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0회’ “사랑방일오회” 스켓치
심 영 보
제15회동기회(※서울대의대)가 진행해 오고 있는 ‘월례테마토론모임’ “사랑방일오회”의 ‘제70회’ 모임(‘17.10.28.)을 스케치 합니다.
이날의 화두(話頭)는
“병자호란<역사> &/or 남한산성<영화,연극,드라마,소설,희곡 등>을 보며 국가지도자의 위상을 다시 생각해 본다.”였습니다.
예고된 화두를 보고, 부지런한 회원은 한창 상영 중인 영화 [남한산성]을 보고 와서 그 요약을 동창회 홈피 [15홈]에 미리 올린이<東洲>도 있고, 모임 당일에 [병자호란]에 관한 자료를 준비해 와서 나눠주고 간이해설을 해준 이<茶渼岸>도 있었습니다.
이날 참석한 14 명의 회원이 돌아가며 피력한 여러 의견들을 몇 대목으로 묶습니다.
(1)인조(仁祖)가 선대왕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뒤 그와 반정을 도모한 서인(西人)무리들에게 끌려 다니느라 국제정세를 챙길 겨를도 없었고, 하물며 대청(大淸)의 군사력에 밀려 작은 성 ‘남한산성’ 안에 갇혀서도 주화파 · 척화파의 싸움에 좌고우면하면서 우유부단한 행태를 보인 모습에서 나라와 백성의 안위에 앞서 스스로의 구명에 급급해 하는 국가영도자의 모습을 보고 개탄을 금치 못하더라.
(2)인조(仁祖)가 남한산성에서 내린 최후의 결정은 결국 주화파의 주장대로 엄청난 치욕을 안고라도 스스로의 목숨과 국민 생명을 살린 것인데, 이는 오늘날의 국정운영자가 주적에게 ‘대화’를 제의한 것에 비유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무리도 있다는 말에, 그래서 두 나라간의 관계가 형제(兄弟)의 관계에서 군신(君臣)의 관계로 바뀌고 당시의 백성 총인구 약 1천만 명 중에서 60만 명(약 5~6%)이 포로로 끌려가서 노예생활을 하다가 이국땅의 원혼이 되었음을 상기 시키더라.
(3)인조(仁祖)가 신하의 복장으로 송파 삼전도(三田渡) 혹한의 벌판에 나아가 청태종(淸太宗)의 발아래 엎드려 구고두삼배(九叩頭三拜) 하며, 군신관계 수용, 명나라와의 단교 및 침공지원, 왕자인질, 백성포로 등의 굴욕적 조건을 감수하는 모습이 담긴 부조(浮彫)와 그 증거로서의 ‘삼전도비(三田渡碑)’를 오늘날의 잠실 석촌호수 가로 찾아가 본 우리 동기회 문화답사모임 “보름회”의 회원들이 그 때의 기억을 떠 올리며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역사를 마주하는 참담했던 심정을 토로하더라.
(4)이와 같은 지난날의 비참했던 우리 역사와, 오늘날의 ‘보복이 보복을 낳고 관을 들춰내 북 뚜드리며 참시(斬屍)’하는 모습을 겹쳐 보면서, “역사를 되새기지 않는 자에게 그와 같은 역사는 반드시 반복한다.”는 만고의 진리를 일깨우더라. 끝.
(‘17. 11. 10.)
심 영 보
제15회동기회(※서울대의대)가 진행해 오고 있는 ‘월례테마토론모임’ “사랑방일오회”의 ‘제70회’ 모임(‘17.10.28.)을 스케치 합니다.
이날의 화두(話頭)는
“병자호란<역사> &/or 남한산성<영화,연극,드라마,소설,희곡 등>을 보며 국가지도자의 위상을 다시 생각해 본다.”였습니다.
예고된 화두를 보고, 부지런한 회원은 한창 상영 중인 영화 [남한산성]을 보고 와서 그 요약을 동창회 홈피 [15홈]에 미리 올린이<東洲>도 있고, 모임 당일에 [병자호란]에 관한 자료를 준비해 와서 나눠주고 간이해설을 해준 이<茶渼岸>도 있었습니다.
이날 참석한 14 명의 회원이 돌아가며 피력한 여러 의견들을 몇 대목으로 묶습니다.
(1)인조(仁祖)가 선대왕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뒤 그와 반정을 도모한 서인(西人)무리들에게 끌려 다니느라 국제정세를 챙길 겨를도 없었고, 하물며 대청(大淸)의 군사력에 밀려 작은 성 ‘남한산성’ 안에 갇혀서도 주화파 · 척화파의 싸움에 좌고우면하면서 우유부단한 행태를 보인 모습에서 나라와 백성의 안위에 앞서 스스로의 구명에 급급해 하는 국가영도자의 모습을 보고 개탄을 금치 못하더라.
(2)인조(仁祖)가 남한산성에서 내린 최후의 결정은 결국 주화파의 주장대로 엄청난 치욕을 안고라도 스스로의 목숨과 국민 생명을 살린 것인데, 이는 오늘날의 국정운영자가 주적에게 ‘대화’를 제의한 것에 비유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무리도 있다는 말에, 그래서 두 나라간의 관계가 형제(兄弟)의 관계에서 군신(君臣)의 관계로 바뀌고 당시의 백성 총인구 약 1천만 명 중에서 60만 명(약 5~6%)이 포로로 끌려가서 노예생활을 하다가 이국땅의 원혼이 되었음을 상기 시키더라.
(3)인조(仁祖)가 신하의 복장으로 송파 삼전도(三田渡) 혹한의 벌판에 나아가 청태종(淸太宗)의 발아래 엎드려 구고두삼배(九叩頭三拜) 하며, 군신관계 수용, 명나라와의 단교 및 침공지원, 왕자인질, 백성포로 등의 굴욕적 조건을 감수하는 모습이 담긴 부조(浮彫)와 그 증거로서의 ‘삼전도비(三田渡碑)’를 오늘날의 잠실 석촌호수 가로 찾아가 본 우리 동기회 문화답사모임 “보름회”의 회원들이 그 때의 기억을 떠 올리며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역사를 마주하는 참담했던 심정을 토로하더라.
(4)이와 같은 지난날의 비참했던 우리 역사와, 오늘날의 ‘보복이 보복을 낳고 관을 들춰내 북 뚜드리며 참시(斬屍)’하는 모습을 겹쳐 보면서, “역사를 되새기지 않는 자에게 그와 같은 역사는 반드시 반복한다.”는 만고의 진리를 일깨우더라. 끝.
(‘17. 11.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