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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성황후생가터 방문기                           청초  

    아침 일찍 탄천가에 운동을 한 후 돌아오니 지난 밤 우리 집에 와서 잔 큰아들이
    “어머니 오늘은 경기도 여주지역에 있는‘명성황후 생가 터’에도 가보고 여주이천쌀밥 점심을
    들러 드라이브를 가보자" 제안한다.
    지난번 박경리의‘토지’의 평사리를 다녀 온 후 부진한 나의 글쓰기의 자료를 마련해 주려는
    배려에서인것 같다. 무료하던중 뛸듯이 기쁜 마음이다. 늦은 아침을 먹고 좀 쉬었다가
    11시쯤 큰아들의 차를 타고 길을 나섰다.

    날씨는 쾌청이다. 애쓸것도 없이 네비케이션이 지시하는대로 달린다. 힘들 때쯤 휴게소에
    들려 평소에는 쉽게 먹어 보지 못한 비싼 커피에 호두과자를 사서 함께 먹는 맛이란...
    달콤한 호두과자에 쌉싸름한 커피 맛이 어울려 일미이다. 벌써 이만하면 방콕한 것 보다는
    길을 나서기를 잘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차를 달리며 보니 전에 딸이 운전하여 남편도 함께 이천도요지에 찾아 왔던 생각이 떠오르는데
    왜 그때는 이곳을 몰랐을까...아들 내외가 다녀와서 보니 아들이 어머니를 모시고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명성황후기념관은 역시 일본 낭인들에게 시해를 당한 비극적인 역사로 인해 분위기가 조금은
    음울하고 기분도 숙연해 진다. 이조 말 열강들의 세력 각축전에 휘말려 일국의 왕이자 지존인
    고종왕의 왕비가 비극적인 최후를 맞게 된다.
    그 후 국장을
    치루는 모습 등 1926년대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벌써 백년이 가까운 세월이 지났슴에 도
    불구하고 엊그제 일처럼 상세하게 사진기록물로 남아 사실감을 더한다.

    물론 모조품이긴
    하지만 민비를 시해할 때 쓰였던 칼이라는데 그 서릿발처럼 날카로운 칼날에 몸서리가 쳐진다.
    그 후로 이를 사과하기 위해 왔던 일본 방문단이 무릎을 끓은 사진과 사과문에 서명한 먹물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이렇게 명명백백한 증거가 확실한 역사적 사실들을
    왜곡하는 뻔뻔한 그들을 보며 분노와 한탄이 저럴로 나오는 것을 금치 못하겠다.

    남겨진 어진과 고종 순종의 어필인 그 분들의 손길이 생전인듯 생각이 든다. 명성황후의
    글씨도 남아 있는데 서투른 글씨 솜씨 속에서도 그의 강직한 성품이 보인다고 평해지고 있다.

    대원군이 자기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위해 아주 한미한 집안의 규수인 민씨를 며느리로 들였다가
    오히려 명성황후시해 사건후 이로 인해 아관파천을 당하며 곤욕을 치르는 역사적 사실이
    흥미로웠다.
    (1896년 2월 11일에 친러세력과 러시아공사가 공모하여 비밀리에 고종을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긴
    사건. 일명 노관파천(露館播遷)이라고도 한다. 아관은 러시아공사관을 말하며 정동에 위치 하였다.)  

    일설 명성황후는 조선의 국모이자 일본인에게 시해당한 황후다. 드라마와 영화로도 만들어
    지고 뮤지컬로까지 만들어졌다. 그리고 사람들이 명성황후가 일본에게 저항하다가 시해
    당한걸로 기억을 하고 있지만 그게 사실일까. 명성황후가 시해를 당한 이유는 민비 자신의
    정권유지를 위해서 외세의 세력을 끌어오다가 일본세력과 마찰이 생겨서 살해를 당했다 한다.
    이상[출처] 명성황후대해여 (네이버에서 참조) 
    역사학자들도 의견이 엇갈린다니 진실이 무엇일지... 



    안내문과 같이 명성황후에 대해 전혀 또다른 주장이 있으니 그 시절을 살지않은 우리로선
    그를 올바르게 판단할 능력이 가질수가 없어 답답하기만 합니다. 상세한 사실을 알길이 없어 네이버에서 참조한 기사가 틀린것이길 바라면서 이 안내지를 거듭 올립니다.
    (사진에 클릭을 하면 글씨가 좀 크게 보입니다.)

    명성황후는 이조말 첨정(僉正) 민치록(閔致祿)의 딸로 1851년 철종 구년 구월 십구일 감고당(感古堂)에서 태어났다. 아명은 민자영(閔慈英)이다. 부친 민치록(閔致祿)은 살아 있을 때 과천(果川) 현감(縣監)을 거쳐 장악원(掌樂院)의 첨정을 지낸 인물이다.
    민자영 규수는 대원군 부인의 먼친척 12촌 자매 항렬로 부친도 오라비도 없는 혈혈단신 고독한 어린시절을 보내다가 대원군의 며느리로 고종의 왕후로 간택 되었다.
    (역대 왕비열전 韓龍煥著)에서 참조 )

    기념관 관람을 한 후 그의 생가 터를 찾아들었다. 대부분의 민속박물관이 그러하듯 별다른
    흔적을 찾을 수는 없다.그녀가 태어나서 8년간 어린시절을 그곳에 살았다 한다. 그의 거처라고
    칭한 자그마한 방안에 묵화로 그린 병풍이 놓여 있어 그게 어린 민비가 거처하던 방인가
    짐작을 했다.

    한미한 환경에서 자라다가 어느날 불시에 일국의 국모로 추대되어 온갖 영욕을 겪은 민비의
    어린 시절을 상상해 보았다. 기념관 앞 정원의 연못속의 잉어들은 영문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유히 먹이를 탐하고 있다. 생가 터 뜨락 한구석 네모난 빈터에 잡초 속에 피어난 민들레꽃
    홀씨들이 이제 바람만 불면 날아가리라 벼루고 있다. 인간의 흥망성쇄의 한 단면을 보는듯
    허무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명성황후 생가 터를 방문한 후 근처 한정식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음식점에 들어서 자리에
    앉으니 어인 파리 한마리가 앵앵거리며 날아다녀 신경을 거스린다. 주인에게 말을 하니
    듣는 등 마는 등 그 파리 한 마리는 식사를 다 끝내고 나올 때까지 여전히 날아다니고 있었다.
    혹시 그 집에서 키우는 애완 파리였나....?

    **(사진에 대고 손바닥을 두번 클릭하면 모든 사진의 글씨가 잘보입니다.)
    2014.6.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