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몰랐던 새로운 사실

by 김 혁 posted May 07,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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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몰랐던 새로운 사실...

  

 

  

   

  

 

 

 

5월이 시작되자 연휴가 시작되었고 그 연휴는 길었다. 어제는 부모님의 묘 이장 문제로 형과 마주 앉았다. 셋째 형이다. 나에게는 6형제가 있는데 큰형과 둘째형은 큰 어머니가 낳았고 그 밑으로 4형제는 어머니가 낳았다.

 

어머니의 첫 번째 남편은 6.25 때 국군으로 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를 해서 현재 국립묘지에 계시다고 했다. 그렇게 어머니는 20대에 혼자가 되어 지내시다가 큰어머니가 일찍 세상을 떠나시고, 세 살, 다섯 살의 아이를 아버지 혼자 키우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우리 집에 시집을 오셨다고 했다.

 

그리고 어머니는 4형제를 낳았다. 덕분에 내가 태어났다. 우리 어머니는 복이 얼마나 없으셨는지 그 남편마저도 남겨놓은 재산도 없이 세상을 일찍 떠났다. 그리고 어머니는 혼자서 우리 6형제를 키우셨다.

 

그래서 나는 어렸을 때부터 편히 쉬고 있는 어머니를 한 번도 뵌 적이 없다. 늘 일하는 어머니만 보고 자랐다. 지금도 어머니가 혼자 몸으로 어린 6형제를 키우느라 얼마나 고생하셨을까,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온다.

 

어머니로 보면 셋째 형이 장남이다. 어머니가 유일하게 매를 든 자식이 바로 셋째 형이다. 첫째 형과 둘째형에게는 매를 들지 않았다. 그리고 넷째 형과 다섯째인 나와 막내인 여섯째에게도 절대 매를 들지 않았다. 오직 셋째 형에게만 매를 들었다.

 

다른 자식이 말을 듣지 않아 가슴이 아플 때나, 뭔가 속상한 일이 있어 가슴이 답답할 때, 어머니는 셋째 형에게 매를 들어 분풀이를 했다. 그래서 지금도 내 기억에는 ‘셋째 형은 왜 저렇게 맞을 짓만 할까?’ 하는 생각을 여러 번 하곤 했다.

 

그런데 셋째 형만큼 효자가 없었다. ‘어머니’라는 말만 나오면 눈물부터 왈칵 쏟는 형이다. 지금도 동생들 생각하는 것이 끔찍하다. 동생들을 위해서 목숨이라도 내놓으라 하면 두 말도 하지 않고 내놓을 사람이 셋째 형이다.

 

어제는 그 형과 마주 앉아 긴 대화를 나눴다. 형은 지금 김해에 산다. 그래서 고향에 내려와서도 바쁜 동생들 시간 뺏는다며 얼른 가겠다며 길을 나선 형이다. 어제는 그 형과 오랜 만에 어렸을 적 얘기를 하면서 긴 대화를 나눴다.

 

그런데 대화중에 내가 몰랐던 사실 하나를 알게 되었다.

 

나에 대한 얘기였다. 그것도 조금은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집이 너무 가난해서 우리 집에 먹을 것이 떨어졌던 적이 있었다고 했다. 그때 어느 분께서 자식 한두 명을 고아원에 보내면 어떻겠냐는 말을 어머니에게 하셨다고 했다.

 

어머니께서도 이렇게 못 먹이고 못 가르칠 바에야 그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하셨다고 했다. 그리고 고아원에 보낼 자식으로 넷째 형과 내가 결정되었고 얼마 후에 넷째 형과 나는 정말로 고아원으로 가게 되었다. 여기까지는 내가 아는 기억이다.

 

그런데 어제 셋째 형이 이런 말을 했다.

 

“사실은 그 때 너를 해외로 입양 보내기로 결정이 됐었다. 네가 고아원에 가자 마침 해외 입양을 보낼 아이를 찾던 고아원에서 해외로 입양 보낼 아이로 너를 결정했고, 그 소식을 들은 어머니도 고민 고민하다가 미국으로 가면 여기보다 잘 먹이고 잘 가르친다는 말에 차라리 그러자고 결심을 하셨다.”

 

그리고 형은 이런 말도 했다.

 

“너에게 말은 안 했지만 네가 그동안 혼자서 바동거리며 사는 것을 보면서 그 때 차라리 네가 미국으로 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그곳에 갔으면 네가 그렇게 하고 싶어 하던 공부도 맘껏 하고 최소한 지금처럼 고생하며 살지는 않았을 거 아니냐.”

 

 

 

 

 

 

글쎄. 그랬을까. 그때 내가 해외입양을 며칠 앞두고 고아원을 뛰쳐나오지 않았으면 내가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었을까. 하긴, 그때 내가 내 인생에 순응하며 고아원에 머물렀다면 나는 지금 해외에 입양되어 외국 사람이 되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한 사실도 모른 채 며칠을 고아원에서 보내던 나는 굶어죽어도 집에서 굶어죽겠다며 고아원을 뛰쳐나와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어머니 품에 안겼는데 그런 나를 안고 어머니가 필요 이상으로 많이 우셨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그때 나를 으스러지게 안고 통곡을 하다시피 하던 어머니가 나는 의아했다. 그리고 어머니 품안에서 생각했다. 나는 며칠 잠시 집을 떠났다가 돌아온 것인데 어머니는 왜 이리도 서럽게 우실까. 너무 세게 안고 우셔서 나는 어깨가 아플 지경인데. 

 

그리고 그 이후에 어머니는 어머니 품에서 나를 내놓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니 그때 어머니가 대문에 들어선 나를 보고 왜 그렇게 놀란 표정을 지으셨는지, 그리고 나를 보듬고 왜 그렇게 많이 우셨는지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그래서 내 인생은 모든 것이 감사함으로 가득하다.

 

그때 해외로 입양되지 않은 것도 감사하고, 내 어머니를 어머니로 만난 것도 감사하고, 나를 자신의 몸보다 더 끔찍이 아껴주는 형들이 있어서 감사하고,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을 만날 수 있어서 감사하고,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서 감사하다.

 

남은 인생은 내가 받은 그 감사함을 누군가에게 돌려주며 살고 싶다.

 

어떤 일이 있어도 화 내지 않고, 짜증내지 않고,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고 싶다. 만나는 모든 사람이 나에게 ‘감사함’이라면 내가 그에게 화를 내고, 짜증내고, 미워할 이유도 없지 않을까.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45년 전의 나처럼 자신의 인생이 어찌될 지도 모르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아이들이 있다면 그 아이들을 찾아가 아이의 손이라도 잡아주고 싶다. 그리고 그 아이의 눈가에 맺힌 이슬이 있다면 그 이슬이라도 닦아주고 싶다.

 

 

동부매일 발행인
박 완 규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