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제 글쓰기는 책 읽는 이야기부터 해야될 것 같습니다. 책이야말로 나무의 뿌리에 해당되니까요. 책 읽는 것이 마치 나무에 있어서 든든한 뿌리인 것처럼 글짓기의 바탕이 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6살때로 기억합니다. 우리 어머니가 내가 고집을 부린다 싶으면 언제나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내 남동생 세발 자전거를 사주러 화신백화점엘 갔는데 내가 그림책과 인형을 끌어 안고 놓지를 않더랍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사주었는데 인형은 헝겊이 다 낡아 솜이 삐져나오도록 끼고 다니고, 그림책은 다 외워서 누가 ‘고양이 이야기 해보렴’하면 망설임없이 줄줄 외웠다고 합니다.
그후 작가의 이름이 있는 책을 읽은 것은 6학때 쯤입니다. 나하고 단짝이던 영숙이라는 아이가 어느 날부터 담임선생님 집으로 공부를 하러 간다는 거였어요. 나는 뭔지도 모르고 함께 갔는데 그게 과외공부하는 거였습니다. 나는 철딱서니없게 영숙이 공부하는 것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함께 집으로 오고는 했는데 그때 담임 선생님이 나에게 시험지 채점을 시키던지 아니면 책을 던져주면서 읽고 있으라고 했습니다.
그때 주신 책이 김내성 작 <쌍무지개 뜨는 언덕>이었습니다. 이 책을 집에 가지고 와서 밤 새도록 훌쩍이며 읽었는데 지금은 제목밖에 생각이 안나지만 슬픈 책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이 내가 읽은 최초의 소설책이었습니다.
그 후 중학교에 들어가서,중학교 1학년 때는 국민학교의 연장인양 망아지처럼 뛰어 놀았습니다. 실지로 사대부중 1학년 7반은 의붓자식인양 사대2층 강의실에 떨어져 있어서선생님들의 눈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노는 시간에 말타기까지 했지요. 담임 선생님이 주봉학 선생님이셨는데 여학생들이 말타기같은 놀이를 했다며 짐짓 엄하게 꾸짖으시다가 웃으셨어요. 그래서 그 놀이를 그만 두었던 것 같습니다.
사대부중 케비넷 도서실 - 그러다가 2학년 6반이 되었는데 혹 기억하시는 동창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앞 문을 열고들어가면 바로 벽에 세워진 캐비넷이 하나 있었습니다. 캐비넷의 손잡이를 비틀어 문을 열어보았는데 그 속에 책이 꽉 차있었습니다. 붉은 커버였는데, 학원사 발행 세계 위인전 200권과 다른 책들이 모두 3백권쯤이었습니다. 이런 문고가 다른 교실에도 있었는지 2학년 6반 우리 반에만 있었는지 그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3학년 때는 이런 문고가 없었던 걸로 봐서 어쩌면 2학년 교실에만 있었던 게 아닌가 합니다.
저는 키가 작아서 늘 앞에 앉았는데 바로 캐비넷 앞이 내 자리가 되었습니다. 캐비넷 속에 들어차 있던 책들은 나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습니다.
세계위인전 제1권은 <플루다크 영웅전>이었습니다. 이 책을 누가 썼냐 하면 박시인 교수였습니다. 그 때는 박교수가 누구인지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우리 동기 중의 박시영이라는 학생이 있는데 그 분이 곧 그 애의 아버지였습니다. 그 분은 서울대학교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는 교수였습니다. 그 분은 영문학 교수였으면서 나중에 <알타이 신화>라는 책을 썼는데 우리 민족의 역사가 5천년이 아니라 알타이 신화가 만들어진 1만년이라는 주장을 해오신 분입니다. 이것은 제가 상당히 아끼는 책입니다.
