 발인가 우리 쪽을 향해 '슈우웅 꽝' '슈우웅 꽝' 소리를 내면서 날아오는 게 아닌가.

그간 좀 잊고 있었던 일. 당장에 지금은 전쟁 중에 있다는 게 실감이 났다. 대구 근처 팔공산 빨갱이 게릴라 부대에서 우리 군 부대를 향해 쏜 것이라 한다. 누가 어떤 피해를 입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두살 백이 남동생 용덕이가 놀래서 눈동자가 이상하게 돌아갔다.

그 일이 있은 지 얼마 안 되어 아버지는 우리를 데리고 부산 행 기차에 올라타고 부산으로 다시 떠나갔다. 그때쯤 군인 침낭 백 냅색 정도로 짐은 불어 있어서 동생은 내가 업던지 걸려야만 되었다.

다시 거처를 정한 게 부산 거제리 피난민 수용소, 원래 용도가 무슨 건물이었는지 삼층쯤 되는 건물에 우리는 2층 조금 큰 방에 배정을 받았다. 한방에 세 가구가 함께 지나게 되었다. 사는 방법과 양상이 다른 세가구가 한방에 산다는 건 서로서로의 구경꺼리가 되며 지나야 되는 불편한 일상이었다.

막내 동생 용덕이는 붙잡고 다녀도 노상 길에서 잘도 넘어 졌다. 넘어지면 꼭 ‘엄마’ 하고 닭똥같은 눈물을 흘리며 울음보를 터뜨리면 달랠 길이 없다. 엄마를 찾는건 당연한 일인데도 그건 나에게 가장 마음을 아프게 하는 아킬레스건이다. 그럴때 마다 나도 복 받쳐 오르는 내 슬픔에 젖어 한없는 눈물을 함께 흘려야만 되었다.

바로 근처에 초등학교가 있었다. 나는 날만 새면 동생을 데리고 그곳에 갔다. 그곳에서는 매일 신병으로 뽑혀온 아저씨들이 제식훈련을 받는 구경을 할 수 있었다. 허름하고 때가 찌든 흰 바지 저고리에 진짜 시골에서 똥장군 지게를 지어 나르던 그대로 모습의 농삿군 티가 줄줄 흘렀다.

‘앞으로 가’하면 그들은 어째 오른발과 오른 손이 동시에 올라오기가 예사이다. 얼마나 어색하고 불편한 행동인가? 왜 보통 때 걷던 습관대로 하면 될 일이 그렇게 어려울까... 교관 구령에 맞추어‘앞으로 가’하다가 외부용 화장실 앞에 닿았다. 구령하는 교관이‘뒤로 돌아가.’했는데도 못 알아듣고는 방향 감각을 잊은 채 어쩔 줄 몰라 갈팡질팡 한다.

구령을 하던 교관이 답답해서인지 또는 장난 끼가 동해서인지 ‘그냥 문 열고 화장실로 들어가!!’ 하는 게 아닌가. 정말 안타깝기 짝이 없다. 나는 그간 남녀 공학인 부중에서 그런대로 수요일에 하던 전교 교련 조회에 익숙하던 터라 왜 그리 안 될까... 하고 안스럽기만 하다.

그 후에 안일이지만 이런 농삿군 출신 졸병들이 제대로 훈련도 못 받고 낙동강 전투에 투입되어 인간 방패 노릇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그 후 주욱 갖게 되었다.

어느 날인가 부터 철로길 건너편에 등어리에 P.O.W라는 페인트로 하얀 글자를 쓴 군복 차림의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한 채 두 채 늘어나는 국방색 천막과 더불어 그들의 숫자도 점점 늘어만 갔다. 전쟁 포로라 하던가. 그들의 얼굴을 어쩌다 가까이 서서 자세히 보니 모두 어린 소년들이 많이 섞여 있는 것 같았다. 전세는 차차 기울어 전라도는 이미 인민군 수중에 모두 함락되었다고 한다.  

인민군이 낙동강을 건너오는 날이면 잘못하면 부산에 있는 모든 피난민들과 함께 부산사람들 까지 모두가 부산 앞바다에 빠져 죽어야 될 것이라는 흉흉한 입소문이 공공연히 떠돌아 다녔다. 듣기에 따라서 바람결에 멀리 포성소리도 '쿵쿵' 들려오는 듯 했다. 하루하루가 불안한 하루였다.

그러는 중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을 하여서 일로 서울로 진입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 졌다. 9.28 서울 수복 때의 일이다. 물론 폭격기들은 서울 전 시가지에 융단폭격을 하여 서울 바닥은 모두 가루가 되어 살아남을 사람은 몇이 없을 것이라는 아주 비관적인 뉴스도 함께 접하게 되었다. 기쁜 것도 잠깐 우리 할머니와 어머니는 어찌 되셨을까... 자나 깨나 줄초상을 만난 기분이었다.

그런 와중에 아버지가 선발대로 서울에 먼저 입성을 하게 되셨다. 정말 마음이 옴질옴질하는 며칠이 지났다. 아버지가 돌아 오셨다. 입고 오신 내복 옷이나 양말 수건 등이 눈에 익은 우리 집 옷이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난리를 잘 치루고 무사하게 살아 계셨다. 어머니는 적 치하에서도 돈을 빌려갔던 사람이 고맙게도 한국 돈으로 돈을 갚아 주었다. 장독 속에 감추어 두고 그 난시에도 그 돈으로 한방치료를 받고 건강하게 잘 계시다고 전해 주셨다.

얼마 후 우리는 기차를 타고 귀향길에 오를 수 있었다. 전쟁 통에 자취도 없어진 역사(驛舍), 폭격으로 화산이 폭발 할 때처럼 깊은 구덩이와 수렁이 생긴 수많은 논밭들을 지나갔다. 포신의 방향을 잊은 채 반쯤 타다 남은 거대한 탱크, 망가진 채 행길 가에 나딩굴어져 있는 피아간의 군용 추럭등을 보며 전율을 느끼는 동시에 마른침을 꼴깍 생켜야만 되었다. 외길로 됐다가 복선이 되었다 하면서 겨우 복구된 철길 위를 천천히 달리는 열차를 타고 한강교를 건너고 있었다.

지난 번 비가 내리던 여름 날 밤에 느닷없이 폭파를 당해 처참하게 부서져 끊긴 채 그 참상 그대로 있는 한강교를 보며 온몸이 오싹하여 짐을 느꼈다. 그날 밤 얼마나 많은 선량한 시민이 불시에 어찌된 영문도 모르고 한강에 빠져서 억울한 생죽음을 마지 했었을까...

생각하면 불과 3개월 만에 도처에 생긴 전쟁의 상혼이 전쟁터의 막판 전시장처럼 적나라하게 널려 있는 페허들을 지나 수복된 서울에 돌아 왔다. 그렇게도 그리던 집으로 돌아 왔다.

꿈속에서도 오매불망 그립고 보고 싶던 할머니와 어머니를 와락 부여잡고 그 따뜻한 품에 안겨 우리는 오랜만에 정말 반갑고 눈물겨운 가족 상봉을 할 수 있었다.                                      
                                                  2010년 6월 26일



▲ 1951. 4. 3. 강대국이 그어놓은 원한의 38선. 이 38선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살아왔던가.

  
                      (거제리 포로수용소)


                  ( 소년포로)


                      (전쟁 포로들)





                            


                            
             (금궤를 나르던 여자 군인...최근 6.25특집 중에 나온 화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