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齋晩筆](21-N) “증주벽립(曾朱壁立)”의 바위새김(岩石刻字)
심 영 보
*며칠 전(‘17. 8. 10.) 조선일보 “인문기행” [86. 국정을 농단한 무당 진령군(眞靈君)] 기사에서 고종(高宗) + 민비(閔妃) > 임오군란(壬午軍亂, 1882년) > 민비의 충주(忠州)피란 > 무녀(진령군) 동반 환궁 > 진령군의 국정농단 > 북묘(北廟) 건설 로 이어지는 우리의 근세사를 소개하면서
바로 그 “북묘(北廟)”를 세웠던(1883년) 장소가 조선 중기의 대(大) 성리학자(性理學者)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1607~1689)의 옛 집터 영역이라는 것을 말해 주었다.
그리고 거기 “증주벽립(曾朱壁立)”의 글씨가 새겨 진 큰 바위 하나가 지금은 한 연립주택의 받침돌이 된 채 외롭게 남아 있다는 사실도.
그 당시의 이곳 이름은 ‘송동(宋洞)’이요, 지금은 종로구 명륜동 1가 일대이다.
*내 집 근처에 이런 역사의 흔적이 숨어 있었다니...
‘오늘의 산책길’을 거기로 잡고 마을지도를 들고 나섰다.
목표지는 보행 15분의 지근거리에서 찾아냈다.
돌아보니 거기 북묘(北廟)의 흔적은 물론 그 이후의 100여년 근세사(近世史) 흔적들, 예 컨데 불교중앙학림(佛敎中央學林) > 중앙불교전수학교 > 중앙불교전문학교 > 혜화전문학교 > 동국대학교 > 은석초등학교 등의 자취는 깡그리 사라져 없고, 멀리 400년 전에 새겨진 몇 개의 “바위새김(岩石刻字)”만이 남아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이 “증주벽립(曾朱壁立)”(붙임사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57호), 우암 송시열이 그의 집터에 자신의 글씨로 새겼다는 바위글씨 이다.
<이 글씨의 말뜻은 아래 4번째 사진의 ‘안내판 설명’ 참조>
*아---, 일세의 권세가 무엇이며 명예나 재물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한낱 “바위새김”이 묻고 있는 듯하였다. (‘17. 8. .)
<붙임(사진)>:
(1)명륜동의 한 연립주택 받침돌이 된 ‘증주벽립’이 각자 된 바위.

(2)위 바윗돌의 근접 사진.

(3)바위 옆에 세운 ‘우암 송시열 집터’ 안내판(상단).

(4)위 안내판의 ‘우암 송시열 집터’ 안내문(한글 부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