어쨌든 이 케비넷 속에 있는 책들을 한 권씩 읽어 갔던 기억이 납니다. 다 읽었는지 선별해서 읽었는지는 기억에 없습니다. <이순신>, <세종대왕>, <베토벤>, <쇼팡>, <큐리부인>, <나폴레옹>, <간디>, <링컨> 등등, 그 뿐 아니라 <폭풍의 언덕>, <제인 에어>, <홍당무>, <키다리 아저씨>, <삼국지> 같은 책들도 읽었습니다.
그 때 읽은 <삼국지>는 간추린 것이었고, 고등학교때 읽은 <삼국지>는 박종화의 <삼국지>였습니다. 그후 이병주의 <삼국지>와 이문열의 <삼국지>를 읽었는데 박종화의 <삼국지>가 제일 재미 있었습니다.
저는 그때 케비넷에서 책 한 권을 읽고 가져다 꽂아놓고, 다음 책을 읽고 꽂아놓고 하면서 캐비넷 속의 책을 거의 다 읽었던 것 같습니다.
다른 학생들도 나처럼 이 케비넷 문고를 즐겼는지 그 것은 잘 모르겟습니다. 뒤에 생각해보니 이 케비넷 도서실은 나에게 엄청난 영향을 준 것이었습니다. 그 시기에 읽어야 될 책들을 그 곳에서 다 읽었으니까요. 좋은 학교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 아니겠습니까. 누가 읽던 안 읽던 책을 비치하고 선택하게 했으니 참으로 좋은 기회를 저희가 갖게 된 것입니다.
그 후 고등학교에 가서는 사춘기라는 이상한 시기에 접어들어서인지 내 독서 경향은 사뭇 반항적이다시피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더 이상 위인전은 읽지 않았으니까요. 캬뮤의 <이방인>, <전락>, <페스트>, 사르트르의 <구토> 같은 실존주의 작품을 읽으면서 내 지적 향상이 갑자기 비상했던 것 같습니다. 헬만 헷세의 <유리알 유희>, <싯달타>, <데미안>,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 <지성의 양식>, <전원교향곡>, 톨스토이의 <부활>, <안나 카레니나>, 투르게네프의 <아들과 연인>, 도스토에프스키의 <죄와 벌>, <카라마조프의 형제>등 마구잡이 다독의 시절이었습니다. 이광수의 <단종애사>나 김동인의 <젊은 그들>을 읽기도 하면서 한 사건을 놓고 서로 다른 의견을 갖는 것에 주목하였습니다. 소설가의 의식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았다고 할까요.
내가 소설 책 읽는 줄도 모르고 우리 어머니는 “언니는 공부하니 네가 설겆이 해라” 하시면서 내 동생에게 부엌 일을 시키셨습니다. 어머니는 내가 공부하는 딸이라는 착각속에 사시다가 돌아가셔서 제가 많은 죄를 지은 것 같습니다. 그때 국어시간이란 구인환 선생님의 시간과 조문제 선생님의 고문 시간이었는데 정말 재미 없었지요.
그리고 대학에 갔습니다. 저는 중학교와 교등학교에 진학했던 것처럼 서울대학은 당연히 들어가는 우리 학교인 줄 알았지요. 공부를 안해도 말입니다. 대학입시에 덜컥 덜어진 거예요. 1차 떨어졌으니 2차를 가라는 거였어요.
2차 사정회를 하는 날이었습니다. 저는 2차든 3차든 대학을 안가겠다고 뻣대고 있었는데 태상근 선생님(별명이 ‘게다가’인 기하 선생님)이, ‘그래 네 말이 맞다. 네 얼굴이 반반하니 부고 나온 간판을 가지고 시집이나 가라’ 말씀하는 거예요. 그 말을 듣고 막 눈물이 났어요. 뭐가 그리 억울한지 막 울었습니다. 그때 조문제 선생님이 ”너 이리 온나”하면서 저를 불렀어요. “니 대학 안가면 크게 후회한다. 대학은 야, 야, 다 똑 같다. 이 대학가면 니는 장학생으로 가게 된다. 내가 추천할끼다.” 그러면서 가방을 열고 입학원서를 거내 주시는 거였습니다. 그 때 저는 처음으로 건국대학이라는 데도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건국대학으로 가니 저는 절대 고도에 홀로 떨어진 듯 무척 고독했습니다. 그 대학에는 선배도 후배도 없었습니다. 유난히 남도 사투리가 많았고 온통 시골학생들이었어요. 그 때의 고독이 얼마나 쓰렸는지 어찌 할 바를 모르고 대학 노트에 마음을 쏟아내기 시작했어요.
