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여인과의 인연
1966년 전화가 격화된 월남은 수도 사이공 근교에까지 포성이 진동했다.
이 무렵 맺어진 월남의 한 30대 여인환자와 오간 따뜻했던 인정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바 듕」 (※바 란 월남어로 미세스란 뜻임)
듕 여인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당시 사이공 근교인 붕타우에 주둔했던 우리 주월 한국군의 제1이동외과병원안의 전장병과도 친근했던 이국의 다정한 친구였다.
그녀가 우리와 친교를 맺기는 내가 월남에 가기 2년 전 우리외과병원이 갓 개설됐던 무렵부터로 거슬러 올라간다.
외과병원이 개설된 지 1개월 됐을 때 그녀는 가성 소오다를 잘못알고 마셔 식도가 완전히 파괴, 한 방울의 물도 넘기지 못할 만큼 위급상태에서 내원했다.
「바 듕」을 처음 담당했던 의사는 K소령이었다.
K소령은 거의 죽음직전에 이른 그녀를 고무 튜브로 식도를 대신하는 응급처치로 우선은 음식을 넘길 수 있도록 만든 다음 1개월여를 입원 시키면서 식도결장위물합술을 시행 완전히 파괴됐던 식도를 어느 정도 회복시켜 놓았다.
퇴원한 후에도 그녀는 1주일에 한 두 차례는 꼭 병원을 찾아와 우리 장병들에게 과일과 꽃을 한 아름씩 선물하는 것을 잊지 않았으며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우리를 자기 집으로 초청, 푸짐하게 대접하기도 했다.
이국의 전란 속에서 전상자만을 대하는 향수의 생활에 한 이국인이 베푸는 이 정성의 대접은 우리들에게 더없는 청량제가 되었다.
그 후 K소령은 재임기간을 끝내고 귀국, 후임에 C소령이 파견되었다.
이렇게 해서 「바 듕」의 후속치료는 C소령으로 바톤이 이어졌다.
그녀는 구명의 은인인 K소령의 후임으로 들어선 C소령에게도 K소령과 다름없는 경건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 쏟았다.
C소령을 자기 집으로 초청 전 가족이 환대하는 가운데 푸짐하게 대접하는가 하면 종종 병원으로 찾아와 환자진료에 여념이 없는 잡병들을 위안하기도 했다.
이러다 C소령의 바톤은 다시 나에게로 이어졌다.
내가 부임한지 얼마 안 된 어느 날 테 굵은 선글라스에 하얀 아오자이를 걸친 그녀가 나를 찾아왔다.
처음으로 「바 듕」을 대한 나는 그녀가 취하는 정성스런 태도에 오히려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
비록 선임자들로부터 대충 얘기를 듣긴 했지만 이렇게 까지 정성을 쏟으리라곤 미처 생각 치 못 했던 것이다.
처음으로 이국 여성의 정성을 받아본 나는 그 진정한 의미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이때까지도 그녀는 수술부위의 협착증으로 계속 고통을 당하고 있었으며 이때마다 병원에서 응급조치를 받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정성이 바로 생명의 은인에 대한 환자로서의 경건한 마음의 표시임을 알았다.
의사와 환자사이의 진정한 의미의 인간관계를 실감했다.
그녀는 시간 나는 대로 나를 집으로 초청, 이국의 허전감을 달래주었으며 틈나는 대로 병원을 찾아와 꽃, 과일 등을 한 아름씩 안겨 주었다.
이런 가운데 나와 그녀간의 인정은 하루하루 두터워져 갔다.
환자진료에 쫓겨 며칠을 찾지 않으면 그녀는 나를 찾아와 왜 놀러오지 않느냐 고 애교 섞인 원망을 보내기도 했다.
나 역시 처음 겪는 이국의 고독한 생활 속에서 그녀가 베풀어주는 따뜻한 인정은 더없는 즐거움이었다.
그러나 이런 속에서도 그녀의 건강은 날로 나빠져 갔다.
결장위문합부위협착증의 부작용으로 온몸이 여위어가고 있었으며 이 부작용의 발생빈도도 늘어가고 있었다.
나는 아무래도 이 여인의 건강을 정상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선 문합부위성형수술을 단행해야겠다는 생각으로 하루는 그녀에게 성형수술의 시행을 권했다.
그랬더니 「바 듕」은 이제 수술을 받는데 지쳤다면서 차라리 죽어 버리는 게 좋겠다고 수술을 거부하는 게 아닌가!
나는 어떻든 인정어린 이 여인의 생명을 구해야겠다는 결심으로 그 후 만날 때마다 수술에 응할 것을 설득시켰으나 좀처럼 마음을 굽히지 않았다.
나는 할 수없이 어느 날 이 여인에게 나의 귀국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마음대로 하라고 거짓말로 위협(?)했더니 그녀는 내가 귀국한다는데 자극받아서인지 선뜻 수술에 응하겠다고 마음을 굽혔다.
이렇게 해서 나의 집도로 「바 듕」은 식도결장문합부위의 성형수술을 받았는데 그 후 건강도 완전히 회복되어 정상인과 다름없이 일상생활을 영위하게 됐다.
이 수술을 계기로 나와 그녀간의 인정은 더욱 두터워졌는데 나 역시 임기에 쫓겨 그녀가 완전히 건강을 찾은 얼마 후 월남을 등지게 되었다.
월남의 전화 속에서 맺어진 이 인연은 지금도 나의 기억 속에서 떠나지 않고 있으며 「바 듕」의 남편과는 해마다 연하장을 주고받고 있다.
(후생일보 [임상야화], 74. 10.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