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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한듕록(恨中錄)>에 대하여

비운의 왕자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비(妃) 혜경궁 홍씨(1738-1815)는 영의정 홍봉환의 딸이며 정조의 어머니입니다. 그가 남긴 <한듕록>은 남편의 억울한 죽음과 그 당시의 사건들을 사실적으로 기록 한 책으로 궁중문학의 효시가 되었습니다.
<한듕록>은  혜경궁 홍씨가 회갑이 되었을 때 쓴 것으로 원문이 한글로  <한듕록>으로 표기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가람 이병기선생이 <한듕록>에  처음으로 <恨中錄>이라는 한문 표기를 했습니다.
그러나 혜경궁 홍씨가 이 작품을 쓸 때는 과거의 비극을 회상해서 이미 원한이 삭은 노후(정조 19년) 한가한 중에 쓴 것이기 때문에 <閑中錄>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혜경궁 홍씨의 <한듕록>은 <恨中錄>이고 <閑中錄>입니다. 또 이 글은 혜경궁 홍씨가 차마 발설 못할 일을 눈물로써 기록한 내용이기에 <읍혈록(泣血錄)>이라고도 합니다.
비극의 뒤주왕자 사도세자는 영조의 나이 40세가 넘어서 태어나 2세때 세자로 책봉이 되고 10세때 혜빈 홍씨와 가례를 올렸습니다. 사도세자는 3세때 이미 부왕과 대신들앞에서 효경을 외웠고 7세때는 시를 지어 대신들에게 나누어주어 영조를 기쁘게 했습니다. 그는 성격이 활달하고 똑똑했던 왕자였습니다.  
사도세자가 15 세되던 해 영조는 그를 왕을 대신하여 정사를 돌보도록 하는 세자 섭정을 하여 왕위 수업을 시켰습니다.  이 때는 소론 노론이 당쟁의 정점에 올라 있었는데 서로 왕세자를 등에 없고 권력을 휘두르려는 음모가 시작되었습니다. 의원을 시켜 인삼, 부자같은 약을 지나치게 복용케 하여 화기를 돋구어 음행을 하게 하고, 관노를 부려  민가에 가서 난폭한 행동을 하게 하고, 영조 모르게 관동팔경을 유람하게 하고, 궁녀를 농락하여 죽게합니다. 노론이 일을 꾸미면 소론이 고해 바치고 소론이 일을 꾸미면 노론이 무고했습니다.
영조는 성격이 급하고 과격하여 세자에게 비행을 문책하고 영문을 모르는 세자가 변명을 하면 영조는 더욱 분노했습니다. 세자는 부왕의 질책에 심한 정신 갈등을 나타냈습니다. 영조는 결국 세자에게 자진(自盡)하라고 하나 세자가 자진을 못하자 뒤주에 가두라고 명합니다. 세자는 뒤주 속에서 9일간이나 신음하다가 그 속에서 굶어 죽고 맙니다. 나중 그의 시체는 오그라 들어 펴지지를 않았으며 그의 손톱은 뒤지를 긁어대어 빠지고 새까많게 타들어갔다고 합니다. 세자의 나이 28세였습니다.
혜경궁 홍씨는 남편이 변을 당한 직후에는 글을 쓸 엄두도 못하다가, 만년에서야 붓을 들어 보태고 써서 오늘날의 장편이 되었습니다. 글을 쓴 직접 동기는 사도세자 사건 때문에 비난을 받는 친정아버지의 결백을 손자인 순조에게 읽히기 위해서였습니다.
혜경궁 홍씨는 자기가 겪은 시련을 밝히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고 더구나 궁중비사를 공개하는 것도 주저되는 일이어서 최대한 자제력을 발휘해서 법도에 맞고 우아하고 품위있는 문장으로 이끌어 갔습니다.
사도세자의 참사는 걸출한 왕이라고 알려진 영조가 사실은 편벽되고 조급하고 경솔한 성격을 가졌기 때문에 빚어졌으며, 그 이면에는 당쟁이 작용하고 있으므로 사태가 더욱 악화되었음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만백성의 어버이로 높은 가르침을 베푼다고 한 왕이 자신의 경직된 성격때문에 정신질환을 일으킨 아들을 죽인 것은 비윤리의 표본으로 이같은 심리의 문제에 윤리의 칼로 재단을 했습니다.  
작자는 윤리의 규범을 그대로 인정할 수 밖에 없었기에 영조에 대해서 한마디의 비난도 하지 않고 남편에 대한 슬픔을 드러내놓고 표현할 자유도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시련을 견디어내고 지난 일을 끈기있게 파헤쳐 진실을 밝혔으며, 사도세자 사건 관계자들 가운데 누구보다도 진실을 밝히는데 집요하고 슬기롭고 강인했습니다.
작품의 겉에 직접 나타나 있지 않지만 영조와 작자의 대결을 통해 명분론격인 가치관을 무너뜨리는 실로 심층적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혜경궁 홍씨는 왕세자의 비로 비극을 체험하고, 자신의 아들 정조가 왕위를 이어 모후로서 영화를 누리다가 81세로 죽었습니다.
당시 문학은 한문학으로 격식을 갖춘 글을 쓰는 것을 본령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므로 한글은 ‘안글’로 부녀들 사이에 편지를 쓰고, 제문을 짓는 정도로 용인되었습니다.그 후 언간이라는 이름의 국문 편지가 상하없이 애용되기 시작하면서 국문을 이용해서 글을 짓는 의욕이 확대되기 시작하여 실기문학과 가사문학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혜경궁 홍씨의 <한듕록>은 실기문학의 첫장을 장식합니다.

