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조회 수 1582 추천 수 218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붕타우의 추억

  월남.
  이제는 영원히 역사 속에 묻혀버린 나라지만 나에게는 많은 추억 거리를 남겨준 땅이고 또 내 평생에서 가장 멋있는 여름을 경험하게 한 곳이다.
  내가 파월 한국군의 일원으로 배치된 곳은 사이공에서 가까운 휴양도시 붕타우였다.
  이 도시는 사이공 동남쪽 해안에 돌출된 육지의 연장이자 실제로는 제방 모양의 육로로 연결되어 있는 조그만 섬 쌩 쟈크 곶(岬)에 위치한 인구 4만쯤의 작은 도시였다.
  그리고 이 섬은 북쪽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 3면의 해변 곳곳에 해수욕장이 개발되어 있고 남서쪽 해안의 경관 좋은 수림지대에는 별장들이 들어서 있어서 휴양도시라는 이름이 제법 어울리는 곳이었다.
  내가 군의관으로 근무하게 된 한국군 병원은 이 섬의 복판쯤에 있었고 숙소는 거기서 얼마 안 떨어진 후론트비치 해변 가에 있었다.
  일년내내 여름인 이곳에서 독신 장교들끼리만 모여 사는 우리들의 숙소생활은 그 지독한 더위를 견뎌내는 일이 너무나 짜증스럽고 답답해서 매일의 일과보다도 더 힘들었다.
  다행히도 아름다운 해변이 바로 지척에 있었고 그 분위기는 언제나 우리를 유혹하고 있었기에 우리들은 일과 후의 저녁시간이나 주말이면 자주 해변 가에 놀러 나가곤 했다.
  숙소에서 도보거리에 있는 후론트비치는 가장 자주 산책나간 곳이었다.
  후론트비치의 모래는 좀 신통하지 못한 편이었지만 주위에 야자수가 울창하게 들어서 있는 곳곳에 벤치가 놓여 있으며 아늑한 해변에는 여기저기 크고 작은 가게들과 선술집들이 차려져 있어서 산책하기에는 아주 십상이었다.
  멀리 해상에는 사이공 입항을 대기하는 수십 척의 화물선들이 점점이 떠 있어 밤이면 그 불빛을 출렁이는 바닷물에 흘려보내고 있고, 수평선 위로는 검푸른 밤하늘이 수놓은 듯 반짝이는 총총한 별들을 안고 포장처럼 드리워져 있어 그 운치가 으뜸가는 곳이었다.
  해변의 벤치에 앉아 정다운 친구와 담소하거나 시원한 저녁 바닷바람을 맞으며 맥주 캔을 따는가 하면, 모래밭에 누워 고향에 두고 온 가족들을 그리거나 깊은 명상에 잠겨 있다가 깜빡 잠이 든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주말에는 으례 몇몇이서 어울려 후렌치비치나 백비치를 찾았다.
  후렌치비치는 모래도 깨끗하고 사장(沙場)도 길며 각종 오락시설과 상점, 음식점등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어서 일반 해수욕객들이 제일 많이 모이는 곳이었다.
  각지에서 몰려 든 젊은 남녀 해수욕객들이 군데군데 모여서 기타 음악에 맞춰 춤추고 노래하는 발랄한 모습들을 쇼 구경하듯 바라보면서
이곳의 특산물인 꽃게 즉석요리와 「33」(바무어이바 : 월남 산 맥주 이름)을 마시는 풍류도 그만 이었지만, 멀리 바다 위에서 모터보트나 수상스키 타는 풍경들은 더 없이 평화로워서 잠시나마 전쟁하는 나라라는 생각을 잊게 해주었다.
  백비치에는 한국군 휴양소가 있어서 일반인들의 출입을 금하고 있었으므로 비교적 한적한 곳이었다.
  우리는 오고가는 동료 교체 멤버들의 환영. 환송행사를 대개 이곳에서 치렀는데 그때마다 푸짐한 음식들을 장만해 가지고 가서 우리들끼리 불고기파티나 맥주 파티를 벌이면서 해수욕을 즐기니 거기가 바로 고향땅의 어느 해수욕장인걸로 착각될 만큼 분위기는 아주 한국적이었다.
  숙소에서 서쪽으로 바위가 많은 마리아 비치를 향해 해변 길을 따라 가면 바닷가 곳곳의 바위더미에는 한가로운 낚시꾼들이 세월을 낚고 있었고, 내륙 쪽 수풀 속에는 수상(首相)별장이라고 알려진 커다란 맨션에서 부터 앙증스럽게 아담한 작은 빌라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의 별장들이 그림같이 박혀 있었다.
  넓은 파초의 숲 한가운데 자리 잡은 원두막에 올라가 비치를 내려다보며 손가락 굵기 만한 싱싱한 바나나를 까먹는 맛은 이곳 열대의 해변 가가 아니면 맛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비록 일 년 열두 달이 우리네 한여름보다도 더한 땡볕더위의 이 나라이지만 잠깐씩이나마 더위를 잊을 수 있게 해준 몇몇 경험들은 아마 영원히 지워질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아 있을 것 같다.
