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사익 거문고 병창 - 나그네

by 김 혁 posted Jun 30,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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江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南道 三百里

술 익는 마을 마다
타는 저녁 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나그네, 朴木月)

 

 

 박목월(朴木月)은 조지훈(趙芝薰), 박두진(朴斗鎭)과 더불어 소위 청록파(靑鹿派)

시인의 한사람이다. 아마 60년대까지는 이 시인이 노래한 한국의 토속적 풍경은 모두에게 익숙한 것이었으리라. 그러나 이제 시골 논바닥에도 콘크리트 고층 아파트들이 들어 선 한국에서는 이러한 정경은 모두 사라져 버렸다고 하겠다.

요즘 한국 중 고등학교 학생들이 이 시를 읊고 어떠한 감상을 하게 되는지 궁금하다.
강나루, 나그네, 술 익는 마을, 밀밭, 타는 저녁 놀, 이러한 것들이 그들에게 무슨 실감이 가는지 의문이 간다. 나는 어릴 때 강가 시골 마을에서 살았기 때문에, 강을 건너는 나룻배와 그 말 없이 묵묵하던 늙은 사공을 잘 기억한다.
시골집 대청 마루에 누워서 여름밤이나, 가을밤에 바라 보았던 그 검푸른

밤하늘의 달과 구름. 달이 흘러 가는지, 구름이 흘러 가는지, 세상일을 모두 잊게 하던 그 신비스런 달밤. 그리고 종종 사랑방에 들리던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모르는 과객(過客), 그 히피(Hippie)와도 같았던 나그네.

이 시에서 말하는 술은 막걸리, 또는 탁주라고 부르는 민가(民家)에서 누룩으로 빚든

밀주로 요즘의 무슨 맥주나, 포도주나, 위스키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막걸리가 항아리 속에서 달콤하다가 텁텁한 맛으로 익어가는 것을 잘 기억한다.
우리 할머니가 담구어 놓은 밀주가 아직도 완전히 익지 않아 달콤했을 때 단짝 친구와 같이 몰래 퍼먹고서, 마침내 취해서 까르락거리며 대청마루에서 대굴 대굴 구는

우리들을 얼른 자기방에 숨겨 잠자게 하셨던 할머니.
그러나 결국 우리 어머니께 발각되어 회초리 벌을 단단히 받았고 온 집안 식구가

알게 되었지만….

밀밭? 그 밀 서리를 해 먹던 밀밭 말이지? 싱싱하게 익어가던 황금빛의 밀밭,
바람에 물결치듯 울렁이던 밀밭. 그 밀밭 한가운데로 외줄기 길이 있고,
도포 자락을 바람에 휘날리며 걸어가던 나그네가 이 밀밭 길의 한가로움과 외로움을

잊을 수 있겠는가?

서정주(徐廷柱)의 시 ‘국화 옆에서’를 영어로 훌륭하게 번역한
Cornell대학교, David McCann 교수의 ‘Beside a Chrysanthemum’를 읽으면서,
나는 곧장 이 박목월(朴木月)의 시는 그도 번역하기가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다.
이 시의 배경이 된 한국의 토속적 이메이지(Image)와 압축된 간결한 표현 때문에
번역이 불가능하다고 단정지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이것은 아마 외형적인 관찰에 불과할수 있다.
틀림없이 이 시의 주제는 나그네이다. 이 나그네는 정처없이 떠도는 방랑자이다.
영어로는 Wanderer라 할가, Vagabond라 할가, Wayfarer라 할가.
내가 60년대 유학시절에 미국 대학 켐프스에서 만났던, 그 히피(Hippie)들이라고 할가.
이 나그네는 달과 구름과 같이 세속적인 구속이나 집념에서 벗어나 무엇을 갈구해

헤매는 것이 아닐까?

이 박목월의 시는 토속적인 한국적 이메이지를 바탕으로 했지만, 동양적이라거나
서양적이라는 이원적(二元的)인 평가의 한계를 넘어서 인간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방랑자를 노래했다고 하겠다.
그것은 한 나라의 언어나 이를 바탕으로 한 외형적 표현에 구속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시도 영어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를 요즘 다시 읊으면 나도 이제 나이가 들어서인지
결국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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