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사침 사건 회상
어느 소아과 의사가 그의 의원에서 한 환자 아이에게 근육주사를 놓아주던 중에 예기치 않았던 말썽이 생겨서 크게 곤욕을 치른 일이 있다.
심한 인후두염 때문에 며칠째 통원 가료를 받던 다섯 살 난 사내아이였는데, 전날처럼 그의 궁둥이에 근육주사를 놓아주는 순간에 주사침의 바늘 부분과 그 머리부분(주사기에 연결하는 부분)이 분리되면서 바늘 부분이 근육 속으로 박혀버렸던 것이다.
일컬어 ‘근육내 이물’. 그런데 이런 신체내 이물은 대게는 별로 대수로와 보이지 않으면서도 그 뒷처리가 생각보다는 훨씬 말썽스러운 경우가 아주많다. 그러니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있던 이 의사는 혼자 섣불리 건드리려고 하지 않고 환자를 즉시 이웃 외과 의원으로 옮겨서 두 의사가 협력해서 이물 제거 작업을 시도하였다.
엑스선 사진을 찍어 위치도 확인하고 국소 마취하에 피부도 절개한 뒤 이리저리 찾아보았다. 그러나 길이가 2센티미터도 넘는 그 기다란 바늘은 아무데서도 찾아지지 않았다.
두 시간 이상의 실랑이 끝에도 바늘을 찾아내지 못한 두 의사는 할 수 없이 다음 단계의 시도인 투시하(透視下) 제거를 목적으로 가까운 방사선과 의원으로 환자를 옮겼다.
이 무렵 이 소식을 들은 나도 필요하면 거들어 줄 셈으로 그 방사선과 의원에 합류하였으니 결국 외과 의사 둘, 소아과와 방사선과 의사가 각 하나 해서 네 명의 의사가 이 작은 바늘 하나를 찾아내는 씨름에 가담한 셈이었다.
그러나 거기에 모인 네 명의 의사는 그 자리에서 더 이상 이물 제거 작업을 벌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곧 알게 되었다. 처음의 외과 의원에서 수술할 때까지만 해도 몇 번의 반복된 국소 마취만으로 잘 견디어주던 아이가 이번에는 막무가내로 재수술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록 어린아이지만 처음에는 겁도 나고 긴장도 되어서 잘 이겨내었던 모양이나 이제 자리가 다시 바뀌고 더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에워싸고 덤비니까 별안간 마음이 바뀐 것인지도 모른다.
아뭏든 이제는 전신 마취하에 투시하면서 찾아내는 길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였고 그래서 환자를 즉시 모 종합병원으로 다시 옮겼다. 이 때 아이를 데리고 병원으로 함께 갔던 소아과 의사가 나중에 전화를 해 주어 바늘을 잘 찾아낸 줄을 알았고, 또 며칠 후에는 환자 가족들의 희망이라면서 아이를 그들 집에서 더 가까운 내 병원으로 옮겨 입원시킴으로써 그 뒷일도 얼마간 알게 되었다.
아이는 며칠간 더 내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치료받다가 퇴원해서 다시 통원 가료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무렵에는 상처를 꿰맸던 실도 다 뽑은 뒤고 별로 대수로운 치료가 남았던 것도 아니어서 다만 늦게 나타날 수 있는 합병증의 발생 여부나 확인하는 정도의 치료였는데, 가족들은 아이를 내 병원으로는 데리고 오지도 않고 소아과 의원으로 전화해서는 그 의사더러 왕진해서 치료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어쨌거나 이 사건은 그런대로 조용히 마무리 되었는데, 그 때 거의 객관적 입장에 있었던 나지만, 지금도 그 때 일들을 돌이켜 보면 여러모로 비감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먼저 이런 일이 생기게 된 원인부터 더듬어 보더라도 그렇다. 우리가 지금 상용하고 있는 국산품 주사침도 여느 외제 침처럼 바늘 끝이 무디어져서 버리게 되기까지는 바늘대와 그 연결부가 절대로 분리되는 일이 없도록 튼튼하게 만들어졌다면 이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으리라. 또 이런 일은 주사 일만 번 놓는 동안에 단 한번도 생기지 않을 정도의 아주 희귀한 경우이긴 하지만, 그렇더라도 바늘을 그 본래의 사용 수명보다 훨씬 미리 폐기해 버리거나 아주 선진국의 경우처럼 한 번 쓰고 버리는 일회용 주사침을 쓴다면 훨씬 더 안전할 수는 있었으리라.
