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齋晩筆](10-2) 隱退生活 14 年의 回顧 (하)

by 심영보 posted Apr 12, 2018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隱退生活 14 年의 回顧 (하)
                                                                                   심   영   보


O 내 나라 내 歷史를 다시 돌아보다

세상 구경에 나서서 한(限)도 한(恨)도 없이 두루 섭렵하는 틈틈이 가까운 내나라 방방곡곡을 살피는 여행은 덤에 가까운 일이었다.
대개가 당일치기 아니면 2~3일짜리여서 크게 체력적 부담도 없었고, 먹고 자고 두루 구경하는 일이 평상생활의 연장 같았을 뿐이다. 우리 말, 우리 풍속대로 보고 듣고 살피는 일은 모든 것이 즐거움 그 자체였다.
여행 떠나기 전에 목적지에 대한 자료를 미리 살피는 일은 기본이다.
이것은 해외여행의 경우에는 여행경비를 생각해서라도 당연히 그렇게 하지만 국내여행이라고 해서 가벼운 것은 결코 아니다. 가서 보면 미리 ‘공부한 것만큼 보인다.’는 선험자의 말이 백 번 옳다.

그런 덕분에 소싯적에 소홀히 배웠거나 이미 다 잊어버린 우리의 역사를 두 번 세 번 다시 듣다보면 귀에 익어서라도 조금은 남는 게 있다.
덕수궁에 가면 대한제국과 고종황제의 수난의 역사를, 창경궁에 가면 영조-사도세자-정조에 이르는 비극의 역사를 배우고, 강진 다산초당에서 정약용의 일생을, 그리고 흑산도에서 자산어보의 정약전의 행적을 듣다 보면 우리나라 가톨릭교의 박해의 역사 일부도 알게 된다.
철원이나, 도라산, 연천, 양구 등의 안보(安保)관광을 통해 우리가 처한 분단 조국의 아픔을 되새기고, 역대 대통령 등 선현들의 생가, 기념관, 고택(古宅) 등과 전국에 산재한 여러 분야의 산업시설들을 둘러보며 우리의 근현대사를 다시 조명하게 된다.
몇 년 만에 한 번씩 한국을 찾는 사람들이 올 때마다 괄목하게 발전하는 조국의 모습에 감탄하지만 그들이 아니더라도 여기 사는 우리들조차 날로 변모하는 우리 주위의 모습에 스스로 깜짝깜짝 놀라기는 마찬가지이다. 지방자치제도의 도입 이래 모든 지방의 방백들이 경쟁적으로 그들의 지역을 개발하고 가꾸는데 매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우리 동기회의 문화탐방 모임인 ‘보름회’가 매월 1 회씩 전국을 답사 다니기 시작한지 어언 8년이 넘어 금년 9 월이면 100 회째를 맞는다. 이 모임은 그동안 계속해서 부부동반 모임으로 진행해 왔기 때문에 10 명 전후의 동기생들의 가화(家和)와 교우(交友)도 함께 도모하고 있는 셈이다.
이제는 너나 나나 나이가 점점 더 들면서 먼 곳을 찾는 걸 버거워 하고 있어서 서울 가까운 곳을 중심으로 행선지를 짜고 있지만 아직도 우리가 탐방할 만한 데는 수도 없이 많다.  마음만 있다면 소재는 고갈되지 않을 것이고 우리의 건강은 노익장이 될 것이다. 나는 매월 이 ‘보름회’ 행사를 주관하면서 회원들 덕에 ‘치매 예방약’을 공짜로 얻어먹고 있다고 치부하고 있다.

    
O 文化生活을 즐기다

내가 은퇴하자마자 주거를 옮긴 곳이 혜화동 로터리 근처라는 얘기는 이미 언급한 바이다.  은퇴한 사람이 주거를 옮겼다 하면 당연히 ‘교외의 조용하고 공기 맑은 곳으로’ 이거늘 당신은 어찌하여 더 시끄럽고 공기 탁한 시내 쪽으로 왔는가? 고 묻는 이가 많았다. 나는 ‘그동안 일에 쪼들려 접근하기 어려웠던 문화생활을 맘껏 즐기고 싶어서’ 라고 한 마디로 대답하였다.
혜화동 로터리로부터 이화동 4거리에 이르는 “대학로”는 그 주위에 그 때 이미 150여 개의 연극 공연장(대소극장)이 있는 문화의 거리였다.
먹거리 볼거리 감상할 거리가 철철 넘치게 널려 있었다. 도심에 가까우면서도 4통8달의 교통요지여서 대중교통수단이 자유로우니 금상첨화였다.
신문 문화면을 장식하는 행사 소개 중 내가 관심 있는 사항은 의례히 스크랩해서 챙기는 일이 기본이었다.

