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이끈 두 글귀
심 영 보
*‘세 살쩍 버릇이 여든 까지 간다.’는 우리나라 속담이 있다.
내가 이제 여든 살을 넘어서 뒤돌아보니 내가 어릴 쩍 부터 가졌던 버릇이나 생각
그리고 그 무렵에 뇌리에 새겨진 어떤 글귀가 사실상 나의 평생을 좌우 해 왔음을
깨닫고 새삼스레 놀란다.
나는 중학교 2학년 14 살 때 6·25 한국전쟁을 만났고 그때 우리 가족 일행은
대전(大田)으로 피난을 가서 거기서 2 년 가까이 살았다. 그동안 그곳 중학교의
3학년 청강생(聽講生) 반(班)에서 나머지 중학교과정을 마쳤다.
내가 지금 말하려는 두 개의 글귀는 공교롭게도 모두 이 청강생반에서 공부하는
동안에 접한 것들이고 그 게 지금까지도 내 머리에 새겨져 있을 뿐만 아니라 알게
모르게 내 평생의 버릇과 생각을 이끌어 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아마 그때의 환경과 형편이 크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두 글귀중의 하나는 그때의 3학년 한문(漢文)교과서에 실린 ‘민농(憫農)’이라는
제목의 한사(漢詩)이다.
우선 이 한시부터 감상해 보자.
憫 農 <농민을 어여삐 여김>
鋤禾日當午(서화일당오) 한 낮 땅 볕 아래 논매기하니
汗滴禾下土(한적화하토) 땀방울이 뚜욱 뚜욱 ...
誰知盤中飱(수지반중손) 뉘라서 알랴 소반 위의 밥
粒粒皆辛苦(입입개신고) 알알이 모두 신고의 열매인 걸
※이 시를 지은이가 중국 당(唐)나라 때에 재상을 지낸 시인 ‘이신(李紳)’(772-846)
이라는 것은 근래에 와서 다시 확인한 것이고 번역 역시 근래의 필자 소작이다.
내가 밥상을 대할 때마다 상에 오른 곡식과 채소에서 농민의 땀방울을 떠올리며
먹던 음식을 함부로 남기거나 버리지 못하는 버릇이 이날 이때 까지 몸에 배어있는
것이 이 한시의 글귀 때문이 아니고 무엇이랴.
*다른 하나의 글귀는 “God does everything for our good.” (신은 우리가 잘되게
하기 위해서 모든 일을 하신다.)이다.
이것은 영어(英語)교과서에 실린 한 토막 이야기 글의 제목으로 내용은 사자성어
(四字成語) ‘새옹지마(塞翁之馬)’에 비유할 수 있는 ‘어떤 불행한 일도 다행한 일도
그 결과는 반대로 바뀔 수도 있다’는 취지의 이야기인데, ‘신(神, God)의 섭리(攝理)’를
강조하는 다분히 종교적인 의미가 내포된 글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평생을 사는 동안 많은 선악(善惡)과 취사선택(取捨選擇)의 일에 마주했을 때,
만사가 ‘신의 섭리’로 이루어진다는 어쩌면 매우 운명론적(運命論的)인 대응을
수없이 해 왔음을 돌아보며 이 역시 내 몸에 배어 있던 글귀임을 깨닫는다.
‘신(神)의 섭리(攝理)’...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마음대로 될 수 없는 영역이 있고 또 아무리 잘 하려고
애써도 당신의 힘만으로는 닿을 수 없는 경지가 있음을 인정한다는 것은,
곧 세상의 만사를 긍정적(肯定的)으로 바라보고 만사에 낙천적(樂天的)인
기대를 갖고 산다는 것으로 매우 건강한 생활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남보다 다소 일찍 본업에서 손을 떼고 은퇴(隱退)할 때 주위에서 염려해 주던
것이 주로 ‘남은 긴 여생(餘生)’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이었는데, 나는 이 물음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God does everything for our good.’이라고 믿으니까. (‘18. 5. .) 끝.
심 영 보
*‘세 살쩍 버릇이 여든 까지 간다.’는 우리나라 속담이 있다.