8 – 최치원(崔致遠, 857-?)에 대하여

한문학의 시조라 할 수 있는 최치원은 통일신라 말기(서기 857)에 경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영리하고 공부를 좋아했는데 12살의 어린 나이에 당나라에 유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유학의 길에 오르는 아들에게 “10년 안에 과거에 급제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 고 말했다 합니다.
최치원은 당나라에 도착 후 6년만인 18세때 과거에 급제해서 문장가로 인정을 받고 당나라의 벼슬길에 올랐습니다.
당시 당나라는 황소(黃巢)라는 사람이 난을 일으켜서 어수선했습니다. 이에 최치원이 <격황소서(檄黃巢書)>를 지었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입니다.
“천하 사람들이 모두 그대를 내놓고 죽일 생각을 하고 있고, 땅속의 귀신들 또한 그대를 은밀히 죽일 것을 의논하고 있도다.” 이 격문을 읽은 황소가 놀랍고 두려워서 자기도 모르게 의자에서 미끄러져 떨어졌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최치원은 황소의 난이 평정 된 884년 27세의 청년이 되어 신라로 돌아왔습니다. 때는 신라 헌강왕이 다스리던 시기로 신라가 한창 풍요를 누리던 시절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부패하고 사회가 어지러웠던 시절이었습니다.
최치원이 외국유학에서 공부한 실력을 펴고자 했으나 엄격한 신분사회였던 신라에서는 최치원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는 성골, 진골 다음인 육두품 출신이었습니다. 6두품은 진골 귀족 다음 가는 혈통이었지만 아무리 재질이 뛰어나도 관직은 17개 등급 가운데 제6-13등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골품제도에 회의를 느끼고 가야산으로 들어가 도인들과 벗하여 유유자적하면서 끝내 속세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의 은둔은 패망의 기미가 더해가는 신라를 바로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이미 후삼국의 싸움이 벌어졌고, 신라는 퇴락하고, 그렇다고 해서 후백제나 고려를 택할 용단을 내릴 수도 없는 상황에서 찾은 최선의 길이 아니었던가 합니다.
최치원이 지은 글은 아주 많습니다. 등과 전후인 소년시절의 것만 해도 상자에 가득했었다고 하는데 마음에 들지 않아서 모두 버렸다고 합니다.
지금 전해지고 있는 그의 작품은 황소의 난이 일어났을 때 종군기간 중에 지은 1만여수 중 일부만 추려 헌강왕에게 바쳤다는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입니다.
“필경(筆耕)”이란 문필로 생계를 유지했다는 뜻이라고 스스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밖에 사산비명(四山碑銘, 네승려를 위한 비문)이 있습니다.
이조 성종대의 서거정(徐居正, 1420-88)이 중심이 되어 만든 시문집을 집대성한 책 <동문선(東文選)>을 보면 거기 실린 신라인의 작품이 모두 192편인데 그 가운데 최치원의 것이 146편이나 되어 그의 무게를 알 수가 있습니다. 후대에는 최치원을 일컬어 ‘동국문종(東國文宗)’이라 했습니다. 중국인의 안목으로 보더라도 그의 작품은 흠잡을 데 없는 수준의 작가임을 말해줍니다.
15세기 문인 성견은 “우리나라 문장은 최치원으로부터 시작하였다”고 평하고 있습니다.