걱국대학에는 작가 임옥인 교수가 창작교실을 맡고 계셨는데 그 분은 늘 내 글에 ‘떫은 살구맛’이라고 평을 하셨어요. 건국 대학에서 나는 대학 신문기자를 했는데 이 때 기사 쓰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대학신문의 주필이 박승훈교수였는데 이 분이 그 때 ‘비트제너레이션’의 한국 기수를 자처했던 사람이었어요. 비트의 그 허무주의를 그 때 그를 통해서 알게 되었어요.
대학 4년 동안 고독한만큼 책을 많이 읽었던 것 같습니다. 세계전후문학전집, 삼성출판사에서 나온 세계문학전집을 섭렵(涉獵, extensive reading)했던 것 같아요. 이어령의 <흙바람속에 저 바람속에>를 읽으며 이 분은 나의 우상이 되었습니다. 방학에는 도서실에서 50권정도의 책을 빌려 쌓아 놓고 읽었습니다.
이 때는 조금 체계적인 독서를 했던 것 같습니다. 한국의 고전을 이때서야 들여다 보았습니다. 우리는 지나치게 외국문화, 외국문학에 의존했었습니다. 김일근 주임교수께서 한국의 ‘언문 서간문’으로 박사학위를 준비하시는 것을 도와드리며 헤경궁 홍씨의 <한듕록(恨中錄, 임수자 7)>을 읽으면서 한국문학에 깊은 애착을 갖게 되었습니다.
많은 책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은 데모 밖에 하는 일이 없던 세대(6.3 데모)를 살면서, 달리 할 일이 없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건국대학에서 저는 교수님들의 사랑과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대학 졸업하기 전에 ‘신춘문예’에 당선되고싶다는 무모한 열망으로 마구 썼는데, 당선 될 줄 믿고 ‘당선소감’도 몇 개 미리 써 놓았는데 하나도 안되었습니다. 그 때마다 고독과 절망감으로 내 젊음이 망가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저는 그 때 느꼈던 절망과 고독을 생각하면서 지금도 소스라치게 놀라고는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때의 글은 엉성하거나 불신에 차있었지요. 요즈음 인생을 많이 살고부터는 아, 인생이란 게 원래 고독한 것이구나 하면서 받아들이고 용해시키며 뭐라고 할까요 인생을 관조한다고 할까요. 글은 나이와 깊은 상관 관계를 갖는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음악의 천재, 미술의 천재, 컴퓨터의 천재는 있는데 문학의 천재는 없습니다. 문학은 계속 써나아가는 것이지 반짝이는 천재성으로는 그 생명이 짧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문학은 인생과 함께 늙으며 삶속에서 울어나오는 것입니다. 물론 그냥 생존만 한다면 가치가 없겠지요. 일상의 삶의 가치 추구가 병행되어야함은 물론입니다.
그래서 글은 나이를 먹을수록 가치에 대한 성찰(省察)을 할 수 있어서 나이 먹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입니다. 제가 그 실험을 했다고 해야 하는데. 늦게 폭발하듯 말입니다. 이것은 변고에 해당하기도 합니다만, 저는 인생에 있어서 변고는 때로 있어야하는 전환기(Turning Point)라고 생각합니다.
건국 대학에서는 부속중고등학교를 설립했는데 졸업을 앞두고 저보고 그 학교 선생이 되라고 학장선생님이 그러셨어요. 저는 그때 교사 보다는 최소한 신문기자라도 되고 싶어서 신문사에 이력서를 넣어놓고 시험을 치루고 다녔습니다. 몇번 떨어지고 나니 실망이 컸습니다. 내가 실력이 없어서 떨어졌는데 ‘내 실력을 몰라본다’고 원망을 했어요.
