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대통령이 다 알아서 하라며
전권을 줬던 게 사실이에요. 군부와 갈등이 많았어요. 군부 출신 실세는 남편 사무실
책상 위에 권총을 탁 놓았어요. 대통령의 신임이 남편 쪽으로
실리는 것에 대한 경고였어요. '너 죽고 싶어?' 하는 메시지였어요."
―남편이 집에 와서 이런 사실을 모두 얘기했나요?
"이는 나중에 전해 들은 얘기입니다. 만약 당시에 제가 알았다면 '당장 그만두고 떠나자'고 난리를 쳤을 거예요. 사실 미국 스탠퍼드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따고 국내로 들어오겠다고 했을 때도 저는 반대했어요. 저는 미국생활을 원했어요. 남편은 '미국의 수천 명 경제학자보다
한국의 열명 안 되는 경제학자가 우리나라를 살릴 수가 있다. 우리나라가 외국인 컨설턴트의 자문을 받지만 이들은 가슴으로 우리 현실의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고 했어요. 박정희 정권 때 경제기획원 기획국장을 맡게 되자 '월급 안 받고도 일할 수 있다. 이코노미스트라면 이런 기회는
돈을 내고도 해야 한다'고도 했어요."
―남편이 숨졌을 때 나이보다
이제 큰아들의 나이가 더 많지요?
"미국에 있는 큰아들이 지금 47세예요. 걔가 남편이 숨졌던 45세가 됐을 때 저는
불안해서 제대로잠을 못 이뤘어요. 제 아버지가 돌아간 나이를 무사히 넘겨야 하는데…, 아들이 그 나이를 넘어서자 안심이 됐어요. 둘째 아들은 아직 삼십대예요."
―주변에서 재혼을 권하지 않았나요?
"글쎄, 바보처럼 재혼도 못하고…. 친구들 사이에서 저는 '국립묘지 열녀'로 통해요. 지금도 꼭 생화(生花)를 놓고 오니까요. 살아오면서 좋은 일이 있으면 남편 묘소를 찾아가 먼저 이야기하고, 속상해도 그 앞에서 푸념했어요. 저는 혼자서 두 아들을 키웠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아이들에게 얘기할 때도 남편의 말을 제가 대신 전한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았어요."
―세월이 이렇게 흘러도 일편단심이니, 남편의 무엇이 그리 좋았나요?
"굉장히 명석했어요. 원래 공대를 지망했다는데 색약(色弱)이라 못 갔어요. 수학을 잘하고 기계를 좋아했지요. 대학에서 만났을 때 부터 그분의
착한 심성이 제일 좋았어요. 남의 말을 선의로만 받아들여요. 물론 저도 사람인데 약이 오르는 일이 많죠. 고생만 죽어라고 시켜놓고 떠나갔으니…. 하지만 그동안 남편의 음덕으로 살았던 것 같아요. 어딜 가든 남편을 아는 사람들이 제게 잘해 줬으니까요."
나는 더 이상 뭐라고 표현할 말을 찾지 못했다.
옮긴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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