다만 이러한 조치가 의료 수가에 미치는 영향이 문제이고, 특히 이번 환자의 경우는 의료보험 수혜자여서 규정된 주사 수수료 이외에 일회용 주사침이나 주사기의 사용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다음에는 환자 쪽을 한번 보자. 그는 물론 더할 나위없는 최고 최대의 피해자임에 틀림없다. 더구나 나이 다섯 살밖에 안 된 어린아이가 겪은 전술한 고생들을 생각하면 진실로 미안하고 딱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런 피해는 예방 되었어야 하고 또 그 위험을 최소한으로 줄여 주었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적어도 소아과 환자에게만 이라도 우선 일회용 주사침의 사용을 인정해 줄 수 있을 만한 재정적 기반과 도량을 가진 의료보험 제도가 되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몹시 안타깝다.
또 한 가지, 이 환자의 가족들은 이 사건의 발단으로부터 종결에 이르기까지에 걸쳐 간 다섯 군데의 병·의원에서 발생한 진료비의 단 한 푼도 부담할 생각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위자료조의 금품을 요구하거나 무리한 왕진을 청하는 등으로 가기 가족 치료를 위하여 애써 온 의사를 괴롭혔는데, 환자 가족들로 하여금 이러한 생각이나 행동을 하게 한 그 밑바탕을 들여다보면, 어딘가 우리 민족이 겪어 온 지난날의 피압박 시대 중에 키워진 피해자 의식이나 떳떳하지 못한 비굴한 생각이 깔려 있었던 것 같아 못내 서글프다.
그러나 돌이켜 의사 쪽을 바라보면 비참한 생각은 그 도를 더한다.
자기의 단골 환자에게 최선의 치료를 해 오던 중에 참으로 청천벽력과 같은 난감한 일을 당했으니, 그는 오늘날의 일부 부도덕한 사회풍조로 해서 나중에 환자 측에서 어떤 행패라도 부리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도 가졌을 터이고 또 십여 년 그 자리에서 닦아 놓은 주위로부터의 신뢰 기반이나 자신의 명예에 다소라도 흠이 가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도 앞섰을 터이지만, 아니 무엇보다도 자기를 믿고 여럿 자녀의 건강문제를 자기에게 의탁해 온 오랜 단골환자요 나이 어린 아이에게 뜻하지 않았던 고생을 시키게 된 것이 미안하고 안쓰러워서 한시라도 빨리 그 고통을 덜어 주려고 동분서주 하였던 것이다.
사건이 발생한 아침 열한 시부터 이물 제거 수술을 마치고 입원실로 옮긴 저녁 일곱 시까지의 꼬박 여덟 시간 동안, 더 많은 수의 단골 환자가 기다리고 있을 자기병원을 몽땅 비운 것은 물론이고 끼니도 걸러 가면서 온종일 뛰어다녔다.
그러나 가족들의 눈초리는 시종 냉랭하였고 마치 그가 일부러 바늘을 찔러 넣기라도 했다는 듯한 표정으로 대할 뿐만 아니라, 끝내는 아이를 보신시켜야 한다면서 위자료까지 요구하기에 이르렀으니, 그가 성인군자가 아니었다면 아마 틀림없이 의사로서의 직업에 대한 환멸감 같은 것을 잠시라도 느꼈을 것이다.
“내가 왜 의사가 되었던가. 내가 의사만 되지 않았더라도 이만한 공부와 노력과 사회 경력을 쌓았다면, 이런 마음고생이나 또는 자기 직업에 대한 환멸감 같은 것을 느끼지 않고도 좀 더 편안하게 좀 더 여유있게 이 세상을 살아 나갈 수 있지 않았을까.
내가 왜 그에게 주사를 놓았던가. 비록 치료 기간이 좀 더 연장되고 따라서 환자의 고생스런 시간이 좀 더 길어진다 하더라도 아이에게 그리고 또 무엇보다도 나 자신에게 더 안전한 경구 투약 방법으로만 치료할 수도 있지 않았던가.
주사기나 주사침의 소모 대가(즉 감가상각)와 소독에 소요되는 경비 그리고 제반 인건비의 합에도 미치지 못하는 의료보험 수가 규정에 의한 근육주사료 2백20원(그것도 그중 66원은 즉불이고 나머지 1백54원은 2,3개월 이상의 장기 후불인 돈)이 욕심이 나서 주사를 놓았던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의사가 이런 구질구질한 일에 괘념치 않고도 명랑하고 친절한 진료 풍토 속에서 모든 환자를 소신껏 치료할 수 있는 시절이 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월간 교양지「마당」 81년 10월호, 의학칼럼)
어느 소아과 의사가 그의 의원에서 한 환자 아이에게 근육주사를 놓아주던 중에 예기치 않았던 말썽이 생겨서 크게 곤욕을 치른 일이 있다.