9 - <동문선(東文選)>에 대하여

이조 성종대는 많은 종류의 서적이 편집 출간되어 조선 전기의 관인문학의 전성기라고 합니다. 이 시대의 학문을 이끈 주역은 서거정(徐居正, 1420-88)이었습니다. 서거정은 집현전 출신으로 성삼문보다 2살 아래였습니다. 서거정은 왕조의 사업이 최고조에 달한 성종때 활동하면서 무려 23년동안이나 대제학을 지냈습니다. 그는 실로 자신의 지위와 사명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가졌던 사람으로 고려 전기에 김부식이 하던 구실을 담당했습니다.  
성종대의 왕조사업은 역사, 지리, 문학, 음악등을 집대성한 서적들을 편찬한 일입니다. 신라에서 고려 말에 이르는 역사책인 <동국통감(東國通鑑)>, 팔도지리지인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시문을 모은 <동문선(東文選)>그리고 당시까지의 악보를 총 정리한 <악학궤범(樂學軌範)>등은 귀중한 문화 자산입니다. 서거정은 이들 서적 편찬에 두루 관여 했는데, 그 중에 특히 그가 힘을 기울인 것은 <동문선>입니다.
<동문선>은 시문선집으로 총 130권으로 되어있는 방대한 문학 총서입니다. 이 책은 목록만 3권이나 되며 합본은 45책으로 되어있습니다.
이 책에는 신라의 김인문, 설총, 최치원등을 비롯하여, 고려와 조선 초기 까지 약 500명에 달하는 작가들의 작품이 있고 작품 4,302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중 신라인의 작품이 모두 192편인데 그중 최치원의 것이 146편이나 실리어 그가 문장의 대가였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서거정은 역대 문인들의 글을 실리는 취사선택의 기준을 ‘사리가 순정하고 치교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시문이 삼국시대에서 시작되어 고려를 거쳐 자신이 살고 있는 당대에 이르러 꽃을 피웠다고 쓰고 있으며, 역대의 빛나는 시문이 중국의 것과는 확연히 다른 특질을 가진 우리의 것임을 강조하고 이를 집대성하여 후세에 전할 필요를 느껴 왕명으로 <동문선>을 편찬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우리 동방의 문(東文)’이 중국 역대의 문과 병행하여야 마땅하다고 하고서 당시까지의 한문문학이 중국의 경우와 대등하다는 자부심과 우리의 문학이 풍부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방대한 유산을 정리하는데 힘을 쏟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문학관은 새롭거나 창조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시가 중국에 비해 손색이 없다고 하면서도, 이미 이룩된 규범을 존중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즉 옛사람의 문구를 따라 옛 것을 존중하고 따라하는 용사에 힘쓰라고 했습니다.
<동문선>에는 오언율시, 칠언율시, 어언절구 등 총 55종의 문체가 있어 중국의 <문선(文選)>에 나타난 39종보다 많습니다. 승려의 작품 29명과 저자를 밝히지않은 인물도 있고 1편만 실린 작가가 220명에 이릅니다.
4,302편의 시문 가운데 시는 약 1천편이고 나머지는 문장입니다. 문장의 종류별로 보면 조칙(임금의 뜻을 널리 알릴 목적으로 적은 문서), 축문(제사때 신명에게 읽어 고하는 글), 첩(부치는 글)등 의례성 문장이 1,130여편, 임금에게 올리는 글인 표전이 한 분야에 40여편이 있습니다.
이런 문장의 선택 방향으로 볼때 <동문선>은 지배층의 봉건적 상하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고 통치층의 권위를 드러내려는 전형적인 관료적 문학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도량문(불도를 닦는 일), 재사, 청사(불교에서 불보살을 청하거나 사자의 영혼을 부르는 글)등 도교와 불교 관계의 의례문이 195편이나 있고, 승려의 비명이나 탑명, 불교의 교리를 설파한 원효의 불서 서문과 승려의 시 82편이 실려 있어서 당시 지배층이 반드시 유교적인 것만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동문선>은 지배층의 시문만을 모았다는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삼국시대 이래 조선 초기까지의 문학 자료를 한 권의 책에 집대성한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집니다. 동시에 우리의 문학을 중국의 것과 병행하여 독자적인 것으로 인식한 점은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특히 <동문선>은 신라, 고려시대의 기록과 도교, 불교 관계 자료가 풍부하여 중요한 문화 자산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10 - <순교자(殉敎者, The Martyred)>에 대하여