연극공연, 마당놀이, 국악공연, 뮤지컬공연, 오페라, 음악콘서트, 음악회,
미술전이나 서예전을 비롯한 각종 전시회, 공사립 박물관 미술관의 기획전, 상설전, 그리고 가장 손쉽고 값싸게 볼 수 있는 영화관람 ...
어찌 보면 무모하게 닥치는 대로 섭렵했다는 말이 옳을 것이다.
소양도 소질도 경력도 미약한 주제에 한 달이면 두 손으로 꼽아야 할 만큼 또는 그 이상을 찾아 다녔으니 무모했다 해도 할 수 없다.
많은 부분은 듣고 보는 즐거움에 취해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감상했고, 또 어떤 부분은 <특히 음악과 미술 부문은> 어두운 귀와 눈에게 기회를 자꾸 주면 식견이 좀 트일까 해서 더 자주 접근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즐거움도 노화(老化)가 야멸치게 방해하기 시작했다.
시력과 청력이 점점 떨어지다 보니 안경에 의존하게 되거나 무대 가까운 좌석을 선호하게 되었고, 그 마저 차차 번거로워 지면서 자막 뚜렷하고 음향 성능 좋은 영화관을 즐겨 찾는 것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특히 요즈막에 등장한 ‘영화로 만든 Met Opera’등은 매우 매력적인 소재가 되고 있다.
주위 사람 중에 한 해에 영화 한 편 보기도 어렵다는 이가 가끔 있는데, 나는 이런 사람들도 영화 관람의 즐거움을 발견하고 아주 작은 돈으로도 행복한 시간을 누릴 수 있음을 알게 되기를 바란다.
    

O 스포츠에 빠지다

은퇴할 무렵의 나의 스포츠는 골프였다. 그러나 이 운동은 시간, 돈, 짝짓기, 부킹 등의 제약조건이 많아 나의 스포츠로 내세우기는 빈약한 점이 많다. 월 1 회의 동기회골프모임이 기본이었으니까.
그 때는 오히려 주말이나 일정이 맞는 주중 저녁에‘잠실야구장’이나 ‘목동야구장’으로 ‘KBO야구’를 보러 가거나, TV가 생중계하는 각종 스포츠 프로그램을 즐기는 시간이 많았다고 할 수 있다.

이 무렵 내가 스스로의 운동이라고 즐긴 게 있다면 그건 “걷기”라고 할 수 있다. 국내외의 여행 역시 넓은 의미의 ‘걷기’가 포함된 것이려니와 그 말고도 나는(대개 부부동반) 높지 않은 근교 산행(山行)과 다소 평탄한 보행로(步行路) 걷기를 즐겼다.
근년에 이르러 공공 단체가 시설한 ‘북한산 둘레길’‘도봉산 둘레길’‘인왕산 자락길’ ‘한양도성 둘레길’ ‘남산 순환도로’‘제주 올레길’등 전국 어디에나 마련되어 있는 “걷기 길”은 나의 선호 보행로 였다.
그 때부터 시작한 나의 ‘만보계(萬步計)’측정 버릇은 지금까지도 이어져서 내가 기록을 시작한 최근 6~7년간의 연평균(年平均) 보행수가 [하루 6천 보]를 웃돌고 있다.

그러나 내가 요즘 와서 진짜 빠진 스포츠는 “당구(撞球, Billiard)”이다. 우연한 기회에 큐(cue, 당구봉)를 잡기 시작한 것이 6 년 전인데 이제는 우리 동기생 두 사람(이재흥, 조일균) 까지 끌어들여 함께 즐기고 있다.
내가 “세상에 당구가 이렇게 재미있는 스포츠인 줄을 처음 알았다”고 외쳤을 만큼 푹 빠져 있다. 친구들과의 게임매치가 정기적으로 주 2 회, 그러니까 한 달이면 8~9 번을, 매 번 3~4 시간씩 함께 어울리는데 주위 사람들이 우리의 노익장을 부러워할 정도 이다.
나는 우리 팀 4 명 중에서도 가장 늦둥이어서 그 기량을 따라잡겠다고 따로 월 5~6 회의 독학 연습을 몰래 더 하고 있다. 그리고 ‘Billiard TV’(이게 세계 최초유일의 당구 채널이란다.)를 틈만 있으면 켜놓고 보고 있어서 그 좋아하던 ‘MLB 야구채널’이며 ‘KBO 야구채널’ 그리고 ‘바둑채널’이 수시로 밀려나고 있는 형편이다.


O 빚진 마음을 奉仕와 寄附로 조금은 덜다

이렇듯 은퇴 이후의 생활이 무노동(無勞動) 향락에 빠지다 보니 애초에 Bucket List에 올려놓았던 이런저런 봉사활동 계획은 어쩔 수 없이 밀려 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내가 꿈꾸었던 봉사가 특별한 자격을 전제로 하는 경우가 있어 접근조차 못한 것도 있지만, 정작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또 그 ‘정기적인 시간배정’요구를 내가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내가 은퇴 이후에도 대학 동창회 일이나 동기동창회의 궂은일을 마다 않고 거들고 있는 것이나, 그 밖에도 여러 작은 모임의 심부름꾼을 자처하고 돕는 것 역시 넓은 의미에서의 봉사라고는 생각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나의 공짜 ‘치매예방약’복용 일뿐 진정한 의미의 봉사라고 하기는 어렵다 하겠다.

나는 나의 오늘이 있게 한 ‘하늘의 은총(恩寵)’에 대해 번듯한 봉사(奉仕)로써 갚지 못하는 아쉬움을 무엇으로 대체할 것인가? 를  스스로 묻고 또 물었다. 그리고 많은 고민 끝에 내 자신과 이렇게 타협 하였다.
“대체할 수 있는 일은 결코 아니지만, 다만 얼마가 되건 내가 앞으로 쓰는 돈을 줄이고 아껴서 그만큼을 사회에 더 기부하는 것으로 갚자.”
마침내 내 분수에 맞는 목표치를 정하고 월납으로 나누어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년 전, 드디어 9 년 만에 그 목표치에 도달 했다.
물론 이 이전부터 이행해 오던 크고 작은 다른 몇 건의 기부행위는 지금 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는데 이렇게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준 신(神)의 섭리(攝理)에 나는 감사할 따름이다. (하  끝)   (2016. 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