  그 중 하나가 모터싸이클을 타고 해변을 신나게 달리던 기억이다.
  싸이클의 스피드에서 오는 쾌감과 바다에서 마주 불어주는 바닷바람의 신선함은 모든 더위를 순식간에 걷어갔다. 그리고 해변 가 오두막 상점의 비치파라솔 밑에 잠시 쉬면서 삼색 아이스크림이라도 한 그릇 사먹으면 그게 바로 멋진 피서였다. 게다가 잘 어울리는 말 상대라도 함께 있었다면 그 얼마나 낭만적이었던가.
  상하의 나라 월남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시원한 추억은 열대지방의 우기 기후 현상인 스콜(squall)이다.
  그 곳의 여름인 우기만 되면 하루 한 차례씩 한낮에 소나기가 오는 것이다.
  유난히 후덥지근하다 싶으면 어느새 한 떼의 먹구름이 몰려와서는 한 1,2십분 동안 억수 같은 소나기를 쏟아 붓는다. 그리고 때로는 요란한 광풍과 댓줄기 같은 비가 꼭 폭풍우처럼 몰아칠 때도 있다. 이렇게 소나기가 쏟아질 때는 대개의 사람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처마 밑에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지만 어떤 용감한 이는 팬티만 입은 채 비누를 들고 거리에 나와서 온몸에 비누칠을 하면서 천연 샤워를 즐기기도 한다.
  이 땡볕더위의 고장에서 한 줄기 소나기만으로도 가슴 속까지 후련할 만큼 시원한데, 거기 더해서 천연샤워의 코믹한 풍경까지 보면 보는 이 조차 덩달아 한층 더 시원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이 더운 나라에서 내가 가장 자주 즐겼던 납량처(納凉處)는 우리 숙소였다.
  2급 호텔에 자리 잡은 우리 숙소의 방들은 열대지방답게 널찍하고 앞뒤로 맞창을 낸 커다란 창문들은 모두 통풍이 잘 되도록 만든 목제 빗살창이었다.
  방 한가운데에 더블 침대가 놓여 있고 그 바로 위 천정에는 천정선풍기가 매달려 있으며 방 한쪽이 샤워실 이었다.
  근무처에서 돌아오자마자 샤워로 땀을 헹군 뒤 통 넓은 팬티나 목욕타월 한 장만 몸에 걸친 채 선풍기를 틀어놓고 넓은 침대에 큰(大)자로 누워 있으면 세상 어디에도 비길 데 없는 별유천지(別有天地)였던 것이다.
  속속들이 배어들었던 땀이 몽땅 빨려나가고 오장육부 속까지 시원한 바람이 스며드는 것 같은 황홀한 기분에서 스르르 잠에 빠지면 거기가 바로 무릉도원(武陵桃源)이었다.

                                     (월간[광장]. 83년 8월호, 납량수필)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577 추억의 트럼펫 연주 모음 (24곡) 김 혁 2007.09.21 1152
576 9월의 노래 - 패티김 김 혁 2007.09.17 1206
575 [심영보 수필집]"네오 히포..."抄(33): 월남여인과의 인연 심영보 2007.09.15 2732
574 [TIBET]을 다녀오다 1 심영보 2007.09.13 1606
573 루치아노 파바로티 - 오! 솔레미오 앨범(개별듣기) 김 혁 2007.09.11 3466
» [심영보 수필집]"네오 히포..."抄(32): 붕타우의 추억 심영보 2007.09.08 1582
571 그리움 묻어나는 가곡모음 김 혁 2007.09.05 1218
570 [심영보 수필집]"네오 히포..."抄(31): <自作 漢詩選>(7) 심영보 2007.08.30 1118
569 [심영보 수필집]"네오 히포..."抄(30): <自作 漢詩選>(6) 심영보 2007.08.27 1270
568 [심영보 수필집]"네오 히포..."抄(29): <自作 漢詩選>(5) 심영보 2007.08.24 1105
567 [심영보 수필집]"네오 히포..."抄(28): <自作 漢詩選>(4) 심영보 2007.08.21 1229
566 [심영보 수필집]"네오 히포..."抄(27): <自作 漢詩選>(3) 심영보 2007.08.18 1326
565 한국인의 정신을 지배하는 사고방식은?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 (文法) 이태식(9) 2007.08.18 1443
564 당신을 향한 그리움이 김 혁 2007.08.17 1285
563 자연과 고래 김 혁 2007.08.17 1116
562 [심영보 수필집]"네오 히포..."抄(26): <自作 漢詩選>(2) 심영보 2007.08.15 1148
561 아름다운 우리가곡 김 혁 2007.08.13 1143
560 [심영보 수필집]"네오 히포..."抄(25): <自作 漢詩選>(1) 심영보 2007.08.12 1181
559 한 여름날을 뒤 흔드는 소리.(9회에서) 이용분 2007.08.11 1187
558 지구촌 풍물과 풍경 김 혁 2007.08.10 1289
Board Pagination Prev 1 ... 196 197 198 199 200 201 202 203 204 205 ... 229 Next
/ 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