6월은 우리에게 여전히 6.25의 달이다. 6월에서 6.25의 瑛岵?없어지려면 아직도 반백년은 지나야 할 것같다. 6.25를 체험한 세대와 6.25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다 죽은 후에야 역사적인 한 사건으로 묻혀버릴 것이다. 더구나 미국에 사는 옰宕涌“?6.25는 가끔 들여다보는 낡은 사진첩에 불과할 것이다.
그런데 6.25는 문학속에서 하나의 불꽃처럼 타올라 꺼지지 않은 등불같은 존재로 남는다. 이것이 문학의 경이로움이다. 이런 맥락에서 6월에 먼저 떠오르는 작품이 김은국(金恩國, Richard E. Kim)의 <순교자(The Martyred)>이다.
<순교자>는 1964년에 뉴욕에서 출간되었는데 이 책은 단번에 미국에서 베스트 셀러가 되었고 저자 김은국은 도스토예브스키나 알베르트 까뮈와 견주는 세계적인 작가가 되었다. 물론 이 책은 영문으로 쓰여졌다. 당시 평을 기록해 본다.
“훌륭한 작품이다. 하나의 사건을 통해 신에 대한 인간적인 믿음의 보편성을 나타내고 있고, 신을 긍정하려는 갈망에서 오는 의혹과 고뇌를 다루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김은국은 이 어려운 작업을 해 냈다 “ – 펄 에스. 벅(1892-1973)
”순교자는 구약성경의 욥기, 도스토예브스키, 알베르트 까뮈의 위대한 도덕적 심리적 전통위에 서 있다.” - 뉴욕 타임스
오래 전에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을 위해 이 이야기를 간추려본다.
연합군에 의한 평양 진주 바로 직전 공산당에 의해 평양 시내 기독교를 대표하는 열네명의 목사들이 체포되어 처형됐는데 이중 두 사람만 살아 남았다. 이 책의 화자(話者)이며 주인공인 이대위(李大尉)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를 하게 되어 살아남은 두 목사를 만난다. 그중 한 목사는 현장의 충격으로 광인(狂人)이 되었고 신이라는 성을 가진 다른 목사는 목회를 하고 있었다.
열두 목사가 죽었는데 신목사는 어떻게 살아 남아 목회를 하고 있을까? 신도들은 신목사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신도들은 죽은 12명의 목사들을 순교자의 반열에 올려야 된다고하며 신목사를 가룟 유다라고 판정을 내린다. 이대위가 침묵하는 신목사를 집요하게 취재를 하는 중 목사들의 처형에 직접 가담했던 북한군 소좌(少佐)의 진술을 듣게 된다
“12목사들이 꼭 개처럼 죽어갔다는 얘기를 들려줄 수 있게된 것은 큰 기쁨이요. 꼭 개처럼 훌쩍거리며, 살려달라고 애원을 하고, 자기네 신(神)을 부정하고 동료들을 헐뜯는 꼬락서니는 과연 보기만해도 즐거웠어. 그들은 개처럼 죽은거야. 알겠어? 하나님을 믿는 목사들이라고? 모조리 죽여 버렸어야 하는 건데!”
그리고 살아남은 두 사람에 대해서는... 한사람은 미쳐버렸기 때문에 죽이지 않았고 다른 한 사람 신목사에 대한 진술이다.
“그는 감히 내게 대항해 온 유일한 친구야. 네가 믿는 하나님을 부정하면 살려주겠다고 했더니 나에게 침을 뱉더군. 난 당당하게 싸우는 것을 좋아해. 저 자(者)는 용기가 있더군. 내 얼굴에 침을 뱉을만큼 배짱있는 친구는 그 자 하나 뿐이었어. 나는 내게 침을 뱉을 수 있는 자를 존경해. 그래서 그 자만 쏘지 않은거야.”
