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번의 짧은 여행기간 동안에 단 한군데라도 더 많이 구경하고 오려고 그야말로 뛰다시피 싸돌아 다녔는데 그 대상 중에는 박물관들도 여러 곳 끼어 있었다.
그러나 그 넓은 미국 땅에 산재해 있는 무수한 박물관이며 미술관들을 일일이 다 둘러보는 수는 물론 없어서 각 분야마다 특색 있고 이름난 곳을 몇 곳만이라도 빠뜨리지 않으려고 무척 애를 썼다.
이를테면 워싱턴시의 스미소니언 박물관군에 포함되어 있는 그 이름도 유명한 국립인류발달사박물관이나 국립미술관, 프리어미술관, 항공우주박물관 등으로부터 뉴욕의 매트로폴리탄박물관, 시카고의 산업과학박물관, 디트로이트의 핸리포드박물관 등과
작게는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의 밀랍박물관에 이르기까지 시간과 발길이 허용하는 한에서 더 많은 그들의 문화와 문명을 확인하고자 분주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극성스럽게 찾아다닌 곳에서 마다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부럽도록 광범위하고 풍부하게 모아놓은 전시품이나 훌륭한 시설들과 나아가 그들 국민의 열렬한 문화애호 정신이었다.
넓게는 우리의 인류가 어떠한 발달과정을 거쳐서 현재에 이르렀나를 소상히 보여주는 곳을 비롯해서 좁게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이루어지기까지 어떠한 역경과 고난과 시련이 있었고 또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어떠한 지혜와 노력과 업적들을 쌓아 왔나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펼쳐놓은 곳이 있는가 하면,
전 세계 고금세대(古今世代)를 통하여 걸작으로 지목되어 온 무수한 미술 작품들을 수집 진열하였거나, 근대 문명의 근간을 이루는 과학 산업의 발달사와 현대과학의 정수(精髓), 그리고 그 첨단을 넘어서서 미래를 암시하는 각종 기기와 문명들을 전시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경탄을 금할 수 없게 하였던 것이다.
어느 한군데, 어느 한 진열실을 온종일 둘러본다 하더라도 신에 차지 않을 만큼 풍부하고 경이롭고 또한 신비롭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의 축적은, 그 나라가 잡다한 이민 민족으로 구성된 역사일천한 합중국이라는 이유 때문에 별 수 없이, 그들 자신의 손으로 이룩하였거나 직접 내세울 수 있는 자산이란 고작 현 근세의 문명소산들 뿐이고,
그 밖의 것들은 대부분이 그들의 풍부한 자원과 재력을 바탕으로 긁어모아진 것들이어서 어딘가 공허한 감을 주었으니, 이는 마치 신흥부호의 호화주택 서재에서 장식용 「브티태니카」사전을 보았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다만 여기서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면 그것은 수많은 관람자들 속에 외래 관광객들 말고도 많은 그 나라 문화애호 국민들이 끼어있는 것으로 보였던 점뿐이다.
특히 이러한 느낌을 갖게 된 몇 가지 이유 중의 하나는 내가 스미소니언 구역의 프리어미술관 한국 미술실에서 발견한 한 폭의 동양화 때문이기도 하였다.
우리의 눈에 익은 이 그림의 한 구석에는 「낭곡(朗谷)」이라는 작자의 이름이 쓰여 져 있었는데 그 밑의 영문 설명판에는 「이조시대의 화가 Rokoku(주:朗谷(낭곡)의 일어발음)의 그림」이라고 되어 있었으니 도대체 이 화가가 어느 나라 사람이었는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풍요한 자원을 바탕으로 빈약한 역사를 딛고 일어서려는 저들의 노력이 비록 가상은 하지만, 잘 장식된 그들의 문화 속에서도 군데군데 눈에 뜨이는 이러한 도장(塗裝)의 허점은 어쩌면 불가피한 것이었을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