내가 이제 여든 살을 넘어서 뒤돌아보니 내가 어릴 쩍 부터 가졌던 버릇이나 생각
그리고 그 무렵에 뇌리에 새겨진 어떤 글귀가 사실상 나의 평생을 좌우 해 왔음을
깨닫고 새삼스레 놀란다.
나는 중학교 2학년 14 살 때 6·25 한국전쟁을 만났고 그때 우리 가족 일행은
대전(大田)으로 피난을 가서 거기서 2 년 가까이 살았다. 그동안 그곳 중학교의
3학년 청강생(聽講生) 반(班)에서 나머지 중학교과정을 마쳤다.
내가 지금 말하려는 두 개의 글귀는 공교롭게도 모두 이 청강생반에서 공부하는
동안에 접한 것들이고 그 게 지금까지도 내 머리에 새겨져 있을 뿐만 아니라 알게
모르게 내 평생의 버릇과 생각을 이끌어 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아마 그때의 환경과 형편이 크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두 글귀중의 하나는 그때의 3학년 한문(漢文)교과서에 실린 ‘민농(憫農)’이라는
제목의 한사(漢詩)이다.
우선 이 한시부터 감상해 보자.
憫 農 <농민을 어여삐 여김>
鋤禾日當午(서화일당오) 한 낮 땅 볕 아래 논매기하니
汗滴禾下土(한적화하토) 땀방울이 뚜욱 뚜욱 ...
誰知盤中飱(수지반중손) 뉘라서 알랴 소반 위의 밥
粒粒皆辛苦(입입개신고) 알알이 모두 신고의 열매인 걸
※이 시를 지은이가 중국 당(唐)나라 때에 재상을 지낸 시인 ‘이신(李紳)’(772-846)
이라는 것은 근래에 와서 다시 확인한 것이고 번역 역시 근래의 필자 소작이다.
내가 밥상을 대할 때마다 상에 오른 곡식과 채소에서 농민의 땀방울을 떠올리며
먹던 음식을 함부로 남기거나 버리지 못하는 버릇이 이날 이때 까지 몸에 배어있는
것이 이 한시의 글귀 때문이 아니고 무엇이랴.
*다른 하나의 글귀는 “God does everything for our good.” (신은 우리가 잘되게
하기 위해서 모든 일을 하신다.)이다.
이것은 영어(英語)교과서에 실린 한 토막 이야기 글의 제목으로 내용은 사자성어
(四字成語) ‘새옹지마(塞翁之馬)’에 비유할 수 있는 ‘어떤 불행한 일도 다행한 일도
그 결과는 반대로 바뀔 수도 있다’는 취지의 이야기인데, ‘신(神, God)의 섭리(攝理)’를
강조하는 다분히 종교적인 의미가 내포된 글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평생을 사는 동안 많은 선악(善惡)과 취사선택(取捨選擇)의 일에 마주했을 때,
만사가 ‘신의 섭리’로 이루어진다는 어쩌면 매우 운명론적(運命論的)인 대응을
수없이 해 왔음을 돌아보며 이 역시 내 몸에 배어 있던 글귀임을 깨닫는다.
‘신(神)의 섭리(攝理)’...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마음대로 될 수 없는 영역이 있고 또 아무리 잘 하려고
애써도 당신의 힘만으로는 닿을 수 없는 경지가 있음을 인정한다는 것은,
곧 세상의 만사를 긍정적(肯定的)으로 바라보고 만사에 낙천적(樂天的)인
기대를 갖고 산다는 것으로 매우 건강한 생활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남보다 다소 일찍 본업에서 손을 떼고 은퇴(隱退)할 때 주위에서 염려해 주던
것이 주로 ‘남은 긴 여생(餘生)’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이었는데, 나는 이 물음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God does everything for our good.’이라고 믿으니까. (‘18. 5. .) 끝.
저 역시 뇌출혈이후 조기 강제 은퇴하게 된 것이 지금
돌이켜보니까 새옹지마이었단 생각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더 늦게 일어났으면 현재 저의 생활은 꿈도
못꾸었을테니까 내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를 새삼 감사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