그런데 이대위에 의한 신목사의 진술은 좀 다르다. 신목사는 죽음을 눈앞에 둔 14목사들은 그중 대표격인 목사에게 기도를 부탁했는데 ‘나는 당신들을 위해 기도할 수 없소. 정의롭지 못한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싶지 않아!’하고는 절대 고독 속에서 죽어갔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총살당한 목사들은 진정한 순교자였고 어쩌다 살아남은 자신은 가룟 유다임에 틀림없다는 고백이었다.
신목사가 신을 부정하면서 목회를 계속하는, 진실과 다른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은 무슨 뜻인가. 신목사를 통해 이해하는 것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에 의한 구원보다는 인간 스스로가 인류를 위해 무엇인가 현실적인 사랑의 방법을 찾아야한다는 이야기이다. 그는 목사이면서 신을 부정하는 배신자를 자처하지만 실은 전쟁과 굶주림과 추위와 질병, 고통받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희망을 주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까뮈의 작품 <페스트>의 주인공이 흑사병으로 온 마을 사람들이 죽어가는 도시에서 신은 없다고 외치며 환자들에게 치료를 해주고 주검을 묻어준다. 김은국의< 순교자>가 까뮈의 인간에 대한 실존적 사랑을 표현한 것과 같은 점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대위가 신목사의 진실되지 못한 행동을 끝가지 비판하지 못하는 것은, ‘결국 진실이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라는 물음 때문이다. 그 해답은? 신에 대한 부정과 함께 실존적 인간 구원에 대한 사랑의 정신이 바로 진실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을 <순교자>에서 말하고 있지만, 그 답은 각자 독자의 몫이다.
<순교자>는 6.25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지만 전쟁소설은 아니다. 이 책은 전쟁과 죽음을 배경으로 인간의 고뇌와 진실을 보여주는 책이어서 다시 한번 필독(必讀)을 권한다. 이만한 깊이와 무게를 지닌 책을 요즈음 찾기 힘들다.



  • ?
    김 혁 2009.03.28 22:36
    임수자 후배님,

    우리 7회 홈에서 만나게 되어 반갑고
    좋은 글까지 올려 주시니 고맙습니다.

    우리 홈에는 미국 SF에 사시는
    13회 김현세 후배와 미강 후배가
    우리 홈 가족입니다.

    앞으로 서로 인사를 나누고 가까운
    동창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 ?
    임수자 2009.03.29 00:32
    7회 김혁 선배님, 저를 따뜻하게 환영해주셔서 고맙습니다.
    13회 김현세, 미강 두 선배님 반갑습니다.
  • ?
    미강 2009.03.30 09:42
    안녕하셔요 !
    저는 부고출신도 아닌데
    어찌어찌하다가 김혁 선배님께서
    낑가주셔서 이제껏 이 안에서 지내왔습니다.

    또 쓰신 글을 보니 너무 잘 쓰셔서 저는 기가질려
    어쩌나 하다가 이제야 인사드립니다.
    부족한점 많으니 이끌어 주시기바랍니다 .
    안녕히 계셔요 .
    쌘프란 씨스코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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