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안 자전거 여행
1958년 여름, 그러니까 본과 2학년 여름방학에는 미리부터 계획했던 대로 김홍덕. 박승균. 나 셋이서 동해안 종주 무전자전거 여행을 떠났다.
당시의 예방의학교실에 교섭해서 「농어촌 의료현황」 조사반이라는 학장명의의 신임장(?)까지 갖춰 공짜 밥 얻어먹을 채비도 잊지 않았다.
서울을 출발해서 중랑교-덕소-양수리-용문-홍천-원통-인제-진부령-간성-속초-대포리-양양-주문진-강릉-삼척-울진-평해-영덕-포항의 코스를 밟았는데 애초의 목적지인 부산에 이르기 전에 일행 중 한명이 탈진하는 바람에 포항에서 자전거는 화물차편에 부치고 우리는 버스를 타고 부산으로 갔었다.
이때의 국도는 서울의 중랑교를 벗어나면서 부터는 몽땅 자갈밭길이어서 하루 평균 행정이 겨우 1백리(40km) 남짓 정도일수 밖에 없게 매우 험난한 것이었다.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참으로 용감한 결행이었는데 아직까지도 생생한 그때의 추억들을 더듬어 본다.
◎ 원덕(院德)의 첫날밤
당초에 첫날밤은 용문의 고모 댁에서 묵기로 계획되어 있었는데 양수리-양평을 지나면서 부터 주행속도가 느려지고 쉬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원덕에 이르러서는 이미 날이 어두워졌을 뿐만 아니라 오르막 경사 길에서는 페달 밟는 다리에 더 이상 힘이 주어지지 않았다.
일행은 별수 없이 불빛을 따라 어느 농가로 찾아가서 잠자리를 청했다. 주인아저씨가 아무 의심도 없이 우리에게 토방 하나를 내어줬고 소박하나마 저녁상까지 차려주었다. 아마 이 시대 이 지역의 농촌인심 이었지 싶다.
평소에 자전거를 별로 타지도 않던 사람들이 지도상의 거리만을 탁상공론해서 하루 1~2백리씩을 매일 주행하겠다고 짠 계획이 얼마나 무모했던가를 깨닫고 우리일정을 전면적으로 재조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 진부령(陳富嶺) 초소의 전투경찰
태백산맥을 넘는 최북단의 통로가 진부령인데 서쪽에서의 오름길은 그래도 좀 완만해서 자전거를 반쯤은 타고 가고 반쯤은 끌고 가면서 고갯마루에 이르렀다.
전투복을 입은 초소 경비경찰이 우리를 맞으면서 어디서 오는 사람들이냐고 묻길래 우리는 당연히 서울서 온다고 대답했다. 그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거푸 세 번이나 다시 물었다. 정말로 서울서부터 자전거를 타고 여기까지 온 것이냐고.
좀 돈 사람들이 아니냐는 표정으로 우리를 통과시키면서도 계속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 대포리(大浦里) 어민의 생활상
속초읍 바로 남쪽의 포구 있는 곳이 대포리 인데(지금은 속초시에 편입됨) 여기서 어민들의 보건의료 환경현황을 조사하기로 했다.
저녁 어스름에 대포리에 도착한 우리는 즉시 동네 이장 집을 찾아가서 목적을 얘기하고 우선 숙식을 해결했다. 이장 집은 어업이 주업이지만 한편으로는 약간의 밭농사도 겸하고 있어서 그나마 그 언저리에서는 생활형편이 좀 나은 편인 것을 뒤에 알았다.
이튿날은 이장이 소개 해 준대로 이 마을의 어가 10여 호를 돌아다니면서 보건환경과 의료현황을 조사했는데 한마디로 말해서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낡은 궤짝 한 두 개가 가구의 전부요 아직도 등잔불 생활이었으며, 벽에는 빈대 핏자국이 여기저기 나 있었고, 화장실은 드럼통에 널판지 얹어놓은 것이거나 발판 돌 사이에 일을 본 뒤 재로 덮어 가래로 밀어내는 최고 원시형 그대로였으며, 공동우물관리도 엉망이어서 위생개념은 전혀 없었다.
속초에나 있는 병원에는 지난 1년 중 단 한 번도 가 본적이 없다고 대답한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치아는 썩거나 말썽을 부리면 그대로 썩어 떨어지거나 빠지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어린애는 제명이 긴 놈이면 목숨을 부지해 성장할 뿐이지 먹성이건 입성이건 뭐 챙겨 주는 게 없었다. 무얼 더 물어볼 거리가 없었고 또 묻기도 민망해서 적당히 조사하는 선에서 그칠 수밖에 없었다.
