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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혜화동 우거에서 지낼 때였다. 어느날 바카스의 후예들인지 劉怜(유영)의 직손들인지는 몰라도 酒道(주도)의 명인들인 공초(空超 吳相淳).성재(誠齋 李寬求),횡보(橫步 廉相涉), 3酒仙(주선)이 내방하였다. 설사 주인이 불주객 이란대도 이런 경우를 당하여서는 별 도리가 없었을 것은 거의 상식문제인데, 주인이랍시는 나 역시 술 마시기로는 결코 그들에게 낙후되지 않는 처지로 그야말로 불가무일배주(不可無一杯酒)였다. 허나 딱한 노릇은 네 사람의 주머니를 다 털어도 불과 수 삼원, 그때 수 삼원이면 보통 주객인 경우에는 3, 4인이 해갈은 함즉하였으나 우리들 무리 4인에 한하여서는 그런 금액쯤은 有不如無(유불여무)였다. 나는 아무리 하여도 별로 시원한 책략이 없어 궁하면 통한다는 원리와는 다르다 해도 하나의 악지혜(기실 악은 없지만)를 안출하였다. 동네의 아무개 집 사동 하나를 불러다가 몇 자 적어 花洞(화동) 납작집에 있는 동아일보사로 보냈다. 당시 동아일보사의 편집국장은 故(고) 고하(古下 宋鎭禹)였는데 편지 사연은 물을 것도 없이 술값 때문이었다. 좋은 기고를 하여 줄 터이니 50원만 보내 달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아이를 보내 놓고도 거절을 당하든지 하면 어쩌나 마음이 여간 조이지 않았다. 10분, 20분, 30분, 한 시간, 참으로 지리한 시간의 경과였다. 마침내 보냈던 아이가 손에 답장을 들고 오는데 무리 4인의 시선은 약속이나 한 것 같이 한군데로 집중되었다. 直覺(직각)도 직각이지만 봉투모양만 보아도 빈 것은 아니었다. 급하게 뜯어보니 바라던대로, 아니 所請(소청)대로의 50원, 寓話(우화) 중의 업오리 금알 낳듯 하였다. 이제부터 이 50원을 어떻게 유효적절하게 쓰느냐는 공론이었다. 그때만 해도 50원이면 거금이라 아무리 우리 넷이 술을 잘 먹는대도 선술집에 가서는 도저히 費盡(비진)시킬 수 없었던 반면에, 낮부터 요정에를 가서 서둘다가는 안심이 안 될 정도였다. 끝끝내 지혜(선악간에)의 공급자는 나로서 나는 야유를 제의하였다. 일기도 좋고 하니 술 말이나 사고 고기 근이나 사가지고 지척인 사발정 약수터(성균관 뒤)로 가자 하니 일동이 좋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우리 일행은 명륜동에 있는 통신중학관(故 姜相熙 군이 경영하던)으로 가서 그곳 하인 魚書房(어서방)을 불러내어 이리저리하라. 만사를 遺漏(유루)없이 분부하였다. 우리는 참으로 하늘에나 오를 듯 유쾌하였다. 우아하게 경사진 잔디밭 위에 둘러앉았는데 어서방은 술심부름, 안주 장만에 혼자서 바빴다. 술은 소주였는데 우선 한 말을 올려다 놓고 안주는 별것 없이 남비에 고기(牛肉)을 끊였다. 참으로 그날에 한하여서는 快飮(쾌음), 豪飮(호음)하였다. 客談(객담). 古談(고담). 弄談(농담). 痴談(치담) 文學談(문학담)을 순서없이 지껄이며 권커니 잣커니 마셨다. 이야기도 길고 술도 길었다. 이러한 복스런 시간이 길이 계속되기를 빌며 마셨다. 그러나 好事多魔(호사다마)랄까, 고금 무류의 대기록을 우리 4인으로 하여 만들게 할 天意(천의)랄까, 하여간 국면이 일변되는 사태가 의외에 발생하였다. 그때까지는 쪽빛같이 푸르고 맑던 하늘에 난데없는 검은 구름 한 장이 떠돌더니, 그 구름이 삽시간에 커지고 퍼져 온 하늘을 덮으며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그야말로 油然作雲(유연작운), 滯然下雨(체연하우) 바로 그대였다. 처음에 우리는 비를 피하여 볼 생각도 하였지만 인가 하나 없는 한데이고, 비는 호세있게 내리어 속수무책으로 살이 보일 지경으로 흠뻑 맞았다. 우리는 비록 쪼루루 비두루마기를 하였을망정 그때의 山中驟雨(산중취우)의 그 장경은 筆舌難記(필설난기)였다. 우리 4인은 不期而同(불기이동)으로 만세를 고참하였다. 그 끝에 공초 善知識(선지식)이 공초식 발언을 하였다. 참으로 기상천외의 발언이었던 바, 다름 아니라 우리의 옷을 모두 찢어버리자는 것이었다. 옷이란 워낙 대자연과 인간 두 사이의 離間之物(이간지물)인 이상, 몸에 걸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럴 듯도 한 말이었다. 공초는 주저주저하는 나머지 3인에게 시범을 보여주듯이 먼저 옷을 찢어 버렸다. 남은 사람들도 천질이 그다지 비겁치는 아니하여 이에 호응하였다. 대취한 4稞漢(과한)들이 狂歌亂無(광가난무)하였다. 서양에 Bacch-analian orgy(바커식 躁亂이란 뜻)란 말이 있으나 아무리 狂躁(광조)한 주연이라 해도 이에 비하여서는 不及(불급)이 遠矣(원의)일 것이다. 우리는 어느덧 언덕 아래 소나무 그루에 소 몇필이 매여 있음을 발견하였다. 이번에는 누구의 발언이거나 제의였던지 이제 와서 기억이 미상하나 우리는 소를 잡아타자는데 일치하였다. 옛날에 甯戚(영척)이나 소를 탔다고 하지만 그까짓 영척이란 놈이 다 무엇이냐, 그 따위 것도 소를 탔는데 우린들 못탈 바 어디있느냐는 것이 곧 논리이자 동시에 聲勢(성세)였다. 하여간 우리는 몸에 일사불착한 상태로 그 소들을 잡아타고 유유히 비탈길을 내리고 똘물(소나기로 해서 갑자기 생긴)을 건너고 孔子(공자) 모신 성균관을 지나서 큰 거리까지 진출하였다가 큰 봉변 끝에 壯圖(장도-시중까지 오려던 일)는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