그러다가 일본항공이 한국에 처음 들어와서 직원모집을 한다는 광고를 보았습니다. 시험을 치루게 되었는데 신문사 시험공부를 했던 터라 일본항공 시험은 쉽게 느껴졌습니다. 일본항공에 입사하고 보니 신문사나 학교 선생의 월급의 배나 되었어요. 돈맛을 알게 되니까 선생노릇을 왜 하나 싶었습니다.
그러다가 시집가고 애낳고 살림하고 살면서 그렇고 그런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생활의 때가 덕지덕지묻고 좀 더 큰 아파트로 이사하는 작전을 짜고 0순위 통장을 갖고 있던 천박한 때이기도 했습니다. 천박하다는 표현은 내가 현재의 삶을 부정하는 뜻에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 꿈이 없는 삶속으로 함몰했다는 표현입니다.
항공회사에 있으면서 미국으로 이민가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때는 이민가는 사람들이 부럽다기 보다는 의아한 생각이었지요. 미국과 구라파에서 연수를 받으며 틈틈히 들여다 본 구라파나 미국은 여행을 하기에는 재미있는 곳이지만 그나라에 가서 산다는 것은 좀 더 생각해 볼 문제라고 봤습니다.
80년대에 남편이 싱가폴 H일보 지사장을로 나가면서 우리 집에도 해외 바람이 불었습니다. 싱가폴은 도시국가로 며칠은 산뜻하고 살만하더군요.
싱가폴에 정착하기 전에 미국 여행이나 하자고 애들과 남편, 나 이렇게 4식구가 미국에 여행을 했습니다. 그 때는 주로 남편 친구를 방문했는데 텍사스에서 목회를 하는 남편 친구가 이중언어 비서가 필요하니 함께 일하자고해서 미국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싱가폴보다는 ‘미국이다’ 이렇게 생각한 거지요. 트렁크 3개 가지고 여행 온 사람들이 미국에서 정착해서 살자니 어려운 일이 많았습니다.
시집살이 맵고 짜다는 말이 있지만 저에게는 미국이민생활이 정말 맵고 짜더군요. 뭘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었지요. 운전을 할 줄 아나, 영어를 제대로 하나, 햄버거를 만들 줄 아나, 빨래를 할 줄 아나, 김치도 미국에 와서 처음 담가 보았어요.
나의 미국 이민생활 정착에 많은 도움을 준 친구가 여기 있는 내 친구 배갑순입니다. "어려울 때 친구가 진정한 친구 A friend in need is a friend indeed!"라는 미국 속담이 생각나는군요. 그 때 이 친구가 사준 내셔날 밥솥과 스푼, 포크, 나이프, 토스터 기를 아직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글을 계속 쓸 수 있었던 것도 이 친구의 격려 때문이었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남편은 신문 일을 하고 나는 항공회사 있었던 것을 믿고 여행사를 오픈했는데 그냥 밥먹고 사는 정도였습니다.
답답하고 다시 천박한 생활이 이어졌습니다. 일하고 자고 일하고 자고 하는 생활이어서 도무지 자기 증명이 안되는 시기였어요. 뭔가 저 바닥 까지 내려가 정신적인 위기가 닥친 듯 했습니다. 무엇을 해야 되나.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인가 하는 위기의식이 나를 감쌌습니다. 이런 위기 의식이 글로 표현되었고 신문에 컬럼을 기고 하면서 글쓰기 수업이 시작되었습니다.