◎ 墨湖墨湖 皆墨戶(묵호묵호 개묵호)
묵호(墨湖)에는 일행 중 한사람의 여동생(당시 대학교 1학년)의 여고동창생이 산다기에 그 미약한 연고를 빌미로 찾아가서 하루 신세를 질 셈이었다. 물어물어 찾아간 곳은 제법 잘사는 듯한 번듯한 양옥집이었는데 그 어머니라는 이가 나와서는 이런 저런 질문만 자꾸 하더니 끝내는 지금 딸이 없어서 확인할 수 없다는 핑계를 대면서 거절하는 것이었다.
우리의 신분을 의심하는 것이었는지, 작은 동네에서 과년한 딸에게 나쁜 소문이라도 날까봐 그랬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전국을 유랑하던 김삿갓(金笠)이 어느 許氏 집성촌에서 하룻밤 유숙을 퇴자 맞고는 許家許家不許家(허씨 집이 도처에 있거늘 나를 허락하는 집은 없구나)라고 노래했던 대목이 문득 떠올랐다. 본래 묵호가 탄광지대라 주위산야가 온통 시커멀 뿐만 아니라 냇물도 호수도 먹 갈아 푼 듯 검은 墨湖인데 우리가 찾았던 곳은 인정도 마음도 모두가 메마른 어두운 집이었던 것 같다.
◎ 포항(浦項) 시청 숙직실
우리 일행의 여정 속에 포항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알고 급우 최규완(崔圭完)군이 자발적으로 연고를 맺어 주었다. 그의 외숙이 포항시장으로 계신데 자기가 연락해 놓을 테니 거기서 하루 묵어가라는 것이었다.
포항시청에 닿은 시간은 일과시간이 지난 때여서 숙직자를 찾아서 사유를 말하면서 시장의 사택위치를 물었다. 그는 잠시 기다리라면서 안으로 들어갔다가 나오더니 집에 전화를 걸어보니 시장 댁에 아무도 안 계셔서 비서관에게 의논했더니 우선 숙직실에서 잠시 쉬게 해드리라 했다면서 우리를 그리로 안내했다.
앞에서도 얘기 했듯이 우리 일행 중 한사람이 포항에 이르렀을 즈음에 탈진해 있기도 했지만 우리 모두가 이미 풀솜이 되어 있었기에 청탁을 가릴 여유도 없이 거기 숙직실에 쓰러져서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생각하니 뭔가 좀 아쉽기는 했는데 최(崔)군의 호의가 그때나 이때나 윗사람에게는 그렇게 하는 게 충성이라고 믿는 하위직 공무원(숙직자 또는 비서관)에게 까지는 미치지 못했던 것으로 판단하고 그곳을 떴다.
◎ 부산(釜山)에서 만난 김병수(金秉洙)군
부산에는 우리 급우가 10여명이나 있었기 때문에 여행을 계획하면서 오히려 뉘 집을 가야 가장 덜 부담스러울가를 따져봐야 할 형편이었는데 의외로 급우 김병수(金秉洙)군이 먼저 제의해 오는 바람에 아주 쉽게 결정이 났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가 사는 평범한 적산가옥 2층의 다다미방에서 며칠을 묵으면서 많은 대화도 하고 신세도 졌다. 그때 그는 이런 취지의 말을 했다. 「새 학기에 벌어질 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할 예정이다. 너희들도 좀 도와주라. 나는 의사되는 것이 싫지는 않지만 단순히 고름이나 째고 감기 배탈이나 치료해 주는 임상의사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나는 의사로서 펜대를 놀리는 보다 큰일을 하고 싶다.」
나는 이때 이 말을 듣고 속으로 깜짝 놀랐다. 이제 겨우 본과 2학년인데 벌써 자기의 장래를 이렇게 확고하게 설계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히려 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하는 이유를 합리화하기 위한 말이려니 짐작했다.
그러나 오늘날 들이켜 보면 그는 일찌감치 부터 신념이 대단히 굳었고 이런 신념을 꾸준히 실천해온 의지의 사나이임이 증명됐다. 그때의 학생회장 선거 결과와 무관하게 그는 외과 전문의 자격과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음은 물론, 공군 군의관으로서 장군(將軍)의 지위에까지 오르며 청와대 의무실장과 국군 서울지구병원장을 역임하였고, 전역 후에는 보건사회부 차관(次官), 인제대학교 백병원 행정부원장 겸 예방의학 교수, 동아대학교 부속병원장 등을 거쳐 지금은 서울보건 전문대학장으로 활약하고 있다.
