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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幻想)의 소인화(素人畵)

  자화상(自畵像)을 한 점 달라는 주문이다. 그것도 흑백의 펜화로 말이다.
  그런데 나는 아직 내 스스로의 모습을 그려 본적도 없고 또 그럴만한 필재도 없다.
  아무려나 어느 때고 한번쯤은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을 거울에 비추어보면서 그 명암을 화폭에 옮겨 담아 볼만한 일이라면 이 기회에 한번 시도해 봄직은 하다.
  고요한 한밤중.
  요를 깔로 엎드려서 화폭을 앞에 놓고 장롱 거울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시선을 거울과 화폭사이로 오락가락 옮겨가면서 궁리해 본다. 그러나 막상 펜은 쉽게 움직여지지 않는다.
  다시 눈을 몇 번 껌벅여 보고 입도 씰룩여 보며 고개를 돌려 귀도 이쪽저쪽 바라다보지만 도무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는다.
  야속한 마음에 얼굴을 베개에 파묻고 다시 궁리에 잠긴다.
  그러기를 얼마... 드디어 자화상의 윤곽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눈에 확 뜨일 만큼 빼어난데도 없고 그렇다고 어디 한구석 크게 일그러진 데도 없는 그런 모습이다.
  다만 한 가지 오른쪽 뺨에 꼭 볼우물처럼 패여 져 있는 작은 수술흔적만 빼놓는다면.
  펜을 부지런히 옮겨간다.
  우선 둥글넓적한 얼굴 전체의 외곽. 그리고 거기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는 한 송이 딸기 모양의 코를 중심으로 해서 좌우의 균형을 잘 맞게 그려 넣는다.
  그리고 이 균형 속에는 나의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기를 좋아하지 않는 중용(中庸)의 생활자세가 담아지도록 명암을 배치한다.
  그것은 내가 철든 이후에는 여태껏 어느 데서고 돋보이는 게 싫어서 남의 손가락질 받는 말썽꾸러기 노릇도 못해 왔고 또 뭇입에 오르내릴 만큼 출중한 이가 되는 것도 면해 왔던 내 생활철학의 일부를 옮기고자 해서다.
  이마에는 두어 줄의 또렷한 주름살, 거기에는 특히 내가 별로 유족하지 못한 집안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겪은 적잖은 고생과, 또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자애에 굶주려 지내온 숨은 간난의 시절들을 새겨 넣는다.
  다음은 눈이다.
  눈은 얼굴 전체를 가늠하는 포인트요 인물전체의 인상을 좌우하는 열쇠이니 특히 잘 그려 넣으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내 눈은 스스로 예리하다고 자부하는 안광(眼光)을 좁은 열공(裂孔)속에 감추고 있는 형상이어서 그나마 마음에 들게 그려지기는 쉽지 않다.
다만 거기에, 이치에 닿지 않고 경우에 맞지 않는 일 따위를 용납하지 아니하고 무슨 일이나 될수록 합리적(合理的)으로 이끌어 나가려고 하는 나의 의지나, 선량한 바탕을 가진 자에게는 하해와 같은 관용(寬容)도 인자(仁慈)한 마음씨도 베풀 용의를 가진 나의 자세가 은연중에 스며 있도록 칠을 넣는다.
  입은 한일(一)자로 굳게 다물어진 의지 굳은 모습으로 그려 간다.
  그리고 그 모습 속에 좀은 고집스러울 만큼 의(義)는 숭상하되 불의(不義)는 남달리 미워하여 바른말 이르기를 서슴지 않는 나의 입버릇이 담겨 있게 한다.
  그것은 내가, 자신에게는 결코 손해가 되더라도 지금의 다수나 먼 장래의 우리의 동료를 위하여 이익이 되는 한, 비록 당장의 입에는 쓰다 하더라도 이를 반포(頒布)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나의 헌신성(獻身性)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다음은 귀의 차례이다.
  내 귀는 보는 이 마다 평가하기를 꼭 부처님 귀 같다고 한다. 그래서 어쩌면 내게 있어서는 이 귀가 유일한 보배일 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보배 역시 제 모습대로 그려 넣을 재간은 없다.
  그것은 부정한 말을 들을 때마다 냇가에 나아가 귀를 씻고자 하는 나의 결벽성(潔癖性)을 있는 그래도 그려 넣는 재주도 없고, 또 거기 청진기를 꽂을 때 마다 성실(誠實)하게 듣고 올바로 새겨 주는 속귀를 모두 들어내 보이는 방법도 없으니 말이다.
별수 없이 붓을 옮겨 얼굴 전체를 받치고 있는 목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목의 곡선을 어느 것이나 한껏 부드럽게 그려 나간다.
  그리하여 거기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이래 숙명적으로 잉태의 고통과 종속의 시련을 안고 사는 모든 이브에게 사랑과 관용과 인정을 나눠주는 페미니스트의 면모를 새겨 넣는다.
  그것이 비록 장부답지 못한 점의 노출이 된다 할지라도 나는 거기 개의치 않으며, 또 설혹 잠시나마 마음 쓰임이 간다고 하더라도 그때마다 우리의 어머님들의 지난날을 돌이켜보거나 또는 내 딸들의 앞날을 따져 보는 것으로 대상(代償)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화필은 드디어 가슴에 이른다.
  가슴은 자신만만하게 떡 벌어진 양 어깨로부터  꿰맴이 없는 천의(天衣)가 걸쳐 내려져 있는 당당한 모습으로 그려 나간다.
  그리고 그 옷자락에 <樂天>의 글자들을 전자체금박(篆字體金箔)으로 레이스처럼 그려 넣으면서 여유 있는 마음가짐이 오직 스스로에게 달려있음을  다시한번 되새겨 본다.
  ...문득 새벽을 알리는 교회의 종소리.
  깜짝 놀라 고개를 드니 장농 거울에 비쳐진 나의 자화상은 여전히 나를 괴롭히는 존재로 남아 있다.
  나는 그제 서야 내 왼쪽 뺨에 있는 볼우물이 거울 속에서는 오른쪽 뺨으로 옮겨가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는다.
  역시 거울에 비춰진 영상(影像)이 본디 모습의 완전한 재현이 될 수는 없는 모양이다.

                                 (의사신문, 테마에세이[자화상], 8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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