한편 그래도 미국에 왔는데 돈을 좀 벌어봐야하지 않을까하는 이중적이 생각이어서 그랬는지 남편과 함께 직장을 때려치우고 차린 게 샌드위치 가게였습니다. 이 경험이 <인연, 우연 그리고 필연>이라는 글로 남게 되었습니다. 샌드위치 가게는 아무나 하는것이 아니었습니다. 힘만 들고 돈도 못벌고. 그러나 경험이 남게되어서 그렇게 손해만 본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참 이상하지요. 매년 신문에서 <신춘문예>공모를 볼 때마다’ 마감일이 언제지’ 하면서 들여다보는 자신을 보았습니다. 그 때도 식품점에서 우연히 집어든 한국일보의 <문예공모>를 보게 되었어요. 마감 보름전이었지요.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어요. 그 때는 한글자판이 익숙하지도 못했어요. 컴퓨터 앞에 앉아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일주일만에 단편을 완성했어요. 일하고 늦게 집에 와서 글을 쓰는 형편이었기 때문에 글 쓴 시간은 20시간 남짓했어요. 남편이 보더니 괜찮다고 하더군요. 남편이 교정을 몇번인가 하고 다시 읽어 볼 시간도 없이 마감일 하루전에 부쳤어요. 그리고는 잊어버렸습니다.
어느날 저녁인데 전화가 왔어요. “여기는 LA입니다. 저는 소설 쓰는 송상옥이라는 사람입니다”하는 거예요. 숨이 멎는 듯 하더군요. 단편 당선 소식이었습니다.
그 때의 평은 “<인연, 우연 그리고 필연>은 어릴때 입양아로 미국에 보낸 아들을 우여곡절 끝에 만나게 되는 한 여인의 이야기. 칙칙하지 않고 걸림이 없는 전개 등 작품을 다루는 역량이 이미 자리 잡혀있다”는 송상옥 소설가의 말이었습니다.
상금 2천불을 받았는데 650불 치과, 350항공료지불, LA에서 친구들과 한 턱을 하고 달라스에서 당선축하턱을 내어 다 썼습니다.
하루 밤 사이에 유명해졌다는 말처럼 달라스에 있는 일간지 주간지에 내 당선소식이 대문짝만하게 실렸지요. ‘텍사스에서 처음 문예공모 당선’이라는 제목이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사실 오래전부터 이곳 주간지나 신문사에 컬럼을 써서 기고를 해 오고 있었고, 내가 쓰는 글이, 이미 내 글 수준에 맞는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문소설에 당선되었다는 것에 독자들은 오히려 새삼스러운 일이라는 듯 여기는 것 같았습니다.
어쨌든 미주본사 한국일보의 문예당선으로 해서 비로서 ‘등단’하게 된 것입니다. 이 등단이라는 게 글쓰는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라이센스입니다. 의사나 변호사, 목사들이 갖는 면허처럼 등단을 통해서야 비로서 글쓰는 사람으로써 공인을 받는 것입니다. 등단이라는 과정을 무시하려고해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 현실 사회의 질서여서 한편으로는 불만입니다만.
얼마전 <부고필라>에 노인특집으로 95세난 사람의 글이 실리었습니다. 65세에 은퇴해서 이제부터의 인생은 덤으로 사는 거다 하면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살다가 95세까지 된 노인의 고백이던가요. 자기가 65세이던 그때에 왜 새로운 일을 시작하지 않았는가를 후회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95세인 그가 새로운 언어 배우기를 시작했다고요. 105세가 되어서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에 대한 자기 실망감을 없애려고 한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늦게 시작한 내 글쓰기는 내가 뒤늦게 잡은 나의 일이기도 합니다. 젋었을 때처럼 쫓기지 않고 즐겁게 쓰려고 합니다. 내 글쓰기에는 남편과 두 아들이 협력하고 며느리까지 팬이 되어 나를 후원해서 저는 흐뭇하게 내 일을 하고 있는 편입니다. <부고필라> 독자들 또한 저를 후원하시는 분들인 줄 믿고 있지요.
사실 글쓰기는 피를 토하는 것처럼 힘들고 괴로운 것이지 결코 편안하고 즐겁고 아늑한 길은 아닙니다. 그러나 나는 적어도 강박관념은 갖지 않으려고 합니다. 가능하면 여러사람들과 재미있게 대화하며 자연스런 감정의 교류속에서 글을 쓰려는 생각입니다. 치열하게 쓰기에는 이제 기운이 딸리기 때문입니다. 조금은 비겁한 생각이겠지요.
