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영보 수필집]"네오 히포..."抄(37): [부고] 뱃지의 회상

by 심영보 posted Oct 21,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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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고] 뱃지의 회상

  나는 학생들의 단정한 모습에서 [부고]의 뱃지를 발견하기만 하면 항상 20 여년 전의 회상(回想)속에 빠져 버리고 만다.
  附中에 입학 하자마자 상급반 형들에게 이끌려 야구부에 들어가 방과 후면 매일 저녁 늦게까지 캣치 볼과 선배들이 아무렇게나 쳐낸 공을 주우러 뛰어 다니던 일. K선생님의 지도로 만든 1학년생 전원의 문예창작집(文藝創作集)을 받아들고는 자신의 작품을 읽고 또 읽어보면서 흐뭇해하던 일.
  전차(電車)밖에는 탈 게 없었던 그 무렵 서울역 밖 갈월동에서 성동역 앞 용두동 교사까지 실히 1시간 동안은 콩나물시루 같은 전차 속에서 빈약한 몸집을 한스러워 했던 일이며, 그렇게 해서 달려갔어도 이미 조회가 시작된 뒤면 별 수 없이 그 넓은 운동장에서 토끼뜀 한두 바퀴는 예사였던 일. 학도호국단(學徒護國團)훈련으로 학교로 부터 동구능(東九陵)까지의 힘겨운 왕복코스를 행군(行軍)하던 일. 수복(收復)직후 청량대(淸凉臺) 목조 기숙사의 몇 방을 교실삼아 책상도 없이 맨 마루바닥에 앉아 수업 받던 일이며 학생자위대(學生自衛隊)를 구성하여 밤마다 교대로 교사경비를 담당했던 일. 학교의 명예를 걸고 출전한 럭비 팀을 응원 나가서 목이 터지도록 외치고 손바닥이 붓도록 손뼉 쳐가면서 우승에 가슴 조려하던 일......등
  이런 추억들은 거리에서건 버스 안에서건 또는 나의 집무처에서건 어디에서고 [부고]의 산뜻한 뱃지를 단 학생을 만날 때면 언제나 나의 머릿속에 주마등과 같이 펼쳐 지나가는 화사한 그림들이다.
  그러나 이런  일련의 아름다운 추억들보다도 더욱 더 생생하게 나의 뇌리 속에 새겨져 있는 것은 학창시절에 들은 [정식의 4칙 풀이] 훈화이다.
  [정식의 4칙(整式의 4則)]이라 하면 이미 누구나 중학교 수학시간에 배워 알겠지만, 정식에 있어서
             ① (+) × (+) = (+)
             ② (+) × (-) = (-)
             ③ (-) × (+) = (-)
             ④ (-) × (-)  = (+)
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때의 어느 선생님께서는 이 4칙을 이렇게 풀이해 주셨다.
  ① 선량(善良)한 이 (+)가 옳다 (+)고 한 것은 당연히 옳은 (+) 것이요
  ② 선량(善良)한 이 (+)가 그르다 (-)고 한 것도 물론 그른 (-)것이다. 그러나
  ③ 사악(邪惡)한 이 (-)가 옳다 (+)고 한 것은 실제로는 그른 (-)것이며
  ④ 사악(邪惡)한 이 (-)가 그르다 (-)고 한 것은 실은 옳은 (+) 것이다.
이것은 바꿔 말하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② 黑을 黑이라 말할 수 있는 이여 그대의 정신은 바르고 맑도다.
  ④ 白을 黑이라 우기는 자여 그대의 속마음은 검을 지어다......등등
이 [4칙 풀이]는 두고두고 반추할수록 새로운 맛이 우러나는 명훈화(名訓話)라고 생각한다.
  세상만사에 인연 없음이 없듯이 내가 附中에 입학하게 되고 다시 附高로 진학할 수 있었던 것도, 그리하여 아득한 세월이 흐른 뒤인 지금까지도 [부고]의 뱃지만 보면 마음이 설레고 그 옛날 일이 어제 일처럼 되새겨 지는 것도 모두 나의 생애가 附中.附高와 인연을 끊을 수 없게 한 조물주(造物主)의 섭리가 아니겠는가.

              (서울사대부고 교지 「선농단」, 77년 1월 발행, [동문수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