(문집 「회갑인생」, 96.6.발간)
1958년 여름, 그러니까 본과 2학년 여름방학에는 미리부터 계획했던 대로 김홍덕. 박승균. 나 셋이서 동해안 종주 무전자전거 여행을 떠났다.
당시의 예방의학교실에 교섭해서 「농어촌 의료현황」 조사반이라는 학장명의의 신임장(?)까지 갖춰 공짜 밥 얻어먹을 채비도 잊지 않았다.
서울을 출발해서 중랑교-덕소-양수리-용문-홍천-원통-인제-진부령-간성-속초-대포리-양양-주문진-강릉-삼척-울진-평해-영덕-포항의 코스를 밟았는데 애초의 목적지인 부산에 이르기 전에 일행 중 한명이 탈진하는 바람에 포항에서 자전거는 화물차편에 부치고 우리는 버스를 타고 부산으로 갔었다.
이때의 국도는 서울의 중랑교를 벗어나면서 부터는 몽땅 자갈밭길이어서 하루 평균 행정이 겨우 1백리(40km) 남짓 정도일수 밖에 없게 매우 험난한 것이었다.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참으로 용감한 결행이었는데 아직까지도 생생한 그때의 추억들을 더듬어 본다.
◎ 원덕(院德)의 첫날밤
당초에 첫날밤은 용문의 고모 댁에서 묵기로 계획되어 있었는데 양수리-양평을 지나면서 부터 주행속도가 느려지고 쉬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원덕에 이르러서는 이미 날이 어두워졌을 뿐만 아니라 오르막 경사 길에서는 페달 밟는 다리에 더 이상 힘이 주어지지 않았다.
일행은 별수 없이 불빛을 따라 어느 농가로 찾아가서 잠자리를 청했다. 주인아저씨가 아무 의심도 없이 우리에게 토방 하나를 내어줬고 소박하나마 저녁상까지 차려주었다. 아마 이 시대 이 지역의 농촌인심 이었지 싶다.
평소에 자전거를 별로 타지도 않던 사람들이 지도상의 거리만을 탁상공론해서 하루 1~2백리씩을 매일 주행하겠다고 짠 계획이 얼마나 무모했던가를 깨닫고 우리일정을 전면적으로 재조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 진부령(陳富嶺) 초소의 전투경찰
태백산맥을 넘는 최북단의 통로가 진부령인데 서쪽에서의 오름길은 그래도 좀 완만해서 자전거를 반쯤은 타고 가고 반쯤은 끌고 가면서 고갯마루에 이르렀다.
전투복을 입은 초소 경비경찰이 우리를 맞으면서 어디서 오는 사람들이냐고 묻길래 우리는 당연히 서울서 온다고 대답했다. 그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거푸 세 번이나 다시 물었다. 정말로 서울서부터 자전거를 타고 여기까지 온 것이냐고.
좀 돈 사람들이 아니냐는 표정으로 우리를 통과시키면서도 계속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 대포리(大浦里) 어민의 생활상
속초읍 바로 남쪽의 포구 있는 곳이 대포리 인데(지금은 속초시에 편입됨) 여기서 어민들의 보건의료 환경현황을 조사하기로 했다.
저녁 어스름에 대포리에 도착한 우리는 즉시 동네 이장 집을 찾아가서 목적을 얘기하고 우선 숙식을 해결했다. 이장 집은 어업이 주업이지만 한편으로는 약간의 밭농사도 겸하고 있어서 그나마 그 언저리에서는 생활형편이 좀 나은 편인 것을 뒤에 알았다.
이튿날은 이장이 소개 해 준대로 이 마을의 어가 10여 호를 돌아다니면서 보건환경과 의료현황을 조사했는데 한마디로 말해서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낡은 궤짝 한 두 개가 가구의 전부요 아직도 등잔불 생활이었으며, 벽에는 빈대 핏자국이 여기저기 나 있었고, 화장실은 드럼통에 널판지 얹어놓은 것이거나 발판 돌 사이에 일을 본 뒤 재로 덮어 가래로 밀어내는 최고 원시형 그대로였으며, 공동우물관리도 엉망이어서 위생개념은 전혀 없었다.
속초에나 있는 병원에는 지난 1년 중 단 한 번도 가 본적이 없다고 대답한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치아는 썩거나 말썽을 부리면 그대로 썩어 떨어지거나 빠지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어린애는 제명이 긴 놈이면 목숨을 부지해 성장할 뿐이지 먹성이건 입성이건 뭐 챙겨 주는 게 없었다. 무얼 더 물어볼 거리가 없었고 또 묻기도 민망해서 적당히 조사하는 선에서 그칠 수밖에 없었다.