심한 인후두염 때문에 며칠째 통원 가료를 받던 다섯 살 난 사내아이였는데, 전날처럼 그의 궁둥이에 근육주사를 놓아주는 순간에 주사침의 바늘 부분과 그 머리부분(주사기에 연결하는 부분)이 분리되면서 바늘 부분이 근육 속으로 박혀버렸던 것이다.
일컬어 ‘근육내 이물’. 그런데 이런 신체내 이물은 대게는 별로 대수로와 보이지 않으면서도 그 뒷처리가 생각보다는 훨씬 말썽스러운 경우가 아주많다. 그러니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있던 이 의사는 혼자 섣불리 건드리려고 하지 않고 환자를 즉시 이웃 외과 의원으로 옮겨서 두 의사가 협력해서 이물 제거 작업을 시도하였다.
엑스선 사진을 찍어 위치도 확인하고 국소 마취하에 피부도 절개한 뒤 이리저리 찾아보았다. 그러나 길이가 2센티미터도 넘는 그 기다란 바늘은 아무데서도 찾아지지 않았다.
두 시간 이상의 실랑이 끝에도 바늘을 찾아내지 못한 두 의사는 할 수 없이 다음 단계의 시도인 투시하(透視下) 제거를 목적으로 가까운 방사선과 의원으로 환자를 옮겼다.
이 무렵 이 소식을 들은 나도 필요하면 거들어 줄 셈으로 그 방사선과 의원에 합류하였으니 결국 외과 의사 둘, 소아과와 방사선과 의사가 각 하나 해서 네 명의 의사가 이 작은 바늘 하나를 찾아내는 씨름에 가담한 셈이었다.
그러나 거기에 모인 네 명의 의사는 그 자리에서 더 이상 이물 제거 작업을 벌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곧 알게 되었다. 처음의 외과 의원에서 수술할 때까지만 해도 몇 번의 반복된 국소 마취만으로 잘 견디어주던 아이가 이번에는 막무가내로 재수술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록 어린아이지만 처음에는 겁도 나고 긴장도 되어서 잘 이겨내었던 모양이나 이제 자리가 다시 바뀌고 더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에워싸고 덤비니까 별안간 마음이 바뀐 것인지도 모른다.
아뭏든 이제는 전신 마취하에 투시하면서 찾아내는 길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였고 그래서 환자를 즉시 모 종합병원으로 다시 옮겼다. 이 때 아이를 데리고 병원으로 함께 갔던 소아과 의사가 나중에 전화를 해 주어 바늘을 잘 찾아낸 줄을 알았고, 또 며칠 후에는 환자 가족들의 희망이라면서 아이를 그들 집에서 더 가까운 내 병원으로 옮겨 입원시킴으로써 그 뒷일도 얼마간 알게 되었다.
아이는 며칠간 더 내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치료받다가 퇴원해서 다시 통원 가료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무렵에는 상처를 꿰맸던 실도 다 뽑은 뒤고 별로 대수로운 치료가 남았던 것도 아니어서 다만 늦게 나타날 수 있는 합병증의 발생 여부나 확인하는 정도의 치료였는데, 가족들은 아이를 내 병원으로는 데리고 오지도 않고 소아과 의원으로 전화해서는 그 의사더러 왕진해서 치료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어쨌거나 이 사건은 그런대로 조용히 마무리 되었는데, 그 때 거의 객관적 입장에 있었던 나지만, 지금도 그 때 일들을 돌이켜 보면 여러모로 비감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먼저 이런 일이 생기게 된 원인부터 더듬어 보더라도 그렇다. 우리가 지금 상용하고 있는 국산품 주사침도 여느 외제 침처럼 바늘 끝이 무디어져서 버리게 되기까지는 바늘대와 그 연결부가 절대로 분리되는 일이 없도록 튼튼하게 만들어졌다면 이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으리라. 또 이런 일은 주사 일만 번 놓는 동안에 단 한번도 생기지 않을 정도의 아주 희귀한 경우이긴 하지만, 그렇더라도 바늘을 그 본래의 사용 수명보다 훨씬 미리 폐기해 버리거나 아주 선진국의 경우처럼 한 번 쓰고 버리는 일회용 주사침을 쓴다면 훨씬 더 안전할 수는 있었으리라.
