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 서북부 순람 (忠淸 西北部 巡覽) (2)] <예산(禮山)><예산 1>[추사고택(秋史古宅)] (전경)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고택은 지금 남아 있는 부분만 하드라도 우리나라의 얼마남지 않은 대표적인 고택의 하나라고 합니 다. 솟을대문과 사랑채, 안채 등의 향과 창문의 배치 등을 두고 전문가들은 여러 가지를 손꼽는 것 같습니다. 그 외에도 이 집주 변에 배치된 조상의 묘, 추사의 묘, 증조모 화순옹주의 정려문, 추사가 심었다는 ‘백송’(천연기념물 106호) 등이 어울려 “추사고택” 이 더욱 돋보이는 것 같습니다.
<예산 2>[추사(秋史)의 초상화] 조선(朝鮮) 후기의 실학자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는 어떤 말 몇 마디로는 설명할 수 없는 큰 인물입니다. 다만 많은 사람들에게는 “추사체(秋史體)를 완성한 서예가로, 세한도(歲寒圖)와 묵란도(墨蘭圖)를 그린 서화가로, 그리고 북한산의 ‘진흥 왕 순수비(眞興王 巡狩碑)’를 읽어 낸 금석학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초상화에서는 온화하고 인자한 인품이 배어 나오는 듯합니 다.
<예산 3>[안채의 주련(柱聯)들] 고택의 건물 기둥마다 평소에 추사가 즐겨 썼던 글귀들이 그의 필체로 복각(復刻)되어 있고, 그 주련의 바로 아래에 그 글귀를 풀 어 쓴 쪽지를 붙여놓아 방문객들이 새삼스레 대인의 풍모를 읽게 합니다.
<예산 4>[세한도(歲寒圖)] 그 뿐 아니라 마루와 방 안 곳곳에는 그간 세상에 많이 알려진 추사의 ‘국보급 또는 보물급’ 작품들(물론 모두 복제품)이 걸려 있 어 보는 이들이 추사의 고결한 품격을 다시 한 번 만날 수 있게 해 줍니다. ‘세한도’는 추사가 제주에 유배 가 있던 시절에도 변 치 않고 도와주던 제자 [이상적](李尙迪, 1804-1865)에게 내린 ‘날씨가 추워져서야 소나무 잣나무의 푸르름을 알게 된다’ 는 뜻을 담은 국보 ‘제180호‘의 그림입니다.
<예산 5>[화순옹주(和順翁主)의 정려문(旌閭門)] 추사의 증조부 김한신(金漢藎)의 배필이 된 조선조(朝鮮朝) 영조(英祖)의 차녀 화순옹주(和順翁主)는 그의 부군[駙馬 김한신]이 먼 저 별세하자 식음을 전폐하고 왕(그의 아버지)의 명도 어기고 사실상 자진하자 훗날(正祖대에 이르러) 이를 기리는 정려문을 세웠 다 합니다. <예산 끝.> <당진(唐津)>
<당진 1>[솔뫼성지(聖地), 김대건신부(金大建 神父) 생가(生家)]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가 된 성(聖)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1821-1846)가 태어난 곳입니다. 김 신부의 조상 7대가 여기에 살았고 그 중 김 신부를 포함한 마지막 4대가 모두 이곳에서 태어났고 또 순교한 집안입니다. 소년 김대건은 이미 10세 때에 아버지에 이끌려 이 집을 나서 용인으로 이사 갔으며 15세에 신학공부에 나서 뒤(1845년)에 신부를 서품 받고 이듬해에 귀국하였다가 새남 터에서 순교했습니다. 그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품(聖人品)]에 오른 것은 1984년입니다.
<당진 2>[김대건 신부상(金大建 神父像)] 생가 앞에 있는 소상이나 이 동상이나 김대건 신부의 모습은 한 결 같이 한복차림이고 앳된 표정입니다. 25세의 나이에 사제가 되 고 그 이듬해에 순교하고 말았으니 나이가 더 익을 겨를도 없었겠지요. 그러나 그가 오늘날 우리나라의 천주교 교세가 지금에 이 르기까지의 최초의 파종자(播種者) 임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솔뫼 성지]가 더욱 성스러워 보이는 소이 이기도 합니 다.
<당진 3>[성(聖) 안드레아 김대건신부기념관(金大建神父紀念館)] 건립 된지 오래지 않은 [성 안드레아 김대건신부기념관]의 입구 겉모습입니다. 기념관 성당과 함께 현대식 건물로 지어져 있었는 데 개관시간 전이라 안은 들여다보지를 못했습니다. <당진 송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