◎ 墨湖墨湖 皆墨戶(묵호묵호 개묵호)
묵호(墨湖)에는 일행 중 한사람의 여동생(당시 대학교 1학년)의 여고동창생이 산다기에 그 미약한 연고를 빌미로 찾아가서 하루 신세를 질 셈이었다. 물어물어 찾아간 곳은 제법 잘사는 듯한 번듯한 양옥집이었는데 그 어머니라는 이가 나와서는 이런 저런 질문만 자꾸 하더니 끝내는 지금 딸이 없어서 확인할 수 없다는 핑계를 대면서 거절하는 것이었다.
우리의 신분을 의심하는 것이었는지, 작은 동네에서 과년한 딸에게 나쁜 소문이라도 날까봐 그랬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전국을 유랑하던 김삿갓(金笠)이 어느 許氏 집성촌에서 하룻밤 유숙을 퇴자 맞고는 許家許家不許家(허씨 집이 도처에 있거늘 나를 허락하는 집은 없구나)라고 노래했던 대목이 문득 떠올랐다. 본래 묵호가 탄광지대라 주위산야가 온통 시커멀 뿐만 아니라 냇물도 호수도 먹 갈아 푼 듯 검은 墨湖인데 우리가 찾았던 곳은 인정도 마음도 모두가 메마른 어두운 집이었던 것 같다.
◎ 포항(浦項) 시청 숙직실
우리 일행의 여정 속에 포항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알고 급우 최규완(崔圭完)군이 자발적으로 연고를 맺어 주었다. 그의 외숙이 포항시장으로 계신데 자기가 연락해 놓을 테니 거기서 하루 묵어가라는 것이었다.
포항시청에 닿은 시간은 일과시간이 지난 때여서 숙직자를 찾아서 사유를 말하면서 시장의 사택위치를 물었다. 그는 잠시 기다리라면서 안으로 들어갔다가 나오더니 집에 전화를 걸어보니 시장 댁에 아무도 안 계셔서 비서관에게 의논했더니 우선 숙직실에서 잠시 쉬게 해드리라 했다면서 우리를 그리로 안내했다.
앞에서도 얘기 했듯이 우리 일행 중 한사람이 포항에 이르렀을 즈음에 탈진해 있기도 했지만 우리 모두가 이미 풀솜이 되어 있었기에 청탁을 가릴 여유도 없이 거기 숙직실에 쓰러져서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생각하니 뭔가 좀 아쉽기는 했는데 최(崔)군의 호의가 그때나 이때나 윗사람에게는 그렇게 하는 게 충성이라고 믿는 하위직 공무원(숙직자 또는 비서관)에게 까지는 미치지 못했던 것으로 판단하고 그곳을 떴다.
◎ 부산(釜山)에서 만난 김병수(金秉洙)군
부산에는 우리 급우가 10여명이나 있었기 때문에 여행을 계획하면서 오히려 뉘 집을 가야 가장 덜 부담스러울가를 따져봐야 할 형편이었는데 의외로 급우 김병수(金秉洙)군이 먼저 제의해 오는 바람에 아주 쉽게 결정이 났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가 사는 평범한 적산가옥 2층의 다다미방에서 며칠을 묵으면서 많은 대화도 하고 신세도 졌다. 그때 그는 이런 취지의 말을 했다. 「새 학기에 벌어질 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할 예정이다. 너희들도 좀 도와주라. 나는 의사되는 것이 싫지는 않지만 단순히 고름이나 째고 감기 배탈이나 치료해 주는 임상의사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나는 의사로서 펜대를 놀리는 보다 큰일을 하고 싶다.」
나는 이때 이 말을 듣고 속으로 깜짝 놀랐다. 이제 겨우 본과 2학년인데 벌써 자기의 장래를 이렇게 확고하게 설계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히려 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하는 이유를 합리화하기 위한 말이려니 짐작했다.
그러나 오늘날 들이켜 보면 그는 일찌감치 부터 신념이 대단히 굳었고 이런 신념을 꾸준히 실천해온 의지의 사나이임이 증명됐다. 그때의 학생회장 선거 결과와 무관하게 그는 외과 전문의 자격과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음은 물론, 공군 군의관으로서 장군(將軍)의 지위에까지 오르며 청와대 의무실장과 국군 서울지구병원장을 역임하였고, 전역 후에는 보건사회부 차관(次官), 인제대학교 백병원 행정부원장 겸 예방의학 교수, 동아대학교 부속병원장 등을 거쳐 지금은 서울보건 전문대학장으로 활약하고 있다.
(문집 「회갑인생」, 96.6.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