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이 다시 눈을 뜰 때 / 홍수희 -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이제 더는 내가 너에게
해 줄 무엇이 전혀 없음을 깨달았을 때
그때 비로소 내 안에서
사랑은 다시 눈을 뜨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해가 지고 난 후에야
부스스 눈을 뜨는 등대처럼
깜깜한 풍랑 속을 헤치고 나온 다음에야
어렴풋 실루엣을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아, 이제까지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고
우웅우웅 터엉 비워버린 내 마음의 쓸쓸한 허공에
다시 또 네가 교교히 차오르기 시작하는 것이다
사랑은 부디 무얼 해주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고
손끝도 발끝도 꼼짝없이 포박을 당한 채,
잠자코 곁에 있어주기만 하자는 것이다
이제 더는 내가 너에게
해 줄 무엇이 전혀 없음을 깨달았을 때
그때 비로소 내 안에서 사랑이,
사랑이 다시 눈을 뜨기 시작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