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그시 / 이향숙
눈 한번 감아 보는 거야
네 입술이 조금씩 주홍으로 가쁘고
훔친 봄밤이 속눈썹 위에 앉아 가늘게 떨고 있는 순간
지그시
인사도 없이 헤어진 만남들에게
뒷주머니에서 미처 꺼내지 못한 약속들에게
더는 가보지 못할 무지개 뜬 언덕 너머
서둘러 물들고 떨어지느라 바쁜 낙엽들에게
지그시
잘 못 뱉은 말들이 도로에 낭자하게 피어날 때
돌아서서 안으로 큼큼
바람이 숨 가쁘게 구름버튼을 눌렀을 때
온통 젖어버린 공책처럼 슬픔의 뼈들이 삐뚤빼뚤 선명해질 때
지그시
다시 눈 뜰 수 없는 새끼를 내려놓으며
먼 길 떠나는 순록의 눈빛처럼
골목을 돌아나가는 방울뱀의 긴 꼬리 여운처럼
지그시
멀어지는 것들의 뒷모습을 천천히 거두는 거야
아무리 끼워 맞춰도 모자란 12월의 어깨를 감싸보는 거야