최치원(임수자 8) - 한국문학에 대해 한국을 벗어나 외국에 살며 문학 행위를 하는것을 '이민문학 또는 '해외문학'이라고 하는것 같습니다. 저는 이민문학보다는 해외문학이라고하는것에 동의 합니다. 해외문학의 효시(嚆矢, the beginning)는, 저의 주장이 맞는다면, 저 옛날 신라의 문장가 최치원(崔致遠, 857년-?)이 아닌가 합니다. 최치원은 육두품 출신으로 성골 진골이 아니면 조정에 나아갈 수 없었던 불우한 시기의 천재였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12살의 최치원을 중국으로 보내며 그곳에서 출세하지 않으면 돌아올 생각을 하지 말라고 배에 띄워 보냈습니다. 중국에 간 어린 최치원이 공부를 하여 18살에 장원급제를 했지만 그곳에서 관리로 일할 생각이 없었지요. 황건적의 난때 황건적의 수괴를 의자에서 떨어뜨리도록 주술같은 시를 지어 혼내주고는 신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현실참여가 힘들어진 자신을 어쩌지 못하고 가야산으로 들어가 글을 쓰면서 살았습니다
김은국과 <순교자> (임수자10) - 최치원이 그랬듯이 한국을 떠나 해외에서 한국문학을 빛낸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김은국(Richard Kim)의 <순교자>는 영어로 씌여졌고,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는 독일어로 씌여졌습니다만 글의 내용은 한국문학입니다. 세종대왕의 한글반포(1446) 이후에도 한국의 사대부(士大夫)들은 한자로 글을 써왔습니다. 그렇다고 한자로 했다해서 중국문학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글의 내용이 한국인에 의한 한국의 얼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해외에서 한자나 영어나 독일어로 씌여진 글들은 언어의 차용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한국을 떠나 해외에 살면서 쓴 글에 대해 이민문학이라고 하는 말은 부정확하고 편견에 싸인 말이기도 합니다. 어네스트 헤밍웨이가 큐바에 머물면서 작품을 썼는데 그의 글을 이민문학이라고 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한국을 떠난 해외거주 한국인이 중국, 일본, 미국등 세계 각지에 육칠백만의 인구라고 하는데 이들의 세력이 얼마나 큰 것인지는 조금 더 지나 봐야 알 것입니다.
존재감 - 문학이란 인생의 반영입니다. 내가 이곳에 살면서 이곳 이야기를 쓴다는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입니다. 청소하는 사람이 많은 달라스에는 <바람지나가다>에 나오는 <지화순>, <찔레꽃>의 주인공 같은 분을 얼마든지 만나게 됩니다. 95년도 평양 방문단 일원으로 북한을 다녀와서는 <대동강제>를 썼습니다만, <바람지나가다>에 나오는 이야기는 모두 다 미국 동포사회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동안 수필이라고 이름 붙일 수 없는 잡문을 17년 써왔기 때문이 수필집 5권 정도의 분량이 됩니다. 이것도 삶의 현장 체험이 대부분입니다. 지금 읽어 보니 많이 모자라고 부정확한 정보가 들어가 있어서 출판이 망서려지고 있습니다.
지난 해 12월에는 원고지 1천매 정도의 장편을 써서 한국의 문학지에 응모를 했는데 아직까지 소식이 없는 걸보니 수상대상에서 제외된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장편을 구상하고 있고 계속 써 나갈 생각입니다. 저는 고독의 실체를 경험한 세대로 타인의 고독을 이해하고저합니다. 그러면서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존재가치를 높이는 그런 작업을 하려고 합니다.
지금까지 저의 이야기를 들어 주시어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앞으로 여러분들과 더불어 함께 머물기도 하고 잠시 떠나기도 하면서 늘 가까이 교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