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 청 서 북 부 순 람 (忠淸 西北部 巡覽) (1)] <천안(天安)><천안 1>[광덕사(廣德寺)와 호두나무] 천안의 봉화산 자락에 위치한 광덕사는 마곡사(麻谷寺)의 말사 입니다. 이곳이 고려 때(700 여 년 전)의 신하 유청신(柳淸臣)이 원(元)나라에서 ‘호도나무’를 가져와 심어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퍼뜨린 곳이랍니다. 절 입구에 서 있는 400년 쯤 된 호두나무가 그 상징이라는데 나무의 나이로 보면 이건 그 훨씬 뒤에 심어진 것이겠습니다.
<천안 2>[시인 운초 김부용(雲楚 金芙蓉)의 묘] 조선(朝鮮) 3대 여류시인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지는 운초(雲楚) 김부용(1820-1869)이 평양감사 김이양(金履陽)의 부실이 될 때는 나이 18세의 기녀였는데, 대감을 모시면서 “초당(草堂)마마“로 불리던 그가 뛰어난 시재(詩才)를 발휘하여 대감과 사별하기까지의 16년 동안에 한시를 350 수나 남겼다 합니다. 대감과의 사별 후에도 절개로서 여생을 지내다가 김 대감의 고향인 이곳에 와서 묻혔다고 합니다. 비록 그 무덤은 초라하고 궁색해 보이나 후대에 세운 비석과 안내판이 운초의 빛나는 행적을 돋보이게 합니다.
<천안 3>[천원삼태리 마애불(天原三台里 磨崖佛)] 천안의 태학산(太鶴山) 자락, 법왕사(法王寺)를 한참 아래로 내려다 볼 수 있는 언덕에 작은 집채만큼 이나 큰 바위에 새겨 진 불상입니다. 보물 407호로 지정되어 있는걸 보면 예사의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천안 끝.> <아산(牙山)>
<아산 1>[용담사(龍潭寺) 석조약사여래입상(石造藥師如來立像)] 아산 평촌리에 있는 용담사는 옛 모습의 절집들은 모두 흔적 없이 사라지고 오직 이 돌부처 홀로 옛날을 기리는 듯했습니다. 여느 돌부처와 달리 돌의 두께가 얇아 <그래서 판불(板佛)이라고 한답니다.> 입체감이 아쉬웠는데 이런 구조적 특징 때문에 보물(제536호)로 지정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아산 2>[외암리 민속마을(外岩里 民俗마을), “이 참판댁(李 參判宅)” 사호 액자] 우리나라 3대 민속마을의 하나로 손꼽는(다른 둘은 한국 민속촌과 안동 하회마을) 이곳은 예안 이씨(禮安 李氏)의 집성 양반촌을 복원 재현해 놓은 곳인데, 건재고택, 송화고택, 이 참판댁, 참봉댁 등 많은 고택들 중에서 “이 참판댁“ 마루에 걸린 액자 하나가 눈에 띄었습니다. [고종황제 사호(高宗皇帝 賜號) 퇴호거사(退湖居士) 영왕 구세 서(英王 九歲 書)]<고종황제가 지어준 아호 ‘퇴호 거사’를 영왕(영친왕)이 9세 때에 씀>의 액자인데 이걸 바라보자니 무언가 근세역사의 파노라마가 휘돌아 가는 듯 했습니다.
<아산 3>[맹사성고택(孟思誠古宅)의 행단(杏壇)] 세종 때의 명 정승이며 청백리의 표상인 고불(古佛) 맹사성의 고택 앞마당에는 수령이 600년이 넘는 은행나무 두 그루가 심어진 <행단>이 있는데, 문하생들을 가르치던 강단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사당인 세덕사(世德祠)와 이웃에 있는 정자인 구괴정(九槐 亭)을 아울러서 [맹씨행단] 이라고 부릅니다.
<아산 4>[온주향교(溫州鄕校), 명륜당(明倫堂) 현판] 어느 향교엘 가도 ‘명륜당’은 으레 있습니다. 그런데 온주(溫州, 온양의 옛 이름)향교에서 만난 ‘명륜당’의 현판은 색달랐습니다. [신안 주희 서(新安 朱熹 書)]의 낙관 말입니다. 중국 남송(南宋)의 대 유학자 주희(朱熹, 1130-1200) 즉 주자(朱子, 주희의 존칭어)가 썼다고 되어 있으니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찾아보니 [신안(新安)]은 주희의 본관이었습니다.
<아산 5>[온주아문(溫州衙門)] 옛 온주(지금의 온양 溫陽)의 관아였던 데를 복원해 놓고 아문도 번듯하게 세워 놓았습니다. 한 때 경찰관 주재소나 동사무소 등으로 훼손되던 시절의 흔적은 말끔히 가셔져 있었습니다. <아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