다만 이러한 조치가 의료 수가에 미치는 영향이 문제이고, 특히 이번 환자의 경우는 의료보험 수혜자여서 규정된 주사 수수료 이외에 일회용 주사침이나 주사기의 사용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다음에는 환자 쪽을 한번 보자. 그는 물론 더할 나위없는 최고 최대의 피해자임에 틀림없다. 더구나 나이 다섯 살밖에 안 된 어린아이가 겪은 전술한 고생들을 생각하면 진실로 미안하고 딱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런 피해는 예방 되었어야 하고 또 그 위험을 최소한으로 줄여 주었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적어도 소아과 환자에게만 이라도 우선 일회용 주사침의 사용을 인정해 줄 수 있을 만한 재정적 기반과 도량을 가진 의료보험 제도가 되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몹시 안타깝다.
또 한 가지, 이 환자의 가족들은 이 사건의 발단으로부터 종결에 이르기까지에 걸쳐 간 다섯 군데의 병·의원에서 발생한 진료비의 단 한 푼도 부담할 생각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위자료조의 금품을 요구하거나 무리한 왕진을 청하는 등으로 가기 가족 치료를 위하여 애써 온 의사를 괴롭혔는데, 환자 가족들로 하여금 이러한 생각이나 행동을 하게 한 그 밑바탕을 들여다보면, 어딘가 우리 민족이 겪어 온 지난날의 피압박 시대 중에 키워진 피해자 의식이나 떳떳하지 못한 비굴한 생각이 깔려 있었던 것 같아 못내 서글프다.
그러나 돌이켜 의사 쪽을 바라보면 비참한 생각은 그 도를 더한다.
자기의 단골 환자에게 최선의 치료를 해 오던 중에 참으로 청천벽력과 같은 난감한 일을 당했으니, 그는 오늘날의 일부 부도덕한 사회풍조로 해서 나중에 환자 측에서 어떤 행패라도 부리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도 가졌을 터이고 또 십여 년 그 자리에서 닦아 놓은 주위로부터의 신뢰 기반이나 자신의 명예에 다소라도 흠이 가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도 앞섰을 터이지만, 아니 무엇보다도 자기를 믿고 여럿 자녀의 건강문제를 자기에게 의탁해 온 오랜 단골환자요 나이 어린 아이에게 뜻하지 않았던 고생을 시키게 된 것이 미안하고 안쓰러워서 한시라도 빨리 그 고통을 덜어 주려고 동분서주 하였던 것이다.
사건이 발생한 아침 열한 시부터 이물 제거 수술을 마치고 입원실로 옮긴 저녁 일곱 시까지의 꼬박 여덟 시간 동안, 더 많은 수의 단골 환자가 기다리고 있을 자기병원을 몽땅 비운 것은 물론이고 끼니도 걸러 가면서 온종일 뛰어다녔다.
그러나 가족들의 눈초리는 시종 냉랭하였고 마치 그가 일부러 바늘을 찔러 넣기라도 했다는 듯한 표정으로 대할 뿐만 아니라, 끝내는 아이를 보신시켜야 한다면서 위자료까지 요구하기에 이르렀으니, 그가 성인군자가 아니었다면 아마 틀림없이 의사로서의 직업에 대한 환멸감 같은 것을 잠시라도 느꼈을 것이다.
“내가 왜 의사가 되었던가. 내가 의사만 되지 않았더라도 이만한 공부와 노력과 사회 경력을 쌓았다면, 이런 마음고생이나 또는 자기 직업에 대한 환멸감 같은 것을 느끼지 않고도 좀 더 편안하게 좀 더 여유있게 이 세상을 살아 나갈 수 있지 않았을까.
내가 왜 그에게 주사를 놓았던가. 비록 치료 기간이 좀 더 연장되고 따라서 환자의 고생스런 시간이 좀 더 길어진다 하더라도 아이에게 그리고 또 무엇보다도 나 자신에게 더 안전한 경구 투약 방법으로만 치료할 수도 있지 않았던가.
주사기나 주사침의 소모 대가(즉 감가상각)와 소독에 소요되는 경비 그리고 제반 인건비의 합에도 미치지 못하는 의료보험 수가 규정에 의한 근육주사료 2백20원(그것도 그중 66원은 즉불이고 나머지 1백54원은 2,3개월 이상의 장기 후불인 돈)이 욕심이 나서 주사를 놓았던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의사가 이런 구질구질한 일에 괘념치 않고도 명랑하고 친절한 진료 풍토 속에서 모든 환자를 소신껏 치료할 수 있는 시절이 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월간 교양지「마당」